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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레시피로, 오늘도 한 입

문학적인 식탁: 문학 속 식탁이 오늘의 식탁과 만날 때

by 황유미
문학작품 속 식탁이 21C 소설가의 식탁과 만난다면? 삼시 세끼 집밥을 추구하는 집밥주의자 소설가가 문학 속 식탁을 통해 오늘의 인생을 맛있게 요리해보려고 합니다.



매일 혼자 점심 먹는 사람


가끔 지금의 삶이 ‘할 수 없는 것’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아 누덕누덕 붙여둔 콜라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야말로 의도를 읽을 수 없는, 철저히 우연에 기대어 하나 둘 이어온 얼렁뚱땅 콜라주. 나는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요리조리 피해다니며 살아왔을 뿐인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매일 집에서 혼자 밥 먹는 직업’을 갖게 된 것이다.


첫 직업을 구할 때만 해도 생계만 해결할 수만 있다면 그게 뭐든 달게 받아들일 수 있겠다 싶었다. 광화문, 시청, 강남, 상암… 깔끔한 옷을 갖춰 입고 출퇴근 하는 직장인 무리에 발을 슬쩍 들여서 몸을 맡겨보기도 했다. 인파에 실려 흘러 흘러 가다보면 운명처럼 어느 회사가 나를 향해 문을 활짝 열어주지 않을까 싶어서. 딱 1인분만 하고 싶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 끼니’ 만큼은 의존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직업인이 되면 고민이 없을 것 같았지만, 그로부터 1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 나는 사춘기처럼 매일 적성과 직업을 고민하고 있다.


어떤 상황에도 개의치 않고 밥 만큼은 잘 챙겨 먹는 게 적성이고 특기이긴 한데… 혼자인 집에서도, 사람들이 바글바글 많은 곳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내 식탁’에 집중하는 능력 하나 만큼은 자신있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자격 조건에 ‘어디서든 혼자 밥 잘 먹는 사람’을 내건 회사는 본 적이 없어서 다른 적성을 쥐어짜내기 전까진 당분간 재취업은 요원해 보인다.



혼밥은 좋아도 외로운 건 싫으니까


이 세계에서는 비록 이루지 못한 꿈이지만 혼자서도 밥 잘 먹는 게 돈으로 교환이 가능한 재주가 되는 세계도 있다. 그쪽 세상에서는 혼자 밥 먹는 방법을 가르치는 학원이 있고, 헬스장이나 요가원에 가는 대신 점심시간마다 학원에 가서 혼밥의 기술을 부지런히 연마하는 직장인도 있다. <1인용 식탁>의 주인공 오인용은 9개월째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무실에서 점심마다 배제를 당한 탓에 혼자 먹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원에 등록하기에 이른다.


[1인용식탁]책표지.jpg <1인용 식탁> 윤고은 저, 문학과 지성사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혼자만의 식사에 집중하기 위해 학원까지 등록한 인용을 마냥 어리석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단 소설이 발표된 시기가 막 ‘혼밥’이란 말이 생겨나기 시작한 2010년대 이전(2009년)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학원의 상술이 얄밉게 느껴질 수는 있어도 인용의 고충 만큼은 혼자 밥 먹는 사람이 도처에 널린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건 혼자라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무리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혼자만의 시간은 언제든 고립을 끊고 합류할 수 있는 소속이 있을 때 달콤하다. 필요할 때 연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진 순간 나를 뺀 ‘나머지’들을 한묶음으로 인식하고 은연중에 ‘나’의 반대편에 ‘그들’을 위치시킨다. 혼밥을 아무리 좋아해도 소외감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고독이 체질인 인간이라고 해도 선택권 없이 별안간 혼자 남겨진 상황은 속 쓰리다. 인용은 주말마다 다음주 점심 시간엔 어떻게 끼니를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편히 쉬지도 못한다. 인용의 고민은 월요일에 햄버거를 먹을까 김밥을 먹을까 하는 메뉴 고민 따위가 아니다. 점심 시간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리는 동료들과의 어그러진 관계를 되돌릴 방법, 즉 직장 내 인간 관계에 대한 총체적인 고찰이다. 어쩌면 인용이 학원에서 배우고 싶었던 건 혼자서도 밥 잘 먹는 방법이 아니라 외로움을 견디는 방법, 나아가 어쩐지 나 빼고 즐거워보이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무리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방법이지 않았을까.



어쩌다 혼자가 됐냐 물으신다면


“어쩌다 혼자 남게 됐어요?”


인용이 돌파구를 찾기 위해 혼자 먹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원을 찾아가는 동안 나는 직장 동료에게 추궁을 당하고 있었다. 소설이 발표된 2009년, 시청역에 있는 한 회사에서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 즈음 나는 직장에서 ‘매일 혼자 밥 먹는 알바’로 통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옆옆 자리 동료가 선심쓰듯 나를 불러냈다. 출근 첫 날에 사수와 단 둘이 식사를 한 이후로는 누가 먼저 밥 먹자고 말을 건 게 처음이었다. 식사 내내 동료는 매일 점심 약속이 없는 내가 측은했는지 부서 사람들의 이름까지 하나 하나 거론하며 신신당부했다.


“00 씨랑 ** 씨한테 붙어요. 거기 끼어서 같이 먹으면 되잖아요.”


순간 두 귀를 의심했다. 어림 잡아도 나보다 나이가 열 살 이상은 많을 것 같은, 번듯한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실은 점심 때마다 ‘여기여기 붙어라’ 같은 편 먹기 게임을 해서 짝을 지으려 애쓰고 있었단 말이야? 내가 ‘붙어야’ 하는 사람까지 추천해준 동료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후로도 계약 기간이 만료될 때까지 점심 시간마다 청계천 일대를 유령처럼 떠돌아다녔다.


이름 모를 사람들 틈에 끼어들어 잠시 사회적 자아를 지우고 ‘아무것도 아닌’ 무언가가 되는 시간을 즐겼다. 표정, 말투, 행동과 태도를 관리하지 않고, 물처럼 흘러나오는 상념에 집중하는 순간 해방감을 느꼈다. 마치 돌아가야 할 곳이 없는 사람처럼 축축한 물내음을 따라 헤맸다. 목적 없이 멤도는 걸음, 매듭을 짓지 않아도 되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나만 아는 성을 짓고 그대로 걸어들어가 문을 닫아걸었다. 투명 인간 같았던 첫 직장 생활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의연한 모습을 연기했다. 여차하면 잘 봐달라고, 나를 좀 봐달라고 노력할 테니 되새겨야 했다. 노력하지 않기.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기. 친해지려고, 호감을 사려고,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혼자 되기’를 택함으로써 나는 나를 지켰다.



나에겐 비상구 같았던 혼밥


회식을 하는 날이면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익어가는 고기를 뒤집거나 빈 잔을 채워주는 모습을 바라보다 묘하게 들떴다. 함께 하는 식사 자리에서 나쁘지 않은 흥분을 느끼고 연결과 소속감이 주는 안정감에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리가 길어질수록 비굴한 태도로 자꾸 대화의 보조를 맞추려 애쓰는 내 모습을 자각할 때마다 깜짝 깜짝 놀랐다. 사회생활 잘 하네. 그런 말을 들은 날이면 뿌듯하기는 커녕 수치심을 느꼈다. 떠들썩한 무대가 끝나면 공허가 남는 것처럼, 사람들과 시끌벅적하게 연결된 사회생활을 해낸 다음 날 점심시간이면 영락없이 숨을 곳을 찾아다녔다.


쏟아지는 말, 평가하는 시선, 동의한적 없는 기준이 오가는 만찬 테이블을 벗어나 무작정 도망치듯 종로 일대를 걸어다니며 작은 덮밥집만 골라 문을 두드렸다. 무리에 편승하기 위해 잠시 내려놓았던 나 자신을 찾으러 가는 절박한 여정이었다. 횡단보도 건너편, 파도처럼 몰려오는 인파를 바라보면 아득하게 질려 눈을 질끈 감고 싶었지만 애써 부릅뜨고 아는 얼굴이 있으면 놓치지 않고 꼬박꼬박 인사했다. 그러면서도 빌었다.


아, 제발. 말은 걸지 말아라. 그냥 지나쳐라, 제발.


‘제발’이라고 외치는 날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승모근은 올라갔고 어깨는 굽었다. 자주 가는 덮밥집의 숫자도 늘어났다. 나에게 딱 맞는, 알맞은 자리를 꿰차고 있다는 편안함을 느끼며 밥맛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특별한 맛은 아니었지만 그 시절 나에겐 필요한 맛이었다. ‘9와 4분의 3 승강장’처럼 덮밥집은 몸에 맞지 않는 생활을 잠시 뒤로하고,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마술적 세계로 통하는 통로가 되어주었다.



오늘도 나만의 리듬으로


상호작용에 대한 압박 없이 먹는 행위에만 집중해 식사를 이어가는 동안 비로소 나만의 리듬을 회복했다. 잠시나마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꼭 알맞은 박자로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었다. 인용이 혼자 밥 먹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학원에서 처음 배운 것 또한 박자였다. 노래를 부른단 생각으로, 밥과 국, 반찬 사이를 오가며 ‘강약중강약’ 같은 적당한 세기를 고려해 식사를 이어가는 방법을 배우는 장면이 나온다. 눈앞에 있는 ‘갑’의 속도와, 입맛, 그의 취향에 맞는 적당한 소재의 대화를 쥐어 짜내고 이어가느라 정작 내 밥그릇이 줄어드는지 마는지,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고 귀한 점심시간을 다 써버리고 나면 리듬 회복은 커녕 바닥이 난 정신력 때문에 숨 고르느라 바쁘다.


요즘엔 매일 점심 집에서 나만의 식탁을 꾸린다. 그 누구의 취향도, 입맛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아득한 자유가 주어진 식탁이 가끔은 어렵다. 냉장고 안에 재료가 많을 땐 많은대로, 없을 땐 없는대로 뭘 먹을까 고민하느라 글 쓸 때보다 더 진지한 얼굴이 된다. 아무리 내가 “뭐 먹을까” 고민하는 시간을 좋아하는, 먹기 위해 사는 인간이라지만 밥 한 끼에 쏟는 고민이 지나치게 무거워지는 것 같을 땐 덮밥을 만든다.


어제 점심에도 요리를 하고 남은 것들을 섞어 기름을 살짝 둘러 볶은 다음, 양상추를 찢어넣은 샐러드 덮밥을 만들었다. 한 입 한 입, 씹어 먹는 동안 오늘의 할 일을 떠올리며 쫓기듯 바빠진 마음도 제자리를 찾아갔다. 중간-약-약 다시 약-약-약. 자꾸만 바빠지려는 박자를 누르며, 오늘의 할 일 대신 지금의 밥상에 집중하는 순간 마치 어둡던 방 안에 불을 켜듯, 기분이 달라진다. 혼자 먹는 점심은 고요하지만 환하게, 느리지만 지루하지 않은 적절한 밝기로 오늘의 나를 깨우는 의식이다. 역시 아주 맛있지는 않지만, 오늘의 나에겐 필요한 맛이다.



나만의 리듬을 회복하는 샐러드 덮밥


새송이 버섯을 취향에 맞는 크기대로 잘라 기름을 살짝 두른 팬에 익힌 뒤 밥 위에 토핑처럼 얹는다 (버섯 대신 가지, 브로콜리, 애호박, 오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양상추를 먹기 좋은 크기로 손으로 찢어 한 움큼 같이 넣는다

후리가케를 한 봉지 뿌린다 (생략 가능)

맛간장 한 큰술, 청귤액 한 큰술, 참기름 반 스푼을 넣고 잘 비벼준 뒤 맛있게 먹는다 (맛간장과 청귤액은 진간장과 매실액으로도 대체 가능)

[1인용식탁]샐러드덮밥.jpeg 꼭꼭 씹어 먹으면서 박자를 타게 되는 샐러드 덮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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