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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밍밍할 땐 집들이를

문학적인 식탁: 문학 속 식탁이 오늘의 식탁과 만날 때

by 황유미
문학작품 속 식탁이 21C 소설가의 식탁과 만난다면? 삼시 세끼 집밥을 추구하는 집밥주의자 소설가가 문학 속 식탁을 통해 오늘의 인생을 맛있게 요리해보려고 합니다.



불량 작가의 유일한 재주


꼴보기 싫은 작가 친구가 눈치를 주는데도 자꾸 연락이 오거나 좀처럼 멀어질 생각이 없어 보인다면 이런 말을 해보자.


글은 어때? 잘 써져?

다음 책은 언제 나와?

요즘 바쁘지? 그게 맞지.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머지않아 소리소문 없이 멀어질 수 있을 것이다. 글이 잘 써지지 않아서, 기껏 쓴 글도 외면하고 싶어서 몸부림치다가 갖가지 외부요인(마감과 원고료) 때문에 허겁지겁 마무리하는 생활이 다반사인 나 같은 불량 작가는 “글 잘 쓰고 있냐”는 말이 “일을 하고 있긴 하니? 그게 네 최선이니?” 하는 말처럼 들려서 뜨끔하고 만다.


아무래도 일을 사랑하는 재주는 없다. 나에게 일은 해치워야 하는 노동일 뿐이고 생계를 책임지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그렇지 않다는 사람도 사실 일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일에 몰입하는 자기자신의 모습’에 홀리는 게 아닐까. 창작 노동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글쓰기를 하는 자기 모습에 흠뻑 매료가 되거나, 끝까지 거리를 두는 작가가 있다. 안타깝게도 나는 팔짱을 끼고 엉터리 같은 문장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는 내 모습을 관전하며 한심해하는 ‘거리두기’ 유형의 작가다. 매일 빠짐없이 실망하면서도, 첫 문장을 쓰면 어쩐지 이번엔 다를 것 같다는 기대감이 차오른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재주가 아마 이것일 테다. 반복하는 재능.


기대의 다른 말은 ‘영감’이다. 영감이란 결국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도 매번 다른 목표를 세우거나 다른 접근을 꾀하고 싶다는 의지가 생겨나는 것이다. 반복적인 일을 해오던 방식 그대로, 고민 없이 빠르게 해치워서 없애버리고 싶단 욕구만 남아있으면 영감이 바닥이 났다고 표현한다. 영감에 불을 지피는 스위치는 등뼈에 붙어있다. 다행히 손이 닿는 곳이다. 작동 방식이 독특한 이 스위치는 필요한 순간에 손을 뗐다 댔다 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등뼈에 불을 켜는 방법


등뼈에 불을 켜려면 먼저 식탁 하나를 구해야 한다. 식탁이 클수록 입도 여럿 늘릴 수 있으니 좋지만 집 크기에 맞춰 준비하도록 하자. 그리고 맛있는 걸 먹이고 싶은, 대화가 기대되는 친구들에게 초대장을 돌린다. 우리집엔 나처럼 등뼈에 있는 불이 꺼질까 사라질까, 애지중지 아끼며 살아가는 친구들이 오간다. 누구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또 누구는 영화를 찍을 때 척추에 콕 박힌 램프에 불이 번쩍 들어오는 찌릿한 감정을 느낀다. 자기만의 방에 틀어박혀 이야기를 짓느라 속 시끄러운 여자들이 모여 4인용 식탁을 빈 틈 없이 채운 요리를 살뜰하게 먹어치운다. 그런 날이면 꼭 책상으로 돌아가 글을 쓰고 싶어진다.


“등뼈에 불을 켠다”는 재미있는 표현은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쓴 말이다. ‘여성과 문학’에 대한 대학 강연 내용을 구성한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말은 여성이 소설을 쓰려면 연간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즉 여성이 직업인으로서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는 경제적, 정신적 독립이 중요하다는 지론일 것이다.

[자기만의방]책표지.jpg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이미애 옮김, 민음사


사실 울프는 돈과 방 외에도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한 가지 요소를 더 언급했다. “저녁 식사를 잘 하지 못하면 사색을 잘할 수 없고 사랑도 잘할 수 없으며 잠도 잘 오지 않습니다.”라는 말로, 고도의 지적 노동을 하려면 일단 ‘잘 먹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약 100여 년 전부터 밥이 부실하면 영감인지 뭔지 국물도 없다는 가르침을 설파한 ‘맛 좀 아는’ 여성이 있었다니.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언니가 가상의 남성 대학과 여성 대학에서 주어진 식사의 품질을 신랄하게 비교하며 평범하고 초라한 식사로는 “등뼈의 절반쯤 내려간 곳, 영혼이 머무는 곳”에 불이 켜지지 않아 심오하고 섬세한 작업을 해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동안 서울특별시 봉천동의 모처에서 나는 배를 긁으며 텅 빈 냉장고를 바라보고 있었다. 썩기 일보직전인 양파 두 개가 굴러다니는 채소칸만 멍하니 보다 그냥 닫아버렸다.


장을 본지 2주가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배달 앱에서 쿠폰을 뿌릴 때마다 착실하게 접속해 할인 메뉴를 골라 주문했고, 아이디 옆에 달린 배지 색깔이 변했다. 아이디는 ‘레벨 업’이라는데 기분은 좀처럼 올라가지 않고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이젠 ‘오늘 뭐 먹을까’라는 고민마저 성가셨다. 여차하면 배달 앱에 있는 할인 메뉴 다섯 가지 중에서만 고르면 되니 상상력을 펼칠 이유가 없었다. 이러다 영영 등뼈에 붙은 램프가 고장이 날 것 같았다.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밍밍한 건 싫으니까


그즈음 뭘 써도 재미가 없었다. 어떻게 써도 ‘넘기기만’ 하면 끝이란 무심한 태도로 쓰는 일을 이어갔다. 분량을 채우기 위해 마음에 없는 소리를 지어내다 삭제하길 반복했다. 구색만 갖춘 보고서를 찍어내는 기분이었다. 바싹 마른 흙 위에서 풀이 돋아나기 어렵듯, 건조한 감정 안에서는 ‘진짜’가 흘러나올 수 없었다. 글에 진짜를 담을 수 없으니 계속 거짓에 거짓, 또 거짓을 불어넣어야 간신히 모양을 짜맞출 수 있었다. 쓰는 동안 스스로 가슴을 건드린 지점, 정서적인 울림을 느낀 구간이 하나도 없었던 글은 시간을 두고 다시 읽어봐도 인상이 흐릿했다. 아울렛 매장에서 2만 9천원에 파는 무늬 없는 맨투맨처럼, 무난하고 편안하지만 눈을 사로잡는 구석이라고는 없는 밍밍한 맛이었다.


담백한 맛과 밍밍한 맛은 엄연히 다르다. 담백한 요리는 바닥이 보일 때까지 퍼먹게 되지만, 밍밍한 요리는 ‘더 안 먹어봐도 알 것 같은’ 허술한 맛이다. 요리사가 조리할 때부터 텅 빈 맛을 느껴버린 요리를 기대하며 먹는 손님은 없다. 글은 밥이 아니지만 삶에서 얻은 재료를 모아 정돈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는 꽤나 비슷한 면이 있다. 감각을 열어둔 채 완성된 결과물의 맛을 상상하며 간을 맞춰야 한다.


간을 맞추려 노력하지 않은 글을 다시 꺼내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시큰둥한 태도가 엿보인다. 미각을 상실한 요리사도 아닌데 몸에 박힌 조리법만 믿고 간을 보고 맞추는 과정을 함부로 생략하곤 했다. 일을 사랑하진 않지만 증오하진 않는다. 마찬가지로 글쓰기도 사랑하진 않지만, 미워하지 않기에 기왕이면 맛있게 쓰고 싶다. 나에게도, 남에게도. 그러려면 일단 요리사가 더 맛있게 만들겠다는 의욕을 회복하는 게 먼저다.



불량 요리사는 손님이 필요하다


권태로운 불량 요리사는 의욕을 끌어 올리기 위해 손님부터 불러들인다. 아무리 간도 맞추기 싫을 정도로 의욕이 없어도 손님이 온다면 말이 달라진다. 그래도 친구된 도리로, 간은 맞춰야지. 일산에서 서울까지 오는 애도 있는데, 기왕이면 집에서 쉽게 먹을 수 없는 정성이 느껴지는 요리를 내보내야지. 다행히 그런 양심은 남아있어서 시장에서 홀린 듯 제주산 흙당근을 구해왔다. 전날엔 미리 우엉과 당근, 곤약,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톤지루를 구수한 맛이 날 때까지 푹 끓였다.

[자기만의방]식탁.JPG 오랜만에 친구들을 불러모은 요란한 식탁


당근을 싫어하거나 별 생각이 없는 사람도 당근을 돈가스처럼 튀긴 당근카츠를 해주면 표정이 달라진다. 흥분한 어린 아이처럼 탄성이 나오며 내가 알던 당근이 맞는지 의심하는 말이 오간다. 연어 샐러드에 들어간 샐러리 잎에서 나는 향을 맡으며 이게 뭔지 물어보고, 톤지루 안에 잔뜩 들어있는 갖은 야채들을 흥미롭게 관찰하며 국물의 간은 어떻게 맞춘 건지 궁금해하는 손님들에게 잔뜩 신이 나서 레시피를 읊다보면 ‘아, 맞아. 이 맛에 요리하지.’ 싶다. 반짝, 등뼈에 불이 켜진다.


나에겐 당연한 것들이 누군가에겐 새로운 자극, 배움일 수 있다. 혼자 먹을 땐 몰랐던 가치를 손님에게 선보이고 나서야 깨닫는 것처럼, 내가 쓴 글의 의미를 함부로 폄하하고 싶을 때마다 되뇌인다.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겐 미슐랭 3 스타 식당의 고급 요리처럼 맛있게 느껴질 수도 있다. 예단하지 말고, 신중하게 간을 잘 맞춰서 완성하자.



식탁과 친구만 있다면 내일도 쓸 수 있겠지


4인이 옹기종기 끼어 앉아야 하는 소박한 식탁은 크거나 화려하지 않지만 네 명의 여자를 배불리 먹이기 위한 요리를 올리기엔 충분했다. 만화를 그리는 친구는 제약 없이 상상을 펼치기 위해 인체와 투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영화를 준비하는 친구는 자신의 관심사와 보다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주제의식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차기작을 준비중인 동거인 서귤 작가는 자료조사를 하느라 읽었던 사료 중에서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꺼내 들려주었다.


나는 오늘 밥을 했고, 어제는 집들이를 핑계로 오랜만에 장 다운 장을 봐서 재료가 많아졌고, 해서 내일은 남은 우엉과 샐러리를 볶아 먹고 싶단 계획을 얘기했다. 엉금엉금 기어가는 속도로 조금씩 명맥만 이어가고 있는 내 작업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진 못했지만 상관 없었다. 그 순간, 식탁을 둘러싼 여자들이 자기만의 방에서 굴리고 키워온 이야기의 단면을 밥상머리 앞에서 나눈 바로 그 순간에 내가 쓸 첫 장편소설의 선명한 ‘맛’을 느꼈으니까. 바닥까지 싹싹 핥아먹고 싶은 담백한 백반 한 상 같은 그런 슴슴한 이야기.


그날 이후로 글과 생활을 대하는 태도가 성의 없어질 때마다 가슴 속에 식탁 하나를 그린다. 그곳에 이야기를 쓰는 친구들을 초대하고, 그 친구들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상을 하면 꺼져가는 불씨가 살아난다. 다시 척추를 바로 세우고 몰입하게 된다. 등뼈에 박힌 램프는 다행히 아직 불씨가 꺼지지 않았다.



등뼈에 불을 켜는 당근카츠


당근을 한 입에 베어먹기 좋은 두께로 썬 다음 굵은 소금을 밥 숟가락 기준 반 스푼 넣고 버무린다

당근에서 물이 충분히 베어 나와 소금에 절여지기를 기다린다

물이 베어 나온 당근을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지 않고 중간불에서 약불로 익힌다

당근이 젓가락이 들어갈 정도로 익으면 불을 끈다

밀가루, 밀가루와 물을 1대 1 비율로 섞은 밀가루 물, 빵가루를 준비한다

익힌 당근을 밀가루, 밀가루 물, 빵가루 순서로 묻힌 뒤 끓는 기름에 넣고 튀긴다

튀김은 빵가루가 식빵 색이 되면 꺼낸다


*혜연 선생님의 [마크로비오틱/비건 식탁 오늘] 수업에서 배운 조리법을 참고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자기만의방]당근카츠.JPG 한 입 깨무는 순간 눈이 번쩍 떠지는 당근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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