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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C Jun 21. 2019

선인장 남자_08 EnD

단편소설집

*

아파트 광장에는 평범한 조경의 정원이 꾸며져 있다. 어느 계곡에서 가져왔는지 모를 펑퍼짐한 바위와 아직 버팀목에 의지하고 있는 수령이 제법 되는 소나무 몇 그루, 그리고 나무 벤치들이 동그랗게 배치되어 있다.


가스등을 닮은 조명이 두 개, 빛을 밝히고 있었다.


이명은 사라졌고 두통도 가라앉았다. 폭풍이 지나간 해안선처럼 텅 빈 느낌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온몸을 후려치던 공포와 전율도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벤치에 웅크리고 앉아 그 텅 빈 해안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새벽안개가 뿌옇게 내려앉으며 불빛을 흐리기 시작했다.


“어이쿠, 여기 계셨구만.”


발치에 흔들리는 불빛만으로도 예의 경비원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한참 찾아다녔잖습니까. 사모님이 전화를 하셨더구만요. 좀 이해를 하셔야 할 게, 우리 경비들은 최소한의 인력으로 최대한 입주자들의 안전과 편의를...”


“또 당신이군요.”


나는 고개를 들어 경비원을 바라보았다. 그의 잘못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 구차한 변명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경비원은 입을 다물었다.


“... 그만... 들어가시죠?”


“그럴 생각입니다. 비밀번호가 생각났어요. 차 번호도 생각났고, 주민등록번호며 심지어 운전면허증 번호까지 생각났습니다. 그러니까 다 해결된 거죠.”


“아까는 미안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는 점을 좀 이해하시라...”


나는 그에게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혹시 다음에 내가 비밀 번호를 또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생기면 그때 도와달라는 말로 그의 변명을 막았다.


“에이, 또 그런 일이 있을라구요?”


그가 옳다.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경비원이 돌아가고 난 뒤, 나는 벤치에서 일어섰다. 추위에 굳어버린 두 다리를 질질 끌면서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패스워드를 넣자 스르르 문이 열렸다.


아무도 오르내리는 사람이 없는 이런 새벽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자면 영혼이 쑤욱 잡아당겨지는 느낌이 든다.


어떤 원인으로 심각한 충격을 받으면 특정한 기억이 싹 지워져 버린데요.


편의점의 아르바이트 여학생이 어디선가 읽었다는 무슨 기억상실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래,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기만했었는지도 모른다. 혼자서 돌아가 맞이하게 될 텅 빈 시간이 두려웠을 것이다. 나는 겨우 이까짓 비밀번호를 기억에서 지움으로써 아내와 아이들의 부재를 잠시나마 유예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가족의 부재를 뒷받침할만한 모든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지워갔다. 사무실의 K, 그녀는 입사 5년 차의 홍보실 직원이고, 그리고 5개월 전부터 나와 가까워졌다. 그녀는 노란색을 좋아했다. 그녀가 사는 아파트 근처에는 원두커피 전문점 <진>이 있다. 지방 세관에 근무하는 남편은 주말에만 올라온다. 우리들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진>에서 커피를 마시고, 세관원의 침대에서 섹스를 한다. 대개 화요일과 목요일이었다. 당신이 정리하면 나도 그렇게 할 거야. K는 확실한 담보를 요구했다. 어제 오후, 뭘 좀 마시겠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녀의 얼굴을 지웠다. 노란 장미와 메모를 보았을 때, 그녀의 존재를 지워 버렸다.  편의점의 아르바이트 여학생은 옳았다. 어디에서 그런 이야기를 읽었든 그녀가 옳은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20층에 멈췄다. 밖으로 나오자 센서등이 켜졌다. 나는 2003호 철문의 지문 인식키에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갖다 댔다. 뭐, 그런 거까지 필요할까? 아냐, 좀 비싸도 세상에 제일 안전하다잖아. 그리고 애들이 열쇠를 목에 걸고 다니는 거보다 훨씬 낫잖아. 입주 준비를 하면서 아내는 기본 사양인 디지털키를 마다하고 굳이 지문 인식키를 고집했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떠난 뒤, 철문에 엄지손가락을 갖다 댈 때마다 나는 그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둥근 고리에 파란 불빛이 반짝거렸다. 삑, 하는 짧은 전자음과 함께 문이 3센티미터쯤 열렸다. 등 뒤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문틈으로 몸을 반쯤 기울여 신문을 집어 들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긴 생머리였고 여전히 갈색 니트 스웨터 차림이었다. 앞집 여자 말야, 통 뭐하는 여잔지 모르겠어. 무슨 밤 귀신이 붙었는지, 글쎄 저번엔 자꾸 문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내다보니까 계단참에 쭈그리고 앉아서 헤드폰을 뒤집어쓰고 담배를 피우고 있잖어, 글쎄. 입주한 지 얼마 안 되어 아내가 그런 소리를 했었다. 나는 분명 앞집 여자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다. 엘리베이터와 동네 슈퍼마켓에서, 그리고 최근에는 편의점에서.


“아, 신문...”


하고 내가 말했다.


“네에.”


여자가 하얀 석고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신문 배달하는 친구들은 비밀번호를 다 알고 있는 모양이군요.”


“아마... 경비실에서 알려주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등 뒤에서 철컥, 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는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을 분명히 구분 짓겠다는 완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나는 집으로 들어왔다. 현관 불빛에 썰렁한 거실이 침침하게 드러났다가 잠시 후 어둠 속에 잠겼다. 거실 창가로 걸어가 버티컬 블라인드를 한쪽으로 걷어냈다. 하늘은 잉크빛으로 풀어져 있고 시커멓게 솟은 아파트 건물들은 하얗게 출렁이는 새벽안개 위에 신기루처럼 떠 있었다. 그 어둡고 황량한 풍경 위로 낯선 남자의 초췌한 그림자가 떠 있었다. 메말라 버린 선인장처럼 건드리면 바스라 질듯이.


넌 대체 누구지?


그가 물었다. 그 목소리는 아득하게 멀고 지독하게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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