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힘들 수도 있었을 10월이었다. 10월은 날씨가 좋아 연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달이지만 2019년의 10월 바깥구경은 그저 출퇴근길 차창밖으로 스치는 일정구간의 도로 주변 풍경으로 만족해야 했다. 비록 사랑하는 10월의 호주를 누릴 여유는 없었지만 늘어나는 마음의 짐과 줄지어 나타나는 현실의 고비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반적으로 꽤 잘 보냈다. 견뎠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한가? 아니다 나는 정말 10월을 꽤 잘 보냈다. 물론 순간의 분노와 다 잃어버린 듯한 좌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감정의 찌끄래기에 매달려 밤낮으로 울고불고하는 시간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지냈다.
소비를 정말 최최최소한으로 줄여서 지냈던 시간들. 10월은 단순지향주의 혹은 최소주의자로서 흡족한 달이기도 했다. 식생활의 단순화도 어느 정도 이뤄낸 것 같다. 스틸컷 오트, 롤드 오트의 적절한 배합에 소고기, 닭고기 (돼지고기를 거의 못 먹었던 것은 대부분의 식생활이 오트와 함께 물에 끓이는 조리법으로 행해졌기 때문이다), 사과와 바나나, 우유와 요거트 그리고 못 잃어 다시 시작된 커피. 이렇게 식재료도 조리법도 단순화하고 나니 장 볼 때의 고민도, 뭘 먹지의 고민도 줄었다. 대신 골라먹는 기쁨이나 순간 혈당 상승으로의 희열은 잃었다.
생필품 면에서도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폼클렌징을 더 이상 쓰지 않는다. 이리저리 리서치 해 본 결과 도브 센서티브 뷰티바 (-이것에 그냥 비누가 아니라 ‘뷰티바’로 명명되어 있는 것이 다소 충격이었다)로 3차례 세안을 반복하는 걸로 폼클렌징을 대체했다. 과한 화장은 할 줄도 모르고 하지도 않기 때문에 무리는 없었다. 샴푸와 린스도 없애고 뷰티바로 해결해보고 싶었지만 머리털이 너덜너덜하여 차마 시도조차 못해보고 있다. 기회가 되면 최소한 샴푸라도 없애보고 싶다.
얼굴에 바르는 로션, 에멀전, 세럼 혹은 에센스 기타 등등을 단순화하여 단 두 가지 스텝만 남겼다. 라로쉬포제 토너로 얼굴을 닦고 두드려 피부결 정리(를 해야 한고 하기에 하고 있지만 뭐 왜 하는지도 잘 모름)를 한 다음 니베아 파란색 납작통의 크림을 손에 덜어 체온으로 살짝 녹인 다음 얼굴에 촵촵 펴서 흡수시킨다. 물론 뻑뻑하니 잘 안 발리지만 시간을 들여 조금 두드려주면 된다. 니베아 특유의 파우더리 한 향이 너무 역해서 초반엔 조금 힘들었다. 향료가 안 들어간 버전이 있으면 좋겠다. 아무 냄새 안나도 되니까 이런 인공적인 향은 없었으면 좋겠지만 뭐 수십 년 전통의 기업이 추구하는 바가 있겠지. 고가의 어느 브랜드 크림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정보를 믿고 쭉 써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가격이 ‘이걸 얼굴에 발라도 되나’싶게 저렴해서 만족한다.
경제규모에 맞지 않던 소유물들을 팔아 정리했다. 소비로 위로받았던 지난 시간의 흔적들. 샤넬 박스가 주는 묘한 성취감 같은 것들을 덜어냈다. 삶이 휘둘리고, 다리에 힘이 빠지고, 걷다가 자빠지고, 허리를 열어 수술을 하고, 경제력을 잃고 다시 회복하고의 과정에서 내가 그간 멋모르고 저지른 소비가 얼마나 무의미했는지를 알았다. 물론 그런 고가의 물건을 소유하는데 집중하며 만족을 느꼈던 시절을 후회만 하는 것은 아니다. 변명하자면 그때의 나는 그거라도 있어야 견딜 수 있었다. 그때의 내가 삶에 부딪히며 힘겹게 얻은 ‘지금 나’의 가치관을 가졌더라면 이야기는 달라졌겠지만 배움을 위한 지불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실컷 해보고 허무해봤으니 이제 아는 것이다. 얼마나 고가이든, 귀하든 어쨌든 물건은 내게 아무런 위안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힘들 때 위로가 되어준 건 가까운 내 사람들. 호주 안에 대략 6명 정도 있는 진짜배기 지인들. 호주와 한국의 가족과 친구를 모두 포함해 내 삶에 남은 13인과의 인간관계가 얼마나 단단하고 소중하고 고마운지 깨달은 만큼 물건들의 비움은 쉬웠다. 이제 필요 없는 물건을 소유하는데 내 노동력과 정신력을 소비하지 않기로 했다. 불필요한 것은 필요한 누군가에게 주거나 거래하여 떠나보내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정말 필요한 것인지 한번 더 생각하고 가장 적당한 것을 고르고 골라 신중하게 들이기로 했다.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장시간 소유할 것들은 너무 저렴해 만듦새가 허접한 것이라면 들이지 말고, 기능은 비슷하나 브랜드 네임으로 인한 고가의 물건은 탐하지도 않기로 했다. 결정적으로 세일한다고 사들여 쟁이는 짓을 완전히 멈추었다. 아무리 반값으로 할인해도 미리 사두지 않는다. 필요에 의해서만 소비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기 때문에 할인이라는 명분으로 덜 필요한 것을 사들이는 짓을 사전에 방지하려면 반값 할인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특히 과자 반값 할인... 망할 것.
이 시국에도 (내 생의 시국에) 소비를 했던 것은 색연필 구매 정도. 색연필로 그림 그리는 것에 심취하기도 했다. 물론 마음대로 잘 안 그려지니 금방 깨어났지만. 잘은 못하지만 그리고 칠하는 행위를 좋아하므로 취하도록 하고 싶어서 무던히 노력 중이다. 심지어 지난 주말엔 와콤 태블릿까지 꽁으로 생겼다. U가 본인 장비를 업그레이드하면서 더 이상 쓰지 않는 태블릿을 내게 그냥 주었다. 그럼 돈을 주고 중고로 사겠다고 했더니 언니도 내게 늘 그냥 주고는 왜 저는 못 그러게 하느냐고 했다. 내가 뭘 그리 주었다고. 미안하지만 고마우니까 그냥 덥석 받았다.
오늘 아침 출근 준비를 하는 중에 문득 ‘행복하다’고 혼자 말했다. 달라진 환경 조건은 하나도 없다. 여전한 그 상황에서 나는 이제 무려 행복을 느끼는 고랩자가 되었나 보다. 오늘의 목표는, 오늘을 사는 것. 지금 행복한 것. 내일의 목표도 오늘을 살고 지금 행복한 것일 테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 해 가, 그 시절이, 내 생이 행복했던 것으로 기억되겠지.
오늘도 그럼 행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