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인 식탁: 문학 속 식탁이 오늘의 식탁과 만날 때
문학작품 속 식탁이 21C 소설가의 식탁과 만난다면? 삼시 세끼 집밥을 추구하는 집밥주의자 소설가가 문학 속 식탁을 통해 오늘의 인생을 맛있게 요리해보려고 합니다.
한 여자가 토요일 오후, 차를 몰고 쇼핑센터에 있는 빵집에 간다. 여자는 아들의 아홉 살 생일을 앞두고 잔뜩 들떠있다. 아들의 이름 ‘스코티’를 새긴 우주선 모양의 케이크를 주문하는 동안 제빵사에게 아이 얘기를 빌미로 친근하게 말을 붙여보지만 남자는 제 할 일에만 집중한다. 제빵사는 건조하게 ‘월요일 아침에 찾으러 오라’고 픽업 시간만 알려준다. 그렇게 두 사람의 짧은 만남은 끝난다.
약속한 월요일 아침, 여자의 아들 스코티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의식을 잃는다. 병원 침대에 누워 죽은 듯 잠을 자는 아들을 바라보며 부부는 의사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어떻게 혼수 상태는 아니라면서 깨어나지 않을 수 있는지, 어째서 복잡한 검사를 마쳐도 아들이 깨어나지 않는 이유조차 알 수 없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집번호로 자꾸만 오는 전화와, 퉁명스럽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다. 다그치듯 울리는 전화벨에 남편은 신경이 곤두서고, “케이크가 있다”는 말에 장난전화라 생각하고 거칠게 전화를 끊어버린다. 여자 역시 아들을 지켜보느라 빵집 냉장고에 잠들어 있는 케이크 따위는 당연히, 안중에도 없다. 마침내 스코티가 숨을 거둔 날, 부부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말에 폭발하고 만다.
“스코티, 스코티 문제는 잊은 거요?”
“이 개자식, 죽여버릴 거야.”
이번엔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대한 이야기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목요일 오후, 여자는 단골 가게에 들려 크리스마스 장식이 된 맞춤 케이크를 찾아왔다. 눈꽃 같은 밤 크림이 장식된 달콤한 케이크에는 짙은 초록색 리본이 묶여있었다. 기다란 리본은 아무래도 루루가 좋아할 거 같아. 케이크를 다 먹으면 버리지 말고 놔둬야지. 루루는 여자와 같이 사는 식빵 색 고양이로, 올 해 세 살이다.
여자는 루루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동물을 무서워했다. 낯설고, 두려웠다. 돌봄과 책임을 다할 자신이 없어 ‘귀찮다’는 말로 밀어내기 바빴다. 심지어 고양이 두 마리와 사는 동거인의 집에 이사를 온 뒤조차, 고양이를 힐끔 거리기만 하고 데면 데면하게 지낼 정도로. 루루는 그 모든 거리를 단숨에 ‘폴짝’ 뛰어넘어 다가와준 용기 있는 고양이다. 마음을 열 줄 모르는 인간에게도 영역에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공평하게 애정과 관심을 주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했고, 집에 있을 땐 여자를 졸졸 따라다녔다. 여자가 조용하면 루루가 말을 걸었고, 여자가 말을 하고 있을 때에도 루루는 끼어들었다. 가끔은 언어가 다를 뿐, 이 정도면 대화가 통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여자는 식구들과 케이크를 나눠먹으며 딱 한 가지 소원만 빌었다. 고양이의 건강. 가능한 한 오래 우리 고양이들과 지금처럼 함께하고 싶어요.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12월 26일 오후, 여자는 혼자 식탁에 앉아 다시 케이크를 잘랐다. 크리스마스 오후, 집에서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숨이 끊어진 루루의 장례식을 끝내고 먹는 케이크는 여전히 달았고, 조금 더 축축했다. 포크 사이에 묻은 크림까지 천천히 핥아 먹는 동안에도, 집안은 끔찍하게 고요했다.
조용해, 너무 조용해…
루루가 살아있었다면 케이크를 먹는 동안 몇 번이고 방해를 받았을 것이다. 여자가 식탁에 혼자 앉아있을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올라와 관심을 요구하던 수다쟁이 고양이었으니까. 여자는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어떻게 네 살도 안 된 고양이가 이렇게 쉽게 죽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고양이가 죽었는데 어떻게 케이크는 이렇게 달콤한 건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휴지를 뽑을 기력도 없는데 어떻게 케이크를 먹고 있지. 케이크를 다 먹을 때까지도 집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여자가 원하지 않을 때조차 다가와 사랑을 재촉하고 빈 곳을 메워주던 존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말해주듯. 앞으로 어떻게 이 조용한 집안을 견디지? 문제는 이 빌어먹을 적막을 채울 방법은 이제 없다는 것이다.
두 이야기는 모두 예상치 못한 상실을 맞닥뜨린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그것도 달콤한 케이크를 예약할 정도로 ‘좋은 일’을 예감하고 있던 날에 뺨이 얼얼할 정도의 배신을 느낀 사람들의 이야기. 첫 번째 이야기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의 표제작 이야기다. 원인부터 과정까지, 무엇 하나 석연치 않은 사고 이후 사선을 오가는 여덟 살 난 아들을 바라만 봐야하는 부부의 고통스러운 일상에 동네에서 빵집을 홀로 운영하는 눈치 없고 퉁명스러운 남자가 자꾸만 끼어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눈치 없음 ‘덕분에’ 부부는 아들을 잃은 바로 그날 밤, 주저없이 동네 빵집으로 달려가서 그들에게 벌어진 인생 최악의 일을 쏟아낼 수 있었다. 약속을 기억한 제빵사가 아들 “스코티”의 이름을 연거푸 언급하는 순간, 부부와 그 사이엔 의도하지 않았지만 ‘매듭을 지어야만 하는 이야기’가 생긴 샘이다. 제빵사가 먼저 운을 떼지 않았다면 그날 밤 자식을 잃은 부부가 기다렸다는 듯 빵집으로 달려가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토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정중하게 사과한 남자는 의자를 내어주고 오븐에서 갓 꺼낸 따뜻한 계피롤 빵부터 권한다. 부부는 롤빵을 집어 어렵게 식사를 시작한다. 남자는 부부가 뭔가를 먹는 모습을 보면서, 평생을 아이 없이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홀로 빵집을 운영하며 반복되는 하루를 견디는 외로움과 자기의심을 고백한다. 그날 밤 제빵사는 부부의 비극을 관조하는 관찰자 입장에 머물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교환함으로써 존중을 표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당신들의 슬픔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대하진 않겠다는 듯. 용기를 내어 속사정을 고백하는 진솔한 태도 앞에서, 부부의 마음도 누그러진다. 일단 빵과 커피 한 잔을 먹자 엉망이던 몸과 마음에 변화도 생긴다. 허기를 느끼고, 롤빵의 달콤한 맛도 느끼며 세 사람은 해가 비출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대화를 나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건 음식 뿐만이 아니다. 음식을 먹으며 공동의 슬픔을 곱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행위 자체다. 기대 수명의 반의 반도 꽉 채우지 못하고 떠나가버린 고양이 생각이 날 때마다 국물을 자주 끓였다. 루루가 동거인의 방에서 숨을 거둔 그날 저녁에도. 다시마에 멸치똥을 제거한 국물용 멸치를 어떻게든 챙겨서 육수를 우리고 큰 양푼을 꺼내 미역부터 불렸다.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오면 옷소매로 대충 훔쳐내면서 간을 맞췄다. 화장을 예약한 곳까지 왔다 갔다 하려면 뭐라도 먹어야 한다는 이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건 작은 고양이의 죽음을 방에서 혼자 지켜봐야 했던 동거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작고 여린 몸을 목격한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겐 빵집 아저씨 만큼의 말재주도 없었다. 같이 사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국물을 끓이기로 했다. 냉동한 밥도 있었지만 쌀을 새로 씻어 밥솥에 앉혔다. 미역을 들기름에 넣고 볶다가 표고를 넣었다. 다른 반찬은 없었다. 밥에 미역국, 단출한 상을 차려 방에 틀어박힌 동거인들을 불러 냈다. 같이 먹자고, 어떻게든 밥을 먹자고. 그건 내가 듣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정작 미역국에 밥을 말아 먹는 동안 다들 젖은 얼굴을 수습하느라 밥을 먹고 기운을 차리자는 상투적인 위로의 말조차 나눌 수 없었지만. 뻣뻣하게 굳은 루루를 안아들고 화장터까지 가는 동안에도, 차 안에서는 내내 말이 없었다. 훌쩍이는 소리, 가끔 코를 풀거나 휴지를 뽑는 소리만 들렸다. 장례식이 끝나고 둘러앉은 식탁에서 우리는 약속했다.
“우리, 루루 얘기 많이 하기로 해요.”
그날도 미역국이었다. 전날 들통에 끓여둔 미역국은 너무 많이 남았고, 한동안 끼니 때마다 자주 국물을 꺼내 밥을 말아먹었다. 육개장이 아닌 미역국을 끓여 나눠먹은 며칠 동안, 3일장을 치루는 상주가 된 기분으로 고양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우리 식구들만의 의식을 치루었다. 보글보글 끓인 국물에 밥을 말아 넘길 때면 잠시 굳어있던 몸도 따뜻해졌다. 속이 든든해졌다고 해서 당장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나진 않았다. 그래도 적어도 깨끗하게 몸을 씻고 산책을 할 정도의 기운은 났다. 노트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미뤄둔 메일에 답장을 하고, 미뤄둔 글을 다시 읽을 수 있었다.
다시 맞이한 겨울,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따로 주문하지 않았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주문한 케이크도 다 먹지 못했기에, 이번엔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두 세 사람이 나눠 먹는다 해도, 달콤한 케이크 한 판을 다 먹는 건 우리 집에서는 무리였다. 꼭 루루가 떠나지 않았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한동안 케이크를 씹어 넘길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져 마치 억지로 먹는 사람처럼 눈물 바람으로 씹어넘겼다. 그토록 맛있고 달콤한 케이크를 울면서 먹다니. 케이크에게 참 무례한 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사건과 관계 없이, 나는 역시 달달한 디저트보다 진한 국물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밥을 말아 물기를 머금은 밥알을 넘기면서 한파로 뻣뻣해진 몸을 녹이고, “시원하다”고 말하며 속 안에 고여있던 불순물 같은 감정을 씹어 삼키는 시간이 필요했다. 선물 받은 울릉도산 미역을 불려 깨끗하게 씻었다. 표고를 준비하고, 들기름도 빠트리지 않았다. 이번에 끓인 미역국은 평소보단 부드럽고, 작년보단 덜 짭짤했다.
눈물이 날 때 제법 도움이 되는 표고버섯 미역국
(2인분 기준) 미역 한 움큼을 불린다
표고버섯은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기둥 부분은 결을 따라 찢어서 준비한다
불린 미역을 들기름 한 스푼을 넣고 볶는다
미역이 잠길 정도로 물을 부은 뒤 끓어오르면 준비한 버섯을 다 넣는다
국간장이나 연두로 한 스푼씩 넣어가며 간을 맞춘다
불의 세기를 낮춘 뒤 시간이 허락하는 한 오래 오래 끓여준다(오래 끓일수록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