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째 이직을 했습니다. 상

취향의 지향

by Typho

사실 내 직업적 취향에는 광고업이 맞다.

그러나 3번 째 이직에서는 직업적 '취향의 지향'을 벗어나 봤다.


탈광고

4년 전 ‘탈광고’를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먼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나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탈광고’는 광고업계의 생리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누구나 수긍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광고업은 태생적으로 대행업이다. 광고주의 니즈를 대행하는 것이 존재 이유다. 즉, 광고주 없이는 자생이 불가능하며 모든 크리에이티브는 업무상 저작물로서 법적으로 대행사의 지분이 전혀 없다. 대행업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이 지점에서, 나와 같은 이들이 ‘탈광고’를 꿈꾸기 시작한다.


최근 반도체 슈퍼 사이클과 코스피 5천 시대 개막이라는 장밋빛 전망 이면에는 ‘소비 불황’이라는 암울한 그림자가 병존한다. 광고주들이 돈을 벌기 어려운 시기라는 뜻이다. 광고주의 매출 감소는 곧 광고비의 감축으로 직결된다. 대행사는 광고로 돈을 벌지만, 광고주에게 광고는 때로 돈을 잃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ROI(투자 대비 수익)가 좋을 때는 광고를 ‘투자’라 여기지만, 상황이 나빠지면 가장 먼저 잘라내는 ‘비용’으로 취급한다. 광고주 덕에 먹고사는 광고업은 즉시 매출과 영업이익률의 급감이라는 직격탄을 맞는다.


시대적 한계로 AI를 떠올리는 이들도 많지만, 실무자의 입장에서 AI는 큰 위협이 아니었다. 3명이 하던 일을 9명이 하는 듯한 효율을 내주는 훌륭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과거 인터넷과 PC의 보급이 일을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할 일을 늘렸듯, 현재의 AI 역시 생산성을 높여 또 다른 업무를 창출하는 데 유용한 도구일 뿐이다. 오히려 AI로 제작하지 않은 것들이 역설적으로 희소성을 지니게 된 시대다.


진짜 시대적 한계는 OTT에서 왔다. 팬데믹을 기점으로 OTT는 대한민국 콘텐츠 생태계의 무소불위 권력이 되었다. 첫째, 끊임없이 공급되는 양질의 콘텐츠는 소비자들의 안목을 한껏 높여놓았다. 웬만한 자극에는 반응하지 않는 대중에게 ‘광고’라는 약속된 대련은 매력 없는 상업 도구로 전락했다. 둘째, 제작비의 폭등이다. OTT가 제작비의 기준점을 높여버린 탓에 광고 제작비 역시 상승했으나, 레드오션인 대행사들은 가격 경쟁력을 잃지 않기 위해 광고주에게 이를 청구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영업이익을 갉아먹는 길을 택했다. 시장은 왜곡되었고 자생력은 취약해졌다. 최근 2년 사이 중견 대행사들이 줄줄이 도산하는 현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런 암울한 현실 속에서 ‘탈광고’는 내게 선택이 아닌 필연이었다.



'배운 게 도둑질'

전혀 새로운 분야로 점프할 용기까지는 없었다. 여전히 ‘브랜드’라는 축 위에서 고객과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다만 나름의 명확한 기준을 세웠다.

규모의 경제를 이룩한 브랜드일 것.

회사의 확실한 캐시카우 역할을 하는 브랜드일 것.

매년 1회 이상 대규모 브랜드 캠페인을 지속할 것.

퍼포먼스 마케팅을 병행할 수 있는 곳일 것.

이 조건들을 충족하는 곳은 흔치 않았지만, 소위 ‘플랫폼’이라 불리는 마켓컬리, 배달의민족, 토스 등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곳들 역시 최근 대규모 광고 캠페인을 지양하는 추세였다. 고민 끝에 시선이 닿은 곳은 ‘IP(지식재산권) 브랜드’였다.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잊히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그 자체로 자생적인 수익을 창출하는 곳. 나는 지금 그 이름만으로도 시간의 무게가 느껴지는 한 브랜드사로 이직해 있다.



Stay or Hold

이직을 준비하며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지금 스테이(Stay) 해야 할까요?”였고, 가장 많이 들은 소문은 “거기 채용 홀드(Hold)라던데!”였다. 옮기고 싶어도 옮긴 곳이 지금보다 나을지 확신할 수 없는 불안감, 그리고 닫혀가는 채용 시장의 문턱. 2026년 초, 이직에 성공한 나는 스스로 ‘천만다행’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어쩌면 내가 이 시장의 ‘마지막 이직자’일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예감마저 든다.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남의 이야기보다 본인이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정보를 정리하고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자신의 시장 가치를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결론지어야 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고, 그 판단의 결과로 이곳에 서 있다.


다음에는 이직의 명분이 아닌, 실제 이직의 치열했던 과정에 대해 정리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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