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집
*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게서 등을 돌리고 골탕을 먹이기로 작당을 한 것 같았다. 최초의 낭패감은 이제 외로움으로 변했다. 철저히 버려진 기분이었다. 새벽 공기는 더욱 차가워졌다. 가을 양복으로 견디기에는 힘겨운 추위였다. 취기가 사라진 휑한 머릿속을 아무런 패턴도 없는 통증이 돌발적으로 들쑤시고 다녔다. 윙윙거리는 이명도 여전했다. 편의점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아르바이트 여직원을 더 이상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손바닥만한 섬에 난파한 선원처럼 아파트 단지 주위를 맴돌았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정확히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책상 위에 몇 마리의 개미들이 있었고, 그리고 노란색 장미와 메모가 있었다. K라는 여자... 그녀는 <진>이라는 곳에서 저녁 일곱 시에 나를 기다렸을 것이었다! 나는 마땅히 그곳에 갔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째서 조 과장 같은 녀석과 술을 마셨던 걸까.
내게는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핸드폰의 주소록을 훑어나갔다. 메모리가 허용하는 한도까지 사람들의 이름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름에 맞는 얼굴들이 하나둘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중 하나의 번호를 선택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도 자동응답기가 받거나 안내 방송이 나온다면 끝장이라는 절망감이 신호음이 거듭될수록 증폭되었다.
“여보세요?”
잔뜩 잠긴 목소리였다.
“자는 데 깨워서 미안해.”
“... 음?”
부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잠시 사이가 있었다.
“나한테 문제가 좀 생겼어.”
그는 대학 동창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입대해서 같은 사단에 근무했었다. 지금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를 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아내의 오빠였다.
“도와줘. 집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집에 들어갈 수가 없어. 그러니까 내 말은...”
“개새끼! 이 시간에 전화해서 무슨 수작이야? 니가 인간이냐, 이 자식아!”
처남은 느닷없이 욕설을 퍼붓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충격으로 휘청거렸다. 새벽에 전화해서 잠을 깨웠다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확실히 나에게 뭔가 일어났다. 아니면,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처남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그러나 수화기를 내려놓았는지 통화 중 신호만 들렸다. 그 단속적인 소리는 이명과 합쳐져서 머릿속을 마구 유린했다. 아내가 집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벼락처럼 든 것은 그때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아내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빙하기처럼 긴 신호음이 울렸다. 안내 메시지가 나오기 전에 끊었다가 다시 걸었다.
“... 네.”
몇 번의 신호가 간 뒤 낯익은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아내였다. 거짓말처럼 그녀는 말짱한 목소리였다.
“나야...”
“이러지 말아요. 이러면 서로 힘들잖아.”
아내가 이토록 차분한 게 너무도 기묘했다.
“어디에... 어디에 있는 거야?”
“술 마셨어요? ……그런 거 같아서... 아까도 받지 않았어.”
중간중간 아내의 한숨 소리가 섞였다.
“나, 집 앞인데 들어갈 수가 없어. 그 빌어먹을 현관 자동문 말이야, 암호가 벌써 보름 전에 바뀌었다는 거야. 인터폰을 아무리 눌러도 대답이 없고. 내가 경비한테 얼마나 당했는지 알기나 해?”
나는 덜덜 떨려서 걸음을 제대로 옮길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추위 때문이 아니라 어떤 알 수 없는 공포가 내 몸을 휘어 감아 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는 대답 없이 긴 한숨을 쉬었다.
“이게 말이 돼? 그런 데다가 방금 형준이한테 전화했더니 걔가 대뜸 날더러 개새끼래. 대체 왜들 이러는 거지? 당신, 어디 가면 간다고 연락을 했어야 하는 거잖아.”
이가 딱딱 마주쳤고 목소리는 불쌍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머릿속에 파란 번갯불 같은 게 번쩍였다. 이명이 사라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찌르르, 하는 희미한 여운을 남기고 이명이 사라지자 주위가 지독하게 조용해졌다.
“오빠가 그러는 거 당신이 이해해줘요. 아무래도 내 오빠니까... 당신 잘못 아니라는 거 오빠도 알면서 그래요.”
“우리한테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그런 거야?”
아내는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나의 공포를 확인해주었다.
“애... 들은?”
“잘 지내요. 당신... 많이 힘든 거 같네. 좀 쉬어요.”
“우리가... 그러니까, 우리가 따로... 지내는 거로군. 그렇게 된 거야? 그런 거야? 언제부터 이런 거야? 내 잘못이 아니면 그럼 당신 잘못이야? 그런 건가?”
아내의 대답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이 폭풍이 쓸고 간 황폐한 바닷가의 부유물처럼 하나 둘 떠올랐던 것이다.
“... 미안해요. 많이 추운데 이 시간에 그러고 있으면 어떡해...”
나는 비틀거리며 담벼락을 짚었다. 벌써 반년이 지났다.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갔다. 우리들 사이에 구체적인 합의는 없었지만 일단 떨어져 지내기로 말없는 동의가 오고 갔던 것이다. 아내가 아직도 그 남자를 만나는지, 그들이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를... 증명할 길이 없었어. 그뿐이야. 전화해서 미안해.”
보름 전, 혼자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관리사무소의 동 별 공지 방송을 들었다. 한 달에 한 번 바뀌는 현관 출입 패스워드는 그렇게 전달되었다. 패스워드를 카드 대금 고지서 겉봉에 받아 적었다. 2398*. 그래, 하지만 이제 그런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내가 경비실에 전화할게. 그럼 들어가게 해 줄 거야. 얼른 들어가서... 따뜻하게 자요.”
“... 그래... 자야지. 좀 자야겠어. 당신도 자.”
잠시 기다렸지만 아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새벽 세 시였다. 나는 시커멓게 솟아 있는 고층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짓이겨진 벌레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