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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ypho Nov 27. 2024

#95. 1947. 1916. 1708

101번 글쓰기

3.설악산 대청봉, 1708m

강원도 영동 지방에서 30년 가까이 살면서도 한 번도 올라가 보지 않았다. 우리 가족 중에서 유독 나만 그랬다. 그것은 생각보다도 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오래전에 미국 여행을 하며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많은 미국인들이 평생 자기가 사는 주(state)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미국에 사는 이모의 이야기에 따르면, 일리노이주에 살던 한 사람은 일생을 그 곳에서만 보냈다고 했다. "일리노이도 충분히 넓기 때문에 벗어날 이유가 없어서"라던 그 나름의 이유가 새삼 지금 와서 기억난다. 하물며 강원도 영동 지방은 일리노이주에 비하면 작다. 그런 면에서 보면, 대청봉을 매일 같이 보면서도 오를 생각을 한 번 하지 않은 나의 굼뜸을 반성한다. 내 안에 웅크린 귀차니즘과 무기력이 얼마나 완강한지를 되새기게 했다. 더는 안 되겠다 싶었다. 이참에 저 무기력의 실체를 부숴버리고, 대청봉을 올라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등산의 난관들

마음먹기는 여름이었다. 하지만 실천은 11월 초에야 이뤄졌다. 여름은 너무 더웠고, 가을 주말마다 스케줄이 겹쳤다. 그러다 보니 단풍이 거의 지고 난 늦가을 산을 마주하게 됐다. 그래도 대청봉의 정점에 이르기 전까지는 단풍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늦은 시기 덕에 사람도 적었다. 결과적으로 미뤄진 등산 일정이 예상치 못한 행운을 만들어준 셈이었다.


명산에 오른다는 건 계획만큼이나 도전의 연속이다. 첫 번째 문제는 일정이다. 평일이면 좋겠지만, 평일엔 직장이든 생활이든 일이 발목을 잡는다. 결국 주말을 선택하게 되는데, 주말엔 이동부터가 문제다. 몰리는 사람들, 늘어나는 교통체증. 도착한 뒤에도 유명한 산엔 이미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런 곳에서 산행은 템포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관악산을 예로 들어 보자. 정상부에 이르는 급경사 계단은 그 자체로 힘들지만, 그 위에 사람들이 몰리기라도 하면 오르내리며 정체를 반복하다 체력이 급격히 소진된다.


따라서 등산의 진짜 적은 체력이 아니라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를 피하려면 최적의 선택은 평일 아침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면 결국 하늘에 운을 맡길 수밖에 없다. 다행히 그날, 대청봉 오르는 길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동생이라는 셰르파

혼자 대청봉을 오른다는 건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동생을 꼬드겼다. 동생은 이미 대청봉을 네다섯 번이나 오른 경험이 있었다. 평소 운동을 열심히 하는 동생은 체력에서도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오전 8시, 오색 코스 탐방로 입구에 나란히 섰다. 이 코스는 짧고 반나절이면 하산할 수 있어 선택했는데, 입구 300m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구간이 급경사의 연속이었다. 한라산이나 지리산의 천왕봉과 비교해도, 이 경사는 차원이 달랐다. 하산길에도 동생과 한참을 얘기했다. "우리가 이걸 어떻게 올라왔지?"


초반 1km 정도는 보조를 맞춰 걸었다. 하지만 급경사가 끝없이 이어지자 동생의 등이 점점 멀어지더니, 나무 사이에 가려 보이지 않는 지경이 됐다. 등산로 중간마다 있는 쉼터에서 기다리던 동생은 두 번이나 나를 맞이했다. 그러다 결국 내 배낭까지 들어주었다. 묵직했던 가방이 사라지자 안도감과 동시에 미안함이 밀려왔다.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뭐 먹고 싶은 건?" 몇 번을 물었지만, 동생은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든든하면서도 고마웠다. 그는 그날 내게 셰르파이자 형님 같은 존재였다. 덕분에 나는 두 발만 잘 간수하면 되는 일이었다.



대청봉 위에서

속초와 양양. 대청봉에서 이 두 도시는 한 뺨 거리였다. 실제론 30km쯤 되지만, 그 높이에서 내려다보니 마치 손을 뻗으면 닿을 듯했다. 왼편으론 속초 해수욕장, 오른편으론 낙산 해수욕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광활하게 펼쳐진 경치를 보며, 내가 얼마나 높은 곳에 서 있는지 깨달았다. 순간 오금이 저렸다. 고소공포증이 발동했다. 발밑을 지표면에 단단히 딛고 있으면서도, 높이의 실감을 떠올리니 긴장감이 온몸을 스쳤다.



내려갈 길은 더 막막했다. 천리길 같았다. 급경사의 낙엽 쌓인 등산로를 하산하려니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낙엽이 얼마나 미끄러운지, 엄마가 왜 신신당부했는지 비로소 이해했다. 정신을 잠시 놓았다간 크게 다칠 뻔한 순간도 있었다. 난간을 잡지 않았다면, 낙엽 위로 미끄러져 큰 사고로 이어졌을 터였다. 가을 산행이 익숙지 않아 낙엽을 과소평가한 나를 반성했다.



곰취막걸리의 맛

하산하니 오후 2시였다. 총 6시간의 산행. 배가 고프다는 사실이 이제야 느껴졌다. 하지만 집에 곧장 가고 싶진 않았다. 동생도 같은 마음이었다. "막걸리부터 한 잔 하자." 이 한마디에 합의가 끝났다. 감자전과 도토리묵 무침을 곁들일 계획도 세웠다. 오색 마을에 도착하니 동생이 추천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곰취막걸리를 주문했다. 이름만 들어선 초록빛에 곰취 향이 진할 것 같았지만, 의외로 평범한 막걸리였다. 그러나 지친 몸에 시원한 막걸리는 그 자체로 충분했다. 표면장력까지 넘치던 잔을 단숨에 비웠다. 이어 나온 감자전과 도토리묵 무침은 기대 이상이었다. 특히 묵 무침의 양념은 소면 한 접시를 추가로 주문하고 싶을 정도로 훌륭했다. 그 양념을 곰취막걸리가 완벽히 닦아냈다. 그런 양념 보다 강력한 맛이었다.


appendix. 맛난 곰취막걸리와 감자전, 도토리묵 무침은 아래 링크로 찾아가시면 됩니다. *오색통나무집

https://naver.me/5gd2uqHu


집으로 돌아온 건 7시간 반 만이었다. 남은 건 뻐근한 다리와 피로감은 있었다. 

다시는 올라가지 말자는 다짐을 이번에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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