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ypho Aug 21. 2019

#7. 외할머니 Signature

101번 글쓰기

양지

핏기 서린 고기에서 맑은 국물이 우러난다. 푹 삶아 내면 양지는 건져서 칼로 썰고, 국물은 냉장고에 잠시 둔다. 그럼 국물에 숨어있던 소기름이 표면에 드러난다. 수저로 기름만 쏙 푼다. 그럼 국물이 더 밝아진다. 델몬트 주스병에 담긴 보릿물 마냥 시원한 국물이 완성된다.


칡냉면

대기업의 손을 거치면 모든지 맛 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의 입맛을 맞추고자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이 든다. 대기업에서 만든 면은 여느 냉면집 면발만큼이나 쫄깃하다.


오이무침

김치는 필요 없다. 냉면집에서 흔히 먹는 식초에 절인 무도 필요 없다. 벌겋게 무쳐낸 오이무침 하나면 감칠만 나는 냉면이 완성된다. 이 오이무침은 익힐 필요도 없다. 밭에서 바로 딴 오이를 반달로 얇게 썰어서 할머니 양념에 이리 눕히고, 저리 눕혀서 버무려 내면 완성이다. 외할머니의 시그니쳐, 소고기 국물 냉면은 오이무침을 완성된다. 이 오이무침은 면에 얹히기도 하지만 맑은 국물에 씻어 먹기도 한다. 삼삼할 수도 있던 국물은 달큼해지고, 매콤해지고, 감칠맛이 더 나게 된다. 한 그릇에서 두 번의 맛있음을 느끼게 된다.


완숙 달걀

빠질 뻔했다. 하얀 달걀을 통째로 넣는다. 다른 이유는 없다. 냉면집에서는 반 개씩만 줘서 답답했다. 집에서 만이라도 완란하자. 껍질이 쏙 벗겨지지 않아 표면이 다소 굴곡져 있더라도 냉면 한 그릇에 계란 한 개면 부자라도 된 듯이 기쁘다.

면을 헹구시는 외할머니(2017)


외할머니

평안도 부잣집 6남매 중 둘째로 딸로 태어난 할머니는 6.25 때 월남해서 외할아버지와 결혼했다고 하셨다. 혈혈단신, 무일푼이었던 할아버지와 결혼한 이유는 시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박수가 절로 나오는 선경지명이셨다. 아무튼 이북출신이신 할머니에게 소고기를 활용한 음식은 김치나 겉절이 같이 밥상에 당연한 반찬이었다고 한다. 그중 별미가 양지 삶은 국물로 만든 냉면과 오이무침이다. 서울의 유명한 냉면집들을 거의 다 가보았지만 할머니가 해주는 맛보다 나은 곳은 없었다. 비슷한 수준이거나 조금 아래라고 생각이 들었다. 국물이나 면이 더 맛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오이무침은 어느 한 곳도 맛 본 곳이 없었다. 맛의 우위는 오이무침으로 완성된다. 그런 냉면을 올해도 맛볼 수 있어 다행이다. 할머니가 오래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6. 제주 도로 가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