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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C Jun 22. 2019

굿바이 크루얼 월드_01

단편소설집

전화선,
TV 안테나 단자,
전기 코드 110/220 볼트,
컴퓨터 모뎀들로 나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늦은 밤, 레드 제플린의 음악이 연주되고 한 여자가 내 소파에 길게 누워 잠들어 있다. 그녀는 취한 모양이다. 레드 제플린이 <기념일>을 부른다. 내가 왜 이 음악을 틀어 놓았는지 알 수 없다. 기분 전환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오늘은 아침부터 내내 무슨 일을 하든 비틀려 버릴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고, 실제로 그런 토요일이었다. 어젯밤에 찾아온 치통은 진통제를 10알이나 먹어 치우고도 물러설 낌새가 없다. 사랑니의 고통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래턱까지 옮아간 치통을 참아 가며 요기를 해보려고 들른 단골 중국집에서는 내가 주문한 짜장면을 만들다가 주방에서 종업원들끼리 싸움이 벌어졌다. 접시가 주방 밖으로 튀어나오고 우당탕 쨍그랑 요란한 소리가 욕지거리와 함께 터져 나왔다. 이윽고 종업원 중 한 녀석이, 그 녀석은 나와 안면도 있는 편이었는데, 피범벅이 된 얼굴로 주방에서 뛰쳐나왔다. 씨발, 관두면 될 거 아냐. 왜 사람 인격 무시하냐구, 엉? 개자식아, 나와. 나와서 덤비라구! 녀석은 한 손으로 코와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수습하고 탁자 사이를 끼고돌며 방어 자세를 취하는 거였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오후였기 때문에 손님은 나와 다른 테이블의 젊은 남녀 한 쌍이 전부였는데, 그들은 녀석이 주방에서 튀어나오자 먹던 짬뽕과 볶음밥을 두고는 기겁해서 나가 버렸다. 나는 주문을 해두고 그냥 가자니 그렇고 그대로 있자니 또 그렇고 해서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녀석들 싸움의 불똥이 내게도 튈 수 있는 문제였고 아무래도 주문한 짜장면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결국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피범벅이 된 녀석의 얼굴과 이제는 거의 울음 섞인 푸념으로 변해 버린 악다구니가 허기를 잊게 하기에 충분했다.


오후 늦게 지금 소파에 잠들어 있는 여자가 찾아왔는데 그녀는 영화 잡지사의 기자다. 언젠가 영화 제작 기념회에서 내가 연락처를 알려주었다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화 제작 기념회라면 얼마 전에 사촌이 영화 제작을 하겠다고 벌였던 해프닝이었는데 그것은 글자 그대로 기념에 그치고 말았다.


방금 전 나는 너로부터 다시 편지를 받았다.

-잘 때 이빨 닦고 자!
 월포에서.

일 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내게 편지하지 않았었다. 처음으로 네 편지를 수신한 것은 정확하게 지난달 19일, 그러니까 한 달하고도 열흘이 지났다.

-바다에 비가 와서 하늘과 이어졌다.
 금장대에서.

두 줄짜리 그 편지는 파일로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그 편지를 컴퓨터의 기억장치에 저장하고 3.5 인치 디스켓에도 복사해 두었다. 방금 전의 편지도 마찬가지로 저장하였다. 무작정 네가 보낸 편지라고 믿는 것이다. 발신인의 ID는 매번 달랐다.

-새벽 모래사장, 군화 발자국이 나란히 찍혀 있다.
 대포리에서.

-한낮의 거리, 개가 짖는다.
 속초에서.

-새벽 경매, 사람들이 문어처럼 말한다.
 주문진에서.

-깊은 바다, 아무도 뛰어다니지 않는다.
 황영조 마을에서.

-오징어배, 알전구에 파리가 붙어 있다.
 삼척에서.

-끝없이 이어진 길과 바다, TV에 나왔던 길이다.
 월송정에서.

-술집 여자, 정말 입가에 점이 하나.
 영덕에서.

편지가 거듭될수록 나는 네가 다른 사람의 ID를 도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ID를 확인하지 않고 너의 편지를 수신한 뒤 호스트 컴퓨터에서 삭제한다. 확인을 한다면 아마도 너에 대한 기억이 훼손될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너는 단 한 번도 내게 양치질하라고 말한 적이 없으며 주문진이나 양양이나 삼척과 관련된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내게 이를 닦으라고 말해 줄 사람은 달리 없으며, 주문진이든 여기 서울이든 나를 아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없으니 나는 발신자를 너라고 믿고 싶다.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 바로 그 이유 하나만으로 발신자는 너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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