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 차이가 아니라 나 스스로의 가치관 혼재를 재고할 때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제법 민감한 주제일 수 있습니다. '가치관'이라는 것은 진실이라기보다 믿음에 가까운 것이라, 내가 그렇게 믿으면 나에게는 진실이 되고 내가 그렇게 믿지 않으면 진실이 아니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진실을 믿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의견차가 발생할 수 있죠.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서로 다른 개념인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이 두 사상의 의미와 차이, 그리고 이 사상들에 의한 갈등에 해결 방법은 없는지 한 번 쉽게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약 10년 전 제가 건축학과 대학원생 때, 외국 학생들과 같이 서울을 돌아다니며 건축 설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유럽, 동남아, 미국 등 다양한 국가의 대학생들과 같이 서울 북촌, 종로, 세종로 등을 다니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는데요, 한 프랑스 여학생이 시내버스를 타다가 저에게 '이 버스, 휠체어는 어떻게 타?' 라고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저상 버스가 많지 않던 시기였던지라 휠체어는 타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죠. 그래서 '아마 타기 힘들걸?' 이라고 했더니 '어떻게 그럴 수가?!' 라는 표정을 짓더군요.
그러다 또 어떤 건물 앞에서 '여긴 계단만 있는데 휠체어는 어떻게 들어가?' 라고 물어보는데, 순간 앗차! 싶었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건물 설계가 정착되지 않았던 예전 건물이었던데다, 그에 대한 전반적인 개선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기라 저는 그 사실을 인식 못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는 연신 의아한 표정으로 '당연한 것이 왜 안 되어있을까' 라고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큰 차이가 있음이 느껴졌습니다.
얘기를 쭉 해보니, 그 친구의 머리 속에는 '세상은 개인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사람은 누굴까? 라는 질문의 답은 언제나 '나'라고 하죠? 다른 사람이 얼마나 힘들고 기쁘고 고통스럽고 행복한지 사실 나는 백 프로 알지 못하고 느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되어보지 않는 한 전부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죠. 누군가 힘들다고 해도 당장 야근하고 있고 야간학습을 하고 있는 내가 제일 힘들다고 느껴집니다. 말하자면, 세상은 나라는 필터를 통해서 이해되는 나의 관점의 것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그 친구는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 한 명이 느끼는 불편 상황이 그 장애인에게는 세상 전부로 느껴지기 때문에 그에 대한 고려가 충분하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각각의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세상이 있기 때문에 100명 중 한 명이 불만족이어도 당사자에게는 세상 전부를 불만족으로 만드는 것이기에 응당 이를 해결해야 한다 라는 사고방식인 것이죠. '개인이 모여 만드는 전체' 가 아닌 '각 개인이 보는 각자의 세상이 곧 전체' 라는 개인주의 관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 친구와 나의 사고 체계가 무엇이 다를까 궁금해져서 저의 사고 과정을 곱씹어보니, 저는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을 하고 있더군요. '이 버스를 타는 사람이 하루에 천 명이라 치고, 장애인이 타는 경우를 열 번이라 가정하면, 1%의 비율을 차지하므로 버스도 1%의 비율만큼 고려를 하여 개선되어야겠다.' 라는 방식 말입니다. 투박한 예지만, '버스가 하루에 20시간을 운행한다면, 그중 1%인 12분을 장애인을 위한 운행으로 할당하면 되겠다, 내리고 탈 때 걸리는 시간을 조사하여 장애인과 동행인의 승하차 소요 시간이 3배 더 걸린다고 하면, 12분 X 3 = 36분의 분량을 할애해야 한다' 라는 방식의 사고 흐름이었습니다. 건물도 마찬가지로, '전체 공사비가 100억 원이 들고 이용객 중 0.1%가 장애인이라면 1천만 원을 장애인을 위한 시설에 할당해야 하겠다' 라는 방식이었죠. 다분히 전체를 중심에 놓고 부분을 생각하는 방식으로, 집단주의적 성향이 있다 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깨닫고 집단주의와 개인주의가 이렇게나 생각의 차이가 크구나를 느꼈습니다. 만약 그 친구 같은 사고를 하는 사람과 저 같은 사고를 하는 사람이 만나서 '장애인을 위한 건물의 설계 조건 적용 범위'에 대한 토론을 한다면 큰 의견차가 날 수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내가 장애인이라면, 이러이러한 불편 사항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이런저런 범위까지 다 적용이 되어야 한다' 라고 주장할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전체 인구 중 장애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이러하고 동행인과 그들의 환경을 고려했을 때 이러저러한 만큼의 범위까지 적용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서로가 본인이 생각하는 것이 '진실'이라 믿기 때문에 의견차를 좁히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양측 주장이 거짓이 아니기도 하고요.
위에서 말씀드린 개인주의의 개념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위와 같을 겁니다. 세계의 중심에는 내가 있고 나 외의 다른 타자 및 타인에 대한 인식과 판단은 나(이성)에 따릅니다. 따라서 개인 별로 바라보는 세상은 모두 다를 수 있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가 되죠. '나'라고 하는 정체성도 그 판단의 중심인 나의 이성을 바탕으로 형성됩니다. 그래서 누가 뭐라 하든 내가 그렇게 생각하면 나의 세계 속에서는 그것이 진실이 됩니다. 관계의 중심이 자신이기 때문에 관계를 맺고 끊는 것도 나의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고 내 주변에 어떤 세계를 둘 것이냐도 내가 선택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말하자면 입사, 퇴사, 전학, 인간관계 등이 나의 판단으로 결정되는 거죠.
집단주의에서는 개인보다 세상(집단) 전체가 중요합니다. '세상이란, 개체들로 구성된 큰 총합' 이라는 개념이 바탕되기 때문에, 각각의 개체보다 개체들이 전체를 이루기 위한 유기적인 관계가 중요시됩니다. 따라서 나와 타자가 명백히 구분되는 개인주의와 달리 나를 포함한 세상 전체를 하나(하나의 거대한 관계)로 보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림으로 그려보면 위와 같을 겁니다. 이 사상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전체 속에서 맺는 관계들' 로써 정의되는 경향이 큽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나 관계가 중시되고 집단 속에서의 나의 위치와 역할이 중요해집니다. 그러한 관계들로 나라고 하는 것이 정의되죠. 예를 들면, '나 = 00사 대표, 00학교 00기 졸업생, 00네 아버지, 00장교 00기, 00아파트 주민대표' 등으로 본인의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있습니다. 바로 '호칭'입니다.
무의식 중에 항상 사용되는 언행은 그 문화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이미 그 행위가 인식의 영역보다 깊이 들어갈 만큼 문화에 깊숙이 녹아들어갔다는 얘기니까요. 그래서 외국에 나가 평소와 같이 행동 하다가 문득 위화감이 들 때, 나의 무의식에 어떤 생각들이 있었는지 알게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양과 집단주의를 우선한 동양에서 각각 매일 사용하는 '호칭'은 이 사상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예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동갑 친구가 아닌 이상 서로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그 당사자의 아이덴티티를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당사자가 아니라 그 당사자와 나와의 관계가 더 중시되는 집단주의 문화에서 상대를 직접 부르는 행위는 그래서 자연스럽지 않게 여겨집니다. 우리는 보통 회사에서 '부장님' '상무님' '이대리' '매니저님' 등 상대의 위치를 부르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부장과 사원인 나의 관계' '이사인 나와 대리인 당신과의 관계' 같이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를 지칭하기 위한 것이죠. 이를 통해 서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가 자연스럽게 결정됩니다. 학교에서도 '선생님' '교장선생님' '담임선생님' 등 상대와 나와의 관계를 호칭으로 사용합니다. 가족 친척 사이에서는 '아버지' '이종사촌동생' '당숙' '시아주버님' 등 정확한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일종의 교양으로 생각하는 문화도 여전히 존재하는데, 이 역시 당사자와 나와의 관계에 적합한 언행이 호칭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대학에서는 '선배님' '후배님', 샵이나 레스토랑 등에서는 '고객님' '회원님' 등 대부분의 집단에서 상대의 이름이 아니라 관계를 의미하는 호칭이 사용됩니다. 따라서 호칭을 무어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상황에서는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르게 되기 쉽죠.
반대로 개인주의가 기본이 되어 있는 서양에서는 상대의 성이나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구의 범위도 우리나라의 동갑을 너머 나이 차가 어떻든 친구가 될 수 있고 서로 이름을 부르죠. 회사에서 서로를 부르거나, 처음 본 비즈니스 관계의 사람들도 '미스터 000' '미스 000' 등으로 서로를 부릅니다. 학교에서도 선생님을 '미스터 000' '미시즈 000' 등으로 부르고요. 친척을 만나면 3촌이든, 5촌이든, 시가의 5촌이든 엉클(uncle), 앤트(aunt)를 비롯한 애칭으로 부르거나 이름을 부릅니다. 심지어 '버릇없는' 자식들의 경우 부모님을 이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관계'가 아니라 상대의 아이덴티티를 지칭하는 이름을 호칭으로 사용한다는 것이죠.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자연스러운 방식입니다.
일화를 하나 말씀드리면 제가 민족사관고등학교를 나왔는데요, 민사고에서는 대부분의 과목을 영어로 배웁니다. 그때 학생들이 선생님을 처음에 'teacher' 라고 불렀는데, 한 외국인 선생님께서 'teacher'는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통칭하는 일반 명사지 특정인을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고 하며, 'Mr. 000' 등으로 부르는 것이 맞다고 하시더군요. 개인주의적 개념에서는 불특정 다수의 선생님을 통칭하는 teacher 라는 단어로 자신을 부르는 일이 이상한 상황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김태훈(제 이름임) 선생님'을 부르기 위해 쓰는 호칭 'Mr. Kim' 은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김씨' '김태훈 씨' '김 선생님' 정도가 됩니다. 학생이 선생님께 김씨, 김 선생님, 김태훈 씨?! 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래서 'Mr. Kim' 으로 불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학생들 사이에서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가 '선생님' 이라는 일반 명사를 호칭으로 사용하는 것은 선생님과 학생과의 '관계'를 지칭하기 위한 목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차이가 여기서도 크게 나타났죠.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는 이렇게 상당히 상반된 개념으로써 누군가는 개인주의를 주장하고 누군가는 집단주의를 주장합니다. 크게 구분하면 서구 사회에서는 개인주의가 더 일반적이고, 동양에서는 집단주의가 더 보편적으로 수용되어 왔죠. 현재 우리나라는 이 사고방식이 혼재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매우 빠른 근대화와 산업화, 도시화를 거치고 서구에서 개인주의 가치관이 수입되면서 기존의 집단주의와 다른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이 빠르게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갔습니다. 특히, 변화된 사회와 경제, 패러다임 상의 교육을 어렸을 때부터 받은 베이비부머의 자녀들 - '70-'80년대 및 그 이후 출생자 - 은 이전 세대와 상당히 큰 사고방식의 차이를 보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성인이 되어 사회에서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전 세대와의 사상적 의견차이도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50-'60년 대 베이비부머 및 이전 세대는 집단주의적인 성향을 바탕으로 사고하고, 그 이후 세대는 개인주의 사고를 바탕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이 일으키는 갈등은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되어왔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현상이라는 것이겠죠.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집단주의적 사고를 가진 세대와 개인주의적 사고를 가진 세대의 세대차 갈등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상대와 나의 사고방식 차이가 아니라 나 스스로 두 사상을 모두 혼재하여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갈등이라 볼 수 있습니다. 간단한 예를 통해 설명드리겠습니다. 드라마의 단골 소재기도 하면서 요새 주변에서 참 많이 보이는 부모와 자식의 갈등 상황입니다.
부모 : 너 결혼 안 할 거니?
자식 : 응. 지금 난 별생각 없는데요?
부모 : 넌 어떻게 너만 생각하니? 우리(부모)랑 집안은 생각 안 해?
자식 : 내가 왜 집안 때문에 결혼을 해야 하는데요?
부모 : 결혼은 집안과 집안의 일이야. 그리고 자식 생각도 해야지.
자식 : 결혼은 나랑 상대가 하는 거지, 그리고 집안이랑 자식 때문에 내 인생을 선택해야 하는 건 싫어.
부모 : 내가 너 좋으라고 하는 소리지 나 좋으라고 하는 소리니?
자식 : 나 좋으라고 하는 건 그냥 내버려두는 거예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부모 자식 동시에 한숨 : (역시 말이 안 통해)
어디서 자주 보던 장면과 대사지 않습니까? 부모는 개인보다 전체를 먼저 생각하는 집단주의적인 입장에서 결혼을 생각하고 있고, 자식은 나의 판단, 나의 생각을 바탕으로 하는 개인주의적 입장에서 결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고 있고 이미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입장 차를 좁히기 어렵죠. 하지만 위에서 언급드린 대로 이 갈등 상황의 근본까지 들어가 보면 사실 이 의견차는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혼재'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지 상대가 잘못 생각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양측 모두 남보다 먼저 자신의 사고방식을 한 번 재고해봐야 한다는 뜻인데요, 왜 그럴까요.
먼저 개인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자식 입장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부모님이 '결혼은 집안과 집안의 일이고, 부모 자식, 집안을 생각해서라도 결혼을 해야한다' 라고 생각한다면 철저한 개인주의 입장에서는, '아 그렇군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라고 생각하고 끝내야 합니다. 나와 당신의 생각이 서로 다른 것은 개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쉽게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하는 거죠. 상대방이 나와 다른 생각을 주장하면, '그렇구나.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잘 들었습니다' 라고 상대의 생각을 인정하고 이를 다시 나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며 그것을 받아들일지 안 받아들일지 판단하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나는 이렇게 살거야' 라고 주장하면서, 집단주의 사고를 덧붙여 '내가 이렇게 생각하니 당신도 이렇게 생각했으면 좋겠어. = 부모님도 나의 생각을 존중해서 내가 결혼하지 않는 것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라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혼재에서 오는 오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유리하게 섞어버린 거죠. 개인주의는 나의 생각이 가치 있다는 것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생각도 그 사람에게 가치 있을 인정한 상태에서 서로 의견을 나눌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물론 상대의 생각을 받아들일지 안 받아들일지는 온전히 나의 권리입니다. 결국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는다면, '당신과 나의 의견은 다르군요.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다음 기회에 또 의견을 이야기해 보죠.' 라고 하면 됩니다. 내가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내 생각대로 살 것을 주장한다면, 상대방의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라 내 생각처럼 소중하다고 인정한 상태에서 대화를 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반대로 집단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부모 입장의 사고방식을 생각해 볼까요. 부모님께서 집안과 부모 자식을 생각해서 결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인의 결혼 당시에 있어 집안과 부모 자식에 대한 고려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수 있는데요, 만약 부모님이 이런 사고방식 속에서 결혼을 했다면, 자신의 감정과 생각보다는 집안과 사회의 의견에 따라 살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절대적인 집단주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전체의 생각은 나의 감정과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고, 따라서 전체의 큰 행복이 곧 나의 행복' 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힘들어도 나로 인해 전체가 발전하고 행복하면 그것으로 그 이상의 충분한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식 결혼 문제도 마찬가지로, 현재 자식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싱글인 자식을 고려한 오늘의 집안 전체의 발전과 행복을 어떻게 도모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집단주의적 사고의 방향입니다. 그러다가 자식이 결혼한다고 하면 사위 혹은 며느리 및 손주가 생기는 상황을 고려해서 전체 집안의 구성과 행복을 생각하고 행동하면 되는 거죠.
하지만 집단주의에는 맹점이 있는데요, 전체를 우선하고 나를 그 일부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가지면 나의 감정, 나의 생각, 나의 의견 등이 전체 생각에 비해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는 경향이 생깁니다. 전체를 위해서 나를 눌러야지 그게 맞는 거지 라는 생각인데, 이는 여기서 예를 든 결혼뿐 아니라 집단주의적 사고를 하는 많은 조직에 공통적으로 발생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개인주의적인 사고가 더해져 혼재하기 시작하면, '내가 정말 이렇게나 희생을 해야 하는 것인가, 내가 힘든 것만큼 나는 어떤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가' 하는 나의 감정이 점점 더 중요하게 대두되며 내적 갈등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강해져 개인주의적 사고가 집단주의를 압도하게 되면, 부모 본인이 집단주의 사고방식 하에서의 결혼이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 자식에게 결혼에 대한 선택권을 이양하는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집단주의적 사고와 개인주의적 사고가 자기 안에 혼재하면 '집안을 생각해서 결혼은 해야 되는데 나처럼 힘들게 살게는 하지 않겠어' 라는 유명한 드라마 독백 대사 마냥 생각이 흘러가며, 미혼 자식을 고려한 집안 전체의 발전과 행복(집단주의적 사고) 혹은 결혼에 대한 선택권 이양(개인주의적 사고) 이 아닌, 자식의 결혼 상대와 시기 등에 대해 적극 개입 하는 역설적인 현상이 발생해버립니다.
결국 개인주의적으로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 거야'라고 하면서도, 집단주의적으로 '부모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해야 해'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의 혼재 상황인 자식 - 젊은 세대와,
'미혼 자식을 고려한 집안 전체의 행복을 생각하는 방향(집단주의 관점)' 이나, '내가 느낀 결혼 생활의 어려움을 고려하여 결혼 선택권을 자식에게 이양하는 방향(개인주의 관점)' 둘 다 아닌, 결혼에 깊이 관여하려는 집단주의적 사고와 개인주의적 사고의 혼재 상황인 부모 - 그 이전 세대의,
의견차는 내적 외적 갈등이 상호 겹치며 좁히기가 쉽지 않습니다. 두 입장 모두 같은 가치관을 가지거나, 혹은 서로 다른 가치관이라도 바르게 가진 상태에서는 이렇게 첨예한 의견 차를 보이지 않을 수 있으나, 자식으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의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한 집단주의의 혼재' 와 부모로 대표되는 그 이전 세대의 '집단주의를 바탕으로 한 개인주의의 혼재' 상황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시너지를 일으킨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서로의 사고방식을 논하기 전에 스스로의 사고방식이 어떠한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방식의 갈등은 (모두가 이해하실 수 있도록 드라마의 예를 든) 결혼뿐만 아니라 직장, 교육기관, 가게, 레스토랑 등 조직이 생기는 수많은 분야에서 발생할 수 있습니다. 상사와 사원, 선생님과 학생, 판매자와 구매자, 서비스 공급자와 수요자의 갈등이 혹시 상대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나의 가치관 혼재에서 발생하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서로 다른 개념인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섞어서 논리적 정당성을 만드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담론의 제시와 이를 생각해보기 위한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개념에 대해 풀어보았습니다. 다음에는 이를 바탕으로 현재 이러한 가치관 혼재가 발생하는 우리나라의 미래 전략에 관해 논해볼까 합니다. 하나의 패러다임을 가진 사회는 안정적이지만 발전과 변화가 더딜 수 있습니다. 여러 개념이 혼재된 사회는 갈등 발생 여지를 가지면서도, 이 다이내믹함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큰 도약을 꾀할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혼재가 어떤 위험이 있고, 또 어떤 도약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 방향성과 방법에 대해 이어서 다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