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난임 기록
한국에 들어온 7월.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그 한 달간. 나는 산부인과부터 갔고, 임신이 맞다는 확인서를 받았는데 다만 아기집이 주수에 비해 작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때부터였을까? 나는 매주 산부인과를 가게 되었고, 갈 때마다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피고임', '난황' 등등.. 그리고 남편의 면접일날, 나는 처음으로 친정엄마와 산부인과를 갔다. 그날은 아기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날이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아무래도 유산이 진행 중인 것 같다고 하며, 이번 주에 한번 더 오라고 했다. 그때도 진전이 없으면, 소파술을 해야 한다고.
정말 충격이었다.
엄마도 그런 경험이 처음이셔서 그런지 나에게 뭐라 말씀을 못하시는 게 느껴졌다. 나도 너무 충격이라 처음엔 눈물도 안 났다. 어찌할 바를 몰라서 일단 혼자 카페에 있다가 집에 가겠노라고 했다.
카페에 앉아 온갖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검색의 늪에 빠져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지만, 내 마음속에선 왠지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확신으로 변해갔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남편이 면접을 마치고 걱정스럽게 연락이 왔고, 결국 우리는 그 주에 돌아가기로 했던 미국행을 다시 취소하고 나의 수술과 1주일 간 회복기간을 고려해 1주일 더 한국에 머물기로 했다.
소파술을 받을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그리고 그런 용어조차도 몰랐다.
옆에서는 분만을 하고 있는데, 누워서 소파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수술받기로 한 시간보다 훨씬 더 늦어져 나는 한 시간이 넘게 베드에 누워 남들 출산하는 소리와 갓 태어난 신생아 울음소리를 들으며 대기했다. 그때만큼 서럽고 슬펐던 적이 없었던 거 같다. 그전까지는 잘 안 울었고, 괜찮았는데 너무너무 슬펐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믿기지 않았다.
수술은 생각보다 간단했고 금방 끝났다. 마취약이 들어간다는 간호사의 말 이후 기억이 나지 않았고, 눈을 뜬 나는 원래의 베드로 옮겨지고 있는 중이었다. 깨자마자 너무너무 아프고 속이 메슥거렸다. 토할 것만 같았다. 함께 온 남편에게 너무 힘들다고 울부짖었고, 간호사는 조금만 참으면 괜찮을 거라고 약을 다시 더 넣어주었다.
그렇게 집에 와 쉬고 1주일이 지나 다시 찾은 병원에서는 수술이 잘되었다.라는 말을 들었다.
다음날 나와 남편은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힘든 일이 생기면 좋은 일이 온다는 말이 정말 맞는 것처럼
남편은 다행히 합격했고, 우리는 한국으로 다시 들어가야 해서 한 달간 정들었던 미국 생활을 정리하느라 또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유산의 슬픔을 다 느끼기도 전에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 친구들과 인사하고 마지막 남은 우리의 미국생활을 즐기기 위해 매일매일 에반스턴을 즐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남은 짐도 열심히 미국판 당근과 마켓플레이스를 통해 처분하고, 골프도 하고, ESL 클래스 친구들과 선생님과도 파티하고, 애니 시사토 부부와도 모임을 갖고, 아파트 관리인인 샐리와도 따뜻한 포옹과 안녕을 했고, 내가 매일 같이 갔던 집 앞 단골 카페 점원과도 인사하고, 내가 좋아하는 에반스턴의 산책길을 더 열심히 걷고 달렸다. 정말 행복한 8월이었다.
부모님과 남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나의 유산은 모른 채 나는 새로운 도시에서 남편과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복직 한 뒤 일상이 약간 걱정됐지만, 한 달 정도 지나니 금세 적응했고 남편도 새로운 직장에서 환영회 회식, 업무 적응 등으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임신 준비를 하기 위해 유산 후 보약도 지어먹으며 자연임신을 준비했다.
또 유산이 될까 걱정도 되었지만, 한번 자연 임신이 되었기 때문에 노력하면 곧 금방 임신이 되지 않을까라고 장밋빛 미래를 그렸다. 그리고 소파술 후 더 깨끗해진 자궁덕에 다음 임신은 금방 된다는 인터넷 속설들도 나의 생각에 확신을 더해 줬다.
그러나 생각만큼 우리에게 좋은 소식은 찾아오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마음도 조급해져 갔다. 아직은 젊은 나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한번 유산을 했기 때문인지 괜히 불안했다. 그리고 나에게 일종의 숙제처럼 남아있었다.
나는 파워 J로 내가 계획한 일들은 꼭 해내고야 마는 성격이다. 그런 나에게 유일하게 계획처럼 안 되는 것이 바로 이 임신이다. 다른 건 다 노력하면 되는데, 내 뜻대로 되는데, 이것만큼은 생각처럼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둘 다 너무 바쁜 탓에 매월 날짜를 맞춰 숙제를 하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1년에 몇 번 주어지지 않는 기회들이 지나갔고, 나는 한 살 더 나이 들게 되었다.
2025년이 되었고 나는 만 34세가 되었으며 작년에 유산됐던 생명의 출산예정일이었던 2월도 지나갔다.
고민 끝에 남편에게 난임병원에서 산전검사를 같이 받자고 제안했다. 둘 다 이상은 없었다.
병원에서는 이상도 없고 젊으니 배란일에 맞춰 자연임신을 시도해 보라고 조언해 주었다. 그렇게 또 한두 달이 지나 나는 인공수정에 도전하기로 했다.
인공수정 1차는 로또라는 말이 있었지만, 또 막연히 나는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나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인공수정 1차 결과는 실패. 그냥 실패가 아니라 착상은 되어 2일 간격으로 피검사를 위해 병원에 방문했고 나의 양쪽 팔은 주사 자국으로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그 멍보다 더 슬픈 건, 피검사 수치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검사하는 주사자국이라는 점이었다.
아이를 기다리는 입장에서 임신이 되었는지 잘 크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피검사가 이제는 이 생명체가 떨어져 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검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충격이 컸다. 당연히 되리라는 생각 그리고 애매하게 나온 임신반응. 그로 인해 또 기다림.
어쩌면 약물을 써 강제로 배출하고, 그 약 영향으로 인해 또 몇 달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자궁 외 임신일까? MTX주사를 맞아야 하는 걸까? 최악의 경우 또 수술을 해야 할까?
매일 아침 임테기로 두줄이 연해지는지를 확인하며 제발 사라지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이 시기에 회사에서도 나는 힘든 나날을 보냈다. 새로 바뀐 업무가 나에게 맞지 않다는 걸 깨달았고 그러다 보니 생각보다 스트레스가 컸다. 더군다나 연차도 거의 소진되어 병원 갈 때마다 팀에 말하고 배려를 받았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지만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성격이 아닌 나에게는 그것조차도 스트레스였다. 더군다나 인공수정도 실패인데 이로인해 계속 병원을 가야 한다는 점이 상상 이상으로 나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
이때부터였을까. 간신히 잡고 있던 나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다는 생각과 '난임휴직'을 점점 고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