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과몰입러의 선택과 후회

아무도 떠밀지 않은 정주행에서

by typed thoughts

나는 프로 과몰입러라 영화, 드라마, 예능 한 편을 보는데도 에너지 소모가 심하다. 그래서 평소에 보고 싶었던 것들은 저장만 해둔다.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있을 때면 모든 회차를 몰아서 보고, 다 본 영상은 저장해 둔 목록에서 지우는 재미가 있다.

최근 휴가를 맞아 넷플릭스에서 《불량 연애》와 《흑백요리사 2》를 정주행 했다. 그때그때 핫한 프로그램을 보는 건 사회성 기르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사회적 압박으로 보기 시작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할 정도로 만족스럽게 봤다. 정주행을 마쳤고, 흡족했기 때문에 자신감이 생긴 건지 조금 더 볼드한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그 누구도 추천해 주지 않았고, 한때 들어는 봤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그런 시리즈. 처음에는 화려한 캐스팅에 흥미를 갖고 봤다. 우와, 이 배우가 나온다고? 이 두 배우가 같이? 하지만 뭔가 부족한 연기, 심오하게 만들어보겠다는 의지만 느껴지는 연출, 의문 가득한 설정에 중도하차를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래도 시작했으니까, 8화밖에 없으니까, 끝까지 보자 마음먹었다. 어제오늘 하려고 마음먹은 것들도 제쳐두고 봤다.

시리즈를 다 끝내니, 화만 남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열심히 본 거야? 한 시간 뒤면 하루가 끝나는데 글쓰기는 시작도 안 했다. 듀오링고도 해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샤워도 해야 한다. 집도 좀 치워놓으려고 했는데.

나한테 화가 났다. 왜 그 많은 시리즈와 영화 중에서 아무도 추천해주지 않은 걸 고른 걸까. 리뷰를 훑어보기라도 하지. 아니면 평점이라도 찾아보지.



어떻게든 글이 완성되어 가니까 마음이 조금은 편해져서 그런지 이런 생각이 든다.

'아, 하기로 한 일 하기 싫어서 정주행 끝내기를 핑계로 삼은 걸 수도 있겠다.'


내일은 아무것도 안 보고 할 일부터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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