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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ypho Jan 03. 2021

#23. 시드라 축제

101번 글쓰기

가는 날이 장날


운이 좋았다. 스페인 동네마다 축제까지 찾아볼 여력도 정보력도 없었던 나에게 카미노 길 중간에 마주한 축제는 행운 같았다. 고행길의 와중에서 나에게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해 신께서 준비한 선물 같았다.


카미노 길의 루틴이 그렇듯. 새벽 같이 일어나 다음 알베르게를 위해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했다. 스페인 북부의 산등성이들을 차례로 넘으면서 구릉에서 마을을 내려다 봤다. 안락하게 자리잡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동네 알베르게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그리고 잠시 발을 바람에 말리고, 슬리퍼를 신고 동네 마실을 나갔다.


흰옷과 시원한 파란색, 그리고 군데군데 짙은 녹색이 어울린 인파는 축제를 시각적으로 잘 설명해주는 인상이었다. 누구에게 물어보지는 못했다. 이것이 어떤 축제이고, 언제부터 언제까지 하느냐고. 일단 내가 스페인어를 못했고, 누구하나 유일한 동양인인 내게 관심이 없었고, 내가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 미안할 정도로 모두들 축제에 심취해 있었다.



여기 저기 공통적으로 나오는 단어와 구글링을 통해 이 지역의 '시드라' 축제임을 알 수 있었다. 지역의 오랜 노래와 오랜 전통이 축제로 버무려졌고, 주둥이가 긴 주전자로 시드라를 특이하게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순례길을 걷는 것이 참 좋은 여행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차를 타고 움직였다면, 괜히 차가 막히는 이곳을 지나가지 않았을 텐데. 걷기 때문에, 더군다나 순례길의 여정 위에 있는 도시를 걷기 때문에 여기 축제를 볼 수 있게 되었고,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표정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생생이 전달 되는 축제의 감정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게 된 좋은 경험이 되었던 것 같았다.


요즘처럼 아무도 모이지 못하게, 어찌보면 2인 이상도 부담스러워하는 요즘 같을 때. 이때의 축제가 그리도 그립다. 미리 알고 조금 찾아봤더라면, 조금 더 즐겼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다시금 생겨난다. 아무튼 코로나가 얼른 끝나길 기다리는 수 밖에. 마스크를 단도리 하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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