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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카고 타자기 Mar 29. 2024

어쩌다 보니 미국에서 살다

미국을 떠나기 전, 나의 일상



2023년 1월 6일


이 날은 내가 처음 미국에 온 날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여행'이 아닌, '거주'를 시작 한 날을 의미한다.


내 몸 만한 거대한 이민가방 2개에 기내용 캐리어와 거대한 보스턴 백을 들고 하나라도 더 챙겨가려고 새벽녘까지 바리바리 짐을 챙겼던 내 모습과 이런 나를 배웅하기 위해 밤잠 설쳐가며 공항버스를 타는 터미널에 데려다준 아빠와 남동생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엄마는 이미 무게가 초과한 캐리어에 하나라도 더 챙겨주시려고 나와 실랑이를 벌였고, 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건 못 들고 간다'며 소소한 다툼이 섞인 배웅을 주고받았다.


걱정보다는 오랜만에 가는 공항에 설레었고 면세점 구경할 생각에 신이 났다. 물론 그 거대한 짐덩어리를 남편도 없이 혼자 끙끙대며 들고 간 것은 지금 생각해도 어디서 난 힘인가 싶지만 그 당시엔 그 모든 것을 이겨 낼 만큼 크나큰 설렘과 다짐이 나에게 있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난다.


이 날을 회상하는 지금, 나는 미국의 중부인 일리노이주의 에반스턴이라는 작은 소도시에 산 지 1년 3개월이 되었다. 이 도시의 대학교에 포닥(박사 후 연구과정) 생활을 하게 된 남편을 따라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차 없으면 미국에서 생활하기 힘들다고 한 말이 무색하게,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근처에 마트부터 도서관, 은행 등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고 무엇보다 꽤나 안전한 편이다. (물론 가끔 총기사고가 나기도 한다.)


미국으로 떠나 오기 전까지 정말 바쁜 나날을 보냈다. 여름 즈음 남편의 갑작스러운 해외 포닥이 결정되고, 가을에 바로 출국해야 하는 남편과 관련 서류 준비부터 비자 인터뷰까지 속전속결로 끝내야 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큰 맘먹고 대출받아 집에 산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 집을 어찌해야 하는 고민거리부터, 불과 2년 남짓 된 신혼살림들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9년여간 다녔던 나의 직장 생활에 갑작스러운 휴식까지 그야말로 폭풍 같은 5개월여간의 시간이었다.


모든 일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처럼 복잡하기만 했던 이 모든 일들은 남편을 미국으로 먼저 보내고, 친정에 들어가서 살면서 하루하루 홀로 해결해 나아갔다. 그리고 그토록 원했던 승진까지 했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계획보다 한 달이나 늦게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가기 전전날까지도 회사에 출근을 해 인수인계를 하고,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송별회에서 거나하게 마신 술, 나 모르게 팀원들이 깜짝 준비한 케이크와 선물, 편지에 감동의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다시 돌아오겠다며 잊지 말라는 말을 하며 거의 몇 년은 쉬다 올 사람처럼 성대하고 요란한 이별을 했다. 같이 일하던 분들에게 내부 메일도 미리 돌리고,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약간 화끈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뭐 남들은 금세 잊겠지만.


이런 나날이 말해주듯 나는 미국 온 후의 내 삶에 대해 미리 진지한 준비와 고찰을 하지 못했다. 사실 그때도 미국에서 나는 뭘 해야 하지?라는 생각을 분명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만큼 준비할 시간도 없었고 무엇보다 영어공부는 정말 하나도 하지 않았다. 무슨 자신감인지 아니, 자신감이라기보다 그냥 생각이 아예 없었다고 해 두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변명을 하자면, 남편이 떠나기 직전 집이 정리가 돼서 자잘한 살림살이는 내가 처리해야 했고, 이것들을 다 싸서 미국으로 보낼 것과 친정 집으로 보낼 것으로 구분하고 이삿짐센터에 알아보고 중고마켓에 팔 것들을 팔고 이런 과정을 2주 만에 홀로 마쳤다.


이후엔 숨 돌릴 새도 없이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 시작 시즌이 되어 그야말로 살인적인 야근 일정과 스트레스로 몇 주가 흘렀다. 그리고 다시 쉬나 했더니 이제는 기대도 안 했던 승진 기회가 생겼고 가는 마당에 반 포기 상태였던 나를 동료들이 오히려 더 나서서 압박을 주는 게 아닌가.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둥, 미국 다녀와서는 늦다는 둥, 옆 부서 누구누구는 벌써 공부 다 했다더라, 동기들 보다는 빨리 해야지 등등.


잠시 나의 성격에 대해 언급하자면, 나는 어릴 때부터 지는 건 정말 싫어하는 자존심이 강한 아이였다. 커가면서 이 강한 자존심이 조금은 누그러졌지만(삶에 타협하며 조금은 둥글해졌다고 해두자) 옆 부서 누구보다는 잘해야지 라는 말과 매일 같이 장난스레 예상문제를 출제하며 나의 공부 상태를 체크하는 팀원들로 인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이런 자극은 '자존심 하면 나'라고 자부했던  지난 어린 날의 나를 불러왔고 약 한 달 반이라는 시간 동안 6시에 칼퇴근해서 독서실이 문 닫는 새벽 2시까지, 주말에도 밥 먹는 시간에만 집에 잠깐 가서 밥 먹고 독서실에 가기를 반복했다. 아마 남편과 함께 살았다면 이런 독한 스케줄은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같이 놀고 싶고, 주말엔 쉬고 싶고, 집안일도 해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 남편도 이미 미국으로 출국하고 모든 짐을 정리해 친정집으로 들어간 나는 집 근처 독서실을 끊고 엄마 밥을 먹으며 오로지 공부에만 매진했다. 대학교 시험기간에도 이렇게 열심히는 안 한 것 같은데, 참으로 오랜만에 열과 성을 다해 미친 듯이 공부했다. 하지만 내 머리는 예전과는 많이 달랐다. 처음에는 꽤나 충격을 받았다. 나름 학창 시절 공부 좀 했다고 생각했고 외우는 건 자신 있던 나였는데, 이상하게 머릿속에 남지 않고 마치 읽으면 모든 글자가 내 머릿속을 통과해 빠져 나가 듯 몇 시간, 아니 몇 분 뒤에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큰 일이다 싶었다. 공부를 하는 내내 천당과 지옥을 수십 번 오갔다. 어느 날은 자신이 있다가도 어느 날은 절대 안 될 것 같다 싶었다. 그리고 동일한 내용을 계속 반복하면서 외우고 잊어버리고 또 외우고 다시 잊어버리고를 하다 보니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었다. 직장 생활하며 이렇게 엉덩이 오래 붙이고 공부할 일이 있었겠나. 고통의 나날이 이어졌고, 마지막 며칠간은 아껴 둔 연차를 써가며 마지막 마무리에 최선을 다했다.


시험 당일, 전날 밤 간신히 잠에 들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한번 더 요약 노트를 봤다. 긴장된 상태에서 시험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시험장에 시계가 없는 게 아닌가. 아날로그시계를 챙겨 오지 못한 나를 책망했지만 이미 늦은 걸 어쩌겠는가. 결국 시계가 없는 상태로 미친 듯 문제를 풀었고, 초반의 당황함으로 등에 식은땀이 나고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10분 전, 5분 전이라는 감독관의 구두 안내를 의지해 OMR 카드에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색을 칠했다. 이때도 손이 어찌나 떨리던지, 나중에 후회한 거지만 그 동그라미에 색을 다 안 칠하고 그냥 찍찍 그어서 냈는데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그게 혹시 컴퓨터에 읽히지 않아 점수 반영이 안 될까 봐 오만가지 걱정이 다되었다.


어쨌든 100문제를 풀어냈고, 모든 시험이 종료되었다. 끝나자마자 헷갈리던 몇 문제를 책을 뒤적여 찾아보니 죄다 틀린 게 아닌가. 3개를 일단 먼저 확인했는데, 3문제가 다 틀린 걸 확인한 나는 완전히 망해버렸다는 표정과 그동안 나의 부재를 묵묵히 감당하며 업무를 도와준 팀 동료들에게 뭐라 말해야 할까 라는 걱정이 엄습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꺼뒀던 핸드폰을 켰더니 부재중 전화부터 메시지까지 쏟아졌다. 가장 눈에 띈 건 선임의 연락. 내가 가장 어렵고 무서워했지만 츤데레처럼 나를 많이 챙겨주고 아껴주었던 선배였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가장 먼저 전화를 걸었다. 걸자마자 첫마디는 잘 봤냐? 였고, 숨 돌릴 새도 없이 나는 '죄송해요. 차장님.'만 남겼다. 장난치지 말라던 말에 진짜라고 하니, 괜찮다고 위로해 주던 그 말 뒤로 아쉬움이 느껴져 미안함이 솟구쳤다.


집에 돌아가 쉬는데 답안지가 나왔다는 소식을 다른 동료에게 듣고 채점을 해보니, 100문제 중 4개만 틀린 게 아닌가. 와. 소스라치게 놀랐다. 물론 상대평가라 커트라인 점수가 명확하게 나오진 않았지만 작년 커트라인과 재작년 커트라인을 생각해 봤을 때 이 정도면 충분히 안정권이라고 생각할 만한 점수였다. 채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엔 팀 단톡방에 팀장님이 결과를 물어보셨고 결과를 말했다. 우리 팀원들 다 놀라며 모두 축하해 줬고, 아쉬워했던 선임도 아까는 왜 엄살을 피웠냐며 애정 섞인 잔소리와 축하를 건넸다. 다들 그래도 정확한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주변에 함구해 주기로 약속했다. 이의 제기 과정을 반영해 최종 결과는 한 달 뒤에나 나올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한 달 뒤, 드디어 원하던 승진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에 보답하듯 나도 뒤이어 내 업무를 맡을 후임에게 인수인계와 내가 하던 일의 마무리를 이어 나갔다.



이런 숨 가쁜 일상 속에서 막상 떠나려니 아쉽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그동안 정말 바라왔던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는 휴직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맡은 업무에 이제 좀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관련 부서 담당자들과도 서로 손발이 맞아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승진을 하고, 내가 조직으로부터 인정받는구나 라는 걸 느끼기 시작하니 지금 떠나는 게 내 생각만큼 마냥 행복하고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다. 이런 복잡한 마음과 정신없는 하루로 인해 나는 미국에 와서 살 내 삶에 대한 준비까지 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미국의 첫인상


에반스턴에 대한 첫인상은 '춥다, 너무 춥다.'였다.

물론 한국도 1월은 엄청나게 추운 겨울이다. 그런데 조금은 다른 추위랄까. 뼛속까지 시리면서 몹시 건조해 가뜩이나 예민한 내 기관지는 첫날부터 붓기 시작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시카고의 별명이 '윈디시티'인데 바람이 많이 부는 도시라 이렇게 부르곤 한다. 일리노이주의 가장 큰 대도시인 시카고 도심에서 북쪽으로 3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내가 살게 될 '에반스턴'도 이 윈디시티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홀로 맞는 입국심사라 한껏 긴장했지만 간단한 질문과 서류 확인 후 무사 통과했다. 출국장으로 나오니 남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달 만에 만난 남편을 보니 반가움과 어색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나중에 물어보니 남편도 같은 감정을 느꼈다고 하더라. 잔뜩 챙겨 온 짐을 보고 놀란 듯했지만, 감격의 포옹과 인사를 나누며 우버를 타고 에반스턴으로 향했다.


추운 겨울이라 삭막하기 그지없어 보였던 미국 1월 초 겨울의 모습. 사람들도 괜히 날씨같이 차갑고 삭막하지 않을까 라는 걱정이 조금 생겼다. 도착하자마자 남편이 홀로 힘들게 구한 원베드 아파트로 갔다. 굉장히 오래된 아파트였지만 집 내부는 리모델링이 제법 되어 있고, 관리가 잘 된 듯 보여서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내 생각보다 크기가 넓었고 둘이 살기엔 괜찮은 크기였다. 내가 오기 전 바닥 청소도 열심히 한 건지 아니면 미국 집 답지 않게 카펫이 아닌 마룻바닥으로 된 집이라 그런지 꽤 깨끗해 보였다.


15시간이라는 시차와 오랜 비행시간 동안 잠을 못 자 피곤했지만 얼른 남편의 학교도 궁금하고 동네도 궁금하고 구경하고 싶은 것 투성이었다.


집에 짐을 대충 던져 놓고, 가장 먼저 집 앞에 보이는 스타벅스로 향했다. 분명 나는 다른 것을 주문했는데 처음 들어보는 메뉴가 나오는 마법. 이때부터 나의 영어 수난기의 시작인가. 한국에서 정제된 발음과 속도로 말해주던 듣기 평가 시간에 나오는 영어는 현실 영어와는 전혀 딴판이라는 것을. 약간 당황했지만 미국에 처음 왔으니 하나의 웃음 에피소드로 남기자며 그날의 스타벅스 컵 인증샷도 찍어 두었다. 앞으로 이어질 현실 세계의 영어로 겪게 될 스트레스는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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