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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우타이퍼 Jul 06. 2019

반강제적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했다.

비자발적 소비지양주의의 덤이다



  "다음 주 주급이 들어올 때까지 100불로 버텨야 해 오빠"


  간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에게 나는 단호한 얼굴로 [No No]를 알렸다. 감히 담배 따위에 30불이 넘는 돈을 쓸 생각을 하지도 말라는 경고였다. 담뱃값 비싼 이 나라에서 담배는 기호품이 아니라 사치품이다. 암, 사치품이고 말고!


  일이 꼬이고 벌이가 줄어들고 빚은 불어났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포기해야 했던 것은 내 취향이었다. 취향을 고수하는 데에는 돈이 든다. 보통 누군가의 취향에 부합하려면 디자인이나 재질, 마감, 혹은 맛과 향 등에서 독보적이거나 우수한 퀄리티를 보여야 한다. 그런 것들은 비싸다. 취향을 포기하면 비스므리한 것을 훨씬 저렴한 값에 구할 수 있다. 자금 사정을 고려한다면 마땅히 그래야 할 상황이다. 그러니 그는 그의 기호를 포기해야 하고 나는 내 취향을 포기해야 맞다. (하지만 나만 포기하는 중이다.)


  아무거나 사들이면 정이 안 든다. 버려질 게 뻔하다. 아무리 저렴한 무엇이라도 사다 놓고 안 쓰다 버리면 자원 낭비요 내 임금의 낭비다. 없이 살아도 살아진다면 안 사는 게 맞다. 이런 생각을 한참 하는 동안 미니멀리스트들의 유튜브 채널을 봤다. 그들의 공간은 절제와 정돈으로 하얗고 넉넉했다. 상당한 구독자 수를 보유한 유명 미니멀리스트들의 공간일수록 몇 없는 가구와 소품에서 취향이 확고하게 드러났다. 아무도 "저렴해서 사들인 아무거"를 들여놓고 살지 않았다. 가격은 조금 나가지만 디자인이 군더더기가 없이 깔끔한 것, 조금 비싸지만 친환경적인 것들이 영상에 주로 등장했다. 역시 미니멀리즘도 취향대로 하려면 돈이 든다. 아 돈 없는 자는 미니멀도 느낌 살려하기 어려운 건가! 그들의 미니멀리즘은 내게는 비현실적 미니멀리즘이다. 나는 지금 조금 비싸지만 친환경적인 것들에 부릴 여유가 없다. 디자인이 잘 빠져 가격이 좀 더 나가는 '꼭 필요한'  물건들을 살 능력이 안된다.


  취향을 포기하고 아무거나 사 입고 사 먹고 사들여야 한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사입지 않겠고 사 먹지 않겠고 사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가질 수 없게 되었으니 원래 가지길 원치 않았던 듯이 살기로 했다. 그렇게 나의 반강제적 미니멀리즘과 비자발적 소비지양라이프가 선언되었다. 얼마나 멋진가, 가정 경제 불경기를 이렇게 트렌디한 이름을 갖다 붙여 소화하려 들다니...... (말. 잇. 못... 그런데 아무거나 사 먹는 것은 왜 이토록 쉽게 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일단 옷장에 가득 들어찬 경제관념 무지렁이가 사다 놓은 고가의 신발들을 친구네 집으로 옮겼다. 다 팔아버릴 셈이었는데 아직 실천을 못하고 있다. 곧 그럴 수 있는 용기가 생기겠지. 혹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기거나. 다음으로는 옷장에서 안 입는 옷들을 추려야 했다. 미니멀라이프의 시작은 물건을 정리하는 것이랬다.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유명한 미니멀리스트들은 주방이나 옷장을 먼저 치우더라. 그런데... 옷장에 못 입는 옷만 가득하다. 6킬로의 증량으로 (이제 7킬로인가..) 가진 옷이 작아져서 그렇다. 그렇다고 저걸 다 버리면 나는 옷이 없다. 진짜 없다. 유니폼 외엔 외출복 입을 일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걸로 지금은 버텨내고 있다. 겨우겨우 들어가는 청바지 하나에 스웻셔츠 몇 가지로. 그 청바지는 품이 크고 낡아서 버리려다가 혹시나 해서 두었던 것이고, 일부러 큰 사이즈로 넉넉하게 입으려 사두었던 스웻셔츠는 그냥 딱 맞다. 살을 얻고 멋을 잃었네... 이런 이유로 옷장은 그대로 두었다. 옷장의 미니멀리즘은 6킬로를 다 덜어내고서야 시작할 수 있을 거 같다.


  주방은 정리해볼까 하고 마음만 먹은 게 벌써 2주째다. 지지난 주는 우느라 정신없었고 지난주는 인터뷰다 뭐다 정신이 없었고 이번 주는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번 주말이 딱 적당한데 날씨가 축축하다. 비가 와서 대청소와 결단력 있는 물건 비움을 하기에 적당하지 않다. 그래서 또 미룬다. 날이 적당할 때, 산뜻할 때 하고 싶다. 그 정도는 자발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거잖아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주방 정리를 시작하면 평생 쓰겠다고 사모았던 무쇠 냄비와 팬들 중에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비울지 선택하는 어려운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역시 함부로 "평생"이라는 말은 붙이는 게 아니다. 그 무엇에도.


  살을 정리하는 게 먼저라 못 정리하는 옷장과 날이 좋지 않아 미루고 있는 주방 정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방안과 벽장에 들어차 있는 물건들은 하루에 하나씩이라도 정리를 할 예정이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생긴 미니멀리즘과 소비지양주의지만, 마음이 편해진 것은 확실하다. 더 이상 어지간해서는 소셜미디어에 공개된 남들의 소비기록에 혹하지 않는다. 간혹 "으아 너무 예쁘다"며 내적 감탄을 내지르는 경우도 있지만 그걸로 끝이다. 얼마지? 어디 거지? 어디에 팔지?를 바로 검색하던 전과 달라진 점이다. 더 이상 사겠다는 의지를 이어가지 않으니 못 사서 안달 나는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공간을 비워 야하기 때문에 예쁘다고 사들이는 짓은 금물이라며 꼭 돈이 없어 못 사는 게 아니라 내 라이프 스타일에 따라 안 사는 거라는 곤궁치 않은 이유가 있어서 좋다.


  나의 반강제적 미니멀리즘과 비자발적 소비지양주의가 온전히 자발적인 그것이 되는 날까지. 지치지 말지어다!





(img ref:Pixabay로부터 입수된 Daniel Nebreda님의 이미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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