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번 글쓰기
아이를 키운 지 이제 겨우 다섯 달이 됐다. 아들은 오전 11시쯤부터 두 시간쯤 낮잠을 자고, 오후 3시쯤 다시 두 시간쯤 잠이 든다. 문제는 아기가 언제 깰지 모른다는 거다. 뭐라도 하려고 하면 늘 중간에 흐름이 끊기기 일쑤였다. 그래서 나는 주로 유튜브에서 영화 요약본을 보거나, 미뤄두었던 영화를 한 편씩 틀어보곤 했다. 하지만 언제나 끝까지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아이가 깨어 울기 시작하면 다급히 영화를 멈출 수밖에 없으니까.
최근에는 아내가 넷플릭스에서 흑백요리사를 보고 있었다. 처음엔 다른 요리 경연 프로그램처럼 보였기에 무심히 지나쳤지만, 옆에서 몇 장면을 본 게 화근이었다. 나도 모르게 빠져들고 말았다. 낮잠 시간마다 조금씩 보다가 결국 지난주까지 나온 에피소드를 정주행했다. 요즘 육아로 지쳐 있는 나에게 이 프로그램은 마치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문득 나는 광고 캠페인 기획자의 시선으로 이 프로그램을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펫네임’이라는 마케팅 용어가 있다. 친근하고 기억하기 쉽게 만든 별명으로 소비자와 소통하는 전략이다.
흑백요리사에서는 흑수저 요리사들에게 이런 펫네임을 붙였다. 그 이름들은 그들의 요리 스타일과 캐릭터를 단번에 보여준다. 예를 들어 '나폴리 맛피아'. 그가 어떤 요리를 선보일지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했다. 그리고 그는 기대를 충족시키며 매 회차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결국 그의 이름 자체가 브랜드가 되었다. 이제 그의 식당은 예약조차 어렵다.
이처럼 강력한 펫네임은 세일즈 현장에서 유용한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된다. 설명을 길게 하지 않아도 소비자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흑수저 요리사들이 본명이 아닌 펫네임으로 불리는 건, 방송 이후의 브랜딩과 대중화에 더 유리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단어 하나에 의미를 압축하는 것은 언제나 강력한 전략이다. 파스칼이 이런 편지를 쓴 적이 있다. "짧게 쓸 시간이 없어서 길게 써서 미안합니다."
USP(Unique Selling Point)란 특정 제품이나 서비스가 가진 고유한 강점이다.
광고주의 브리프에는 늘 ‘USP를 통해 판매를 촉진하라’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에서 진정으로 유일한 강점을 찾는 건 쉽지 않다. 요즘은 대부분의 상품이 오버스펙(over-spec)으로 평준화됐기 때문이다. 이럴 때 USP를 새롭게 해석하거나 설명하는 방식이 관건이 된다. 물론 새롭게 접근하는 건 시간이 더 필요하다. 하지만 제대로 해내면 강력한 캠페인을 만들어낼 수 있다. 다만 대부분은 실패를 피하기 위해 무난한 방식을 택한다.
흑백요리사에서 이런 갈림길이 명확하게 드러난 순간이 있었다. 바로 삭힌 홍어를 두고 펼쳐진 '파브리 vs 나폴리 맛피아'의 대결이었다. 삭힌 홍어의 USP는 ‘냄새’다. 그래서 보통 삼합으로 먹는다. 파브리는 이 냄새를 통제하기 위해 삼합 형태로 요리를 완성했다. 하지만 승자는 나폴리 맛피아였다. 그는 홍어의 USP를 ‘맛’에 두었다. 냄새 뒤에 숨은 다양한 부위의 식감과 맛을 이해하고, 심지어 홍어 간으로 고소함까지 끌어냈다. 셰프가 어떤 경험을 가졌느냐에 따라 USP를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걸 이 대결이 보여준다.
비슷한 양상을 이영숙 셰프와 장사천재의 ‘우둔살 미션’에서도 볼 수 있었다. 우둔살은 담백함이 강점인 부위다. 이영숙 셰프는 담백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무, 표고버섯, 다시마, 들기름을 사용해 뽀얀 국물을 내고, 피를 뺀 우둔살에 미나리를 감싸 지진 ‘미소곰탕’을 내놓았다. 반면 장사천재는 다양한 재료로 풍부한 한 상 차림을 준비했다. 결국 심플하지만 담백함에 집중한 이영숙 셰프의 미소곰탕이 승리했다.
이 두 대결은 고민거리를 던진다. 오버스펙이 일상이 된 시대에 더 나은 것(better)을 강조하는 접근이 과연 여전히 유효한가?
흑백요리사는 제한된 자원과 시간 안에서 펼쳐지는 생존 게임이다. 광고 대행사도 비슷하다. 제한된 리소스 안에서 단 하나의 계약을 따내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팀장 최현석의 리더십이 인상 깊었다. 그는 명확한 목적의식과 정확한 상황 파악으로 팀을 이끌었다. 작은 실수가 있었지만, 그것을 초기에 진화하며 팀의 동요를 막았다.
100인 시식 미션에서는 식재료 탈취라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전략으로 기선제압을 했다. 경쟁에서는 때로 필요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이어진 레스토랑 미션에서는 특수 상권을 고려해 고급 메뉴와 고가격 책정을 택했다. 이 선택은 팀의 승리를 거의 확정 지었다. 최현석은 초반부터 팀원들의 논쟁을 잠재우고, 리더로서 흔들림 없이 팀을 이끌었다.
광고 대행사에서도 비슷한 순간들을 자주 마주한다. 여러 사공이 있는 상황에서 헤매지 않고 팀을 이끄는 리더가 필요하다. 그럴 때 최현석 같은 팀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장면을 기다리며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제한된 환경에서 승리하는 법이란 무엇일까? 결국 중요한 건 상황을 읽고, 리소스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흑백요리사의 요리사들이 그랬듯, '우리도 각자의 미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광고기획자가 아니라도 다다를 수 있는 공통적인 결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