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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C Jun 25. 2019

굿바이 크루얼 월드_04

단편소설집

차가 Y시를 벗어나 국도로 접어들고부터 굵은 빗발이 도로를 기총소사하듯 두드리기 시작했다. 시계는 불투명했고, 차의 지붕에 빗발이 부딪히는 소리가 북소리처럼 울렸다.


상행선, 즉 도시로 향하는 차선은 텅 비어 있었다. 빗물이 질탕하게 흐를 뿐이었다. 너의 차는 나를 태우고 빗속을 위태롭게 달려 나갔다. 하행선은 우리들의 차선과 대조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심하게 밀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평일이었던 것이다. 하행선을 타고 있는 차들이 밝힌 헤드라이트 불빛이 빗물에 풀어져 꺾이고 있었다. 차들은 양쪽 끝이 완만하게 휘어진 V자 모양으로 물살을 가르며 달려갔다. 바다가 갈라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우리들은 조용히 의견 일치를 보고 핑크플로이드의 <벽>을 들었다. 90분짜리 테이프에 A, B, C, D 네 면을 복사한 것이었다. 너는 그 테이프가 자신의 차에 있다는 사실에 잠시 의아해했으나 곧 무심해지고 말았다. 너는 모든 일에 그러했다. 나 역시 그 테이프에 대해서 아무런 해석도 내릴 수 없었다. 두 개의 테이프를 번갈아 끼우는 노력이라면 몰라도 하나의 테이프에 복사하는 노력은 도무지 내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으므로. 아마 너의 친구 누군가가 남겨 둔 흔적일 것이었다. 그 친구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너에게는 남자 친구도 많았고 그리고 여자 친구도 많았다. 너는 많은 친구들과 잠을 잤지만 그렇다고 쉽거나 천박하지는 않았다. 요는 네가 섹스에 열중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 역시 그랬으므로 나는 우리가 그 점에 있어서는 통한다고 믿었다. 적어도 우리는 상대의 성생활에 대해 무심할 수 있었고 그만큼 서로의 자유를 존중했다.


<굿바이 크루얼 월드>가 흘러나온다. 진행 방향으로부터 거세게 빗줄기가 차창을 때린다. 시계는 거의 차단된다. 와이퍼가 최대 속도로 좌우 운동을 한다. 너는 차의 속력을 줄이지 않는다. 반대편 차선의 차량 헤드라이트 불빛이 뿌옇게 꼬리를 물고 스쳐 지나간다. 나는 조금 겁이 났지만 속력을 줄이라고 너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음악이 자아내는 비극적인 감상에 나는 흠뻑 젖어들기 시작한다. 세계의 종말⋯⋯. 나는 또 그것을 떠올린다. 나는 어디든 눈을 돌려야 한다. 세계의 종말은 정말이지 떠올리고 싶지 않다. 반대편 차선, 하행선을 타고 있는 차들을 바라본다. 차창에 점액질처럼 뭉글뭉글 엉겨 붙는 빗물, 그 빗물 때문인지 하행선 차들의 윤곽이 거대한 절지동물이 기어가는 듯한 그로테스크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멀미 나?


스피커를 찢어 놓을 듯한 음악과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에 질세라 너는 악을 쓴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너의 옆얼굴 너머 차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이지러진 자동차들을 쏘아본다. 세계의 종말, 생각하지 말자.

안녕 비참한 세계여
오늘 난 이 세계를 떠난다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세계의 모든 이들이여
누가 뭐라 해도 내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어
안녕 비참한 세계여

썩어 문드러진 채 피아노 건반 위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죽은 당나귀의 머리가 불투명한 수막 위에 투영된다. 차가 한 차례 기우뚱한다. 너의 옆얼굴 근육이 긴장해서 푸르르 떨린다. 나는 당나귀의 영상을 끝으로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질끈 감는다.


어린애 같이 무슨 멀미람? 근사하지 않아? 이건 꼭 CF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야.


5단 기어를 넣은 뒤 오래도록 네가 변속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과장되게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지금 죽음의 문턱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있다. 아무래도 상관없나? 하고 나는 자신에게 묻는다. 그 물음이 너무도 사치스럽다고 나는 대답한다. 지금 너와 내가 즐기고 있는 것은 조금도 아름답지 못한 장난에 불과하다. 나는 너를 멈추고자 해야 한다. 너는 들은 체도 하지 않을 것이며 어쩌면 차에서 나를 내쫓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비를 맞으며 드문드문 지나가는 상행선 차를 얻어 타기 위해 엄지손가락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나면 나는 너를 잊을 것이다. 나는 섣부르게 네가 자살하려 한다고 판단했고, 동반자로 나를 선택했다는 사실 때문에 혼란스러워졌다.


길가에 붙여.


토할 거냐?


아침도 안 먹었는데 토할 게 뭐 있어? 차나 세우란 말이야.


왜 그래? 어제 일 때문이야?


난 죽고 싶지 않아. 이런 건 질색이라고. 그뿐이야.


푸, 하고 너는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어 숨을 뱉어 낸다. 이마 위로 흩어져 내린 머리칼이 풀썩 부풀었다가 내려앉는다.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다리에 힘을 가한다. 속도계의 바늘이 140km를 지나며 부르르 떤다.


야, 미쳤냐? 이런 빗속에 그렇게 밟아대다간 끝장이라구.  


나는 대시보드를 내리치면서 미친 듯이 소리쳤다. 너는 액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떼며 속력을 뚝 떨어뜨리고 차를 갓길에 붙였다. 치이익- 소리를 내면서 차가 한동안 미끄러지다 길가의 풀숲에 이르러서야 겨우 멈췄다.


왜 그렇게 심각해? 달리는 건 네가 결정한 일이잖아. 어제 하면서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거 알아. 그렇담 의사 표현을 했어야지. 뒤늦게 왜 이래?


너는 한참 동안 가만히 있더니 차창을 조금 내리고 담배를 피워 문 뒤에야 나를 경멸에 가득 찬 눈으로 쏘아보며 말한다. 나는 멀미와는 조금 다른 성질의 구역질을 느끼며 그것을 억누르느라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눈을 부릅뜬다. 본닛 위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콰르르 소리를 내며 상행선을 타고 차 한 대가 질주한다. 조금 열린 차창으로 그 차가 갈라놓은 빗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온다. 너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한동안 쌍욕을 해댄다. 너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욕지거리들이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어지럽게 차 안을 헤매고 날아다닌다.


핑크 플로이드의 연주는 다시 처음부터 재생되고 있다.


그것 때문이 아냐. 어차피 우리 사이에 우정을 기대한 건 아니니까. 조금 슬펐어.


내가 말한다.


어디 가서 쉬었다 갈까?


너는 다소 누그러진 어조다.


내 말은, 커피라도 마시면서 비가 그치길 기다리자는 거야.
내가 대답하지 않자 너는 덧붙인다. 결정할 것은 없다. 이번에는 동의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약간의 유보를 섞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면서 턱을 한두 번 주억거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돌아가면 다시 춤출 수 있을까?


휴게소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종이컵을 잘근잘근 씹으며 네가 말했다. 빗물이 튀는 것을 피해 나는 뒤로 물러나 유리창에 기대어 있었다.


할 일이 그것 말고 또 있을지 모르겠어. 근사하고 그럴듯한 일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조리 해버렸다구. 더 이상 할 일은 남아 있지 않아.


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너를 남겨 두고 시사 잡지 한 권을 사 들고 화장실에 갔다. 변기에 걸터앉아서 빗소리를 들으며 다리가 저려올 때까지 오랫동안 잡지를 보았다. 나는 네가 기다리다 지쳐 떠나 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항문의 통증이 치통보다 지독했다.
돌아가면 컴퓨터를 사서 통신을 할 생각이야. 화장실에서 잡지를 봤는데 괜찮을 것 같아. ID와 비밀 번호도 사용한대.


나는 다시 처마 밑으로 돌아왔다. 너는 종이컵을 발기발기 찢고 있었다.


뭘로 할래, ID는?


글쎄, PINKY? ZEPPELIN? RODEO? 3TH-WORLD? PICASSO? POST-HISTORY? HOMO? MUTANT?


PINKY로 해.


그러지 뭐.


우리들은 휴게소에 오래 머물면서 커피를 몇 잔 더 마셨다. 휴게소 실내에서는 새로 칠한 페인트 냄새가 났다. 도로 공사로 길이 막히자 너는 고속도로로 올라섰다. 핑크플로이드의 <벽>은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비행기가 추락하고,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천박한 여자가 좋다’라고 주절거린다. 나는 음악을 멈추고 싶었으나 손끝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늦은 오후, 톨게이트에 들어서서 고속도로 요금을 계산하고 나서 너는 고개를 숙인 채 잠시 머뭇거렸다. 뒤차가 경적을 울렸다.


다시는 만나지 않는 거지?


그래, 난 이제 그 나이트클럽엔 가지 않을 거다.


묘하다, 조금. 이름은 모르고 ID만 기억하게 되다니.


꼭 PINKY로 할게.


다른 사람이 벌써 쓰고 있으면?


사 버리지.


나는 강변도로에서 너의 차를 내렸다. 빗물에 젖은 도로 위로 이제 막 켜지지 시작한 가로등 불빛이 떨어져 이지러지고 있었다. 차들은 맹렬한 속도로 스쳐 지나고 있었다. 너의 차는 나를 남겨 두고 이내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치통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나는 바람을 맞으며 휘청거리는 한강 다리를 걸어서 건넜다. 다시 비가 쏟아졌다. 집으로 돌아와서 사흘 동안 열감기로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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