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예술 작품은 미래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
예술은 사회를 앞서 나간다고들 합니다. 사회 변화에는 구성원의 전반적인 변화와 동의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지만 예술가들은 자기가 생각한 바를 바로 작품으로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회 현상에 앞서 예술 분야에서 먼저 여러 가지 변화들이 포착되기도 하는데요, 잘 지켜보다 보면 앞으로 사회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도 있답니다. 심지어 시대를 너무 앞서 태어난 예술가의 경우 상당히 먼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반 고흐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반 고흐의 작품에서 지금 현대 사회의 구조와 모습이 보인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어떠한 면에서 그러한지 또 이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사회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그 사회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예술도 마찬가지인데요, 어느 시대에 어떤 작품들이 만들어지고 가치를 인정받았느냐를 보면 그 시대의 정신을 어렴풋이 알 수 있습니다. 19세기 초와 말의 작품 두 장을 통해 당시 시대정신의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1804년 작 나폴레옹의 대관식과 1887년 작 반 고흐의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입니다. 80년 여의 시간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또 고흐의 그림에서는 어떻게 현대 사회의 모습이 보일까요?
보통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많은 분들이 어려워하거나 관심이 가지 않는 이유가 바로크네 낭만주의네 로코코 양식이네 하는 사조 이야기 때문이거나, 구도가 어떻고 채도와 명도가 어떻고 하는 식의 기술적 표현과 관련된 이야기 때문일 겁니다. 오늘 그런 전문적인 단어들은 나오지 않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저는 작품을 하나의 사회로 보고 이해하는 관점에 대해 이야기하려 하는데요, 이 작품이 어떤 요소들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보면 당시 사회가 어떤 구성요소들로 어떤 구조를 가지고 형성되어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또, 당대를 대표하게 된 작품을 그린 화가의 생각은 곧 당시 시대정신을 상당히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시대정신을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고요.
먼저, 1804년 화가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의 대관식> 을 보겠습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이 작품은 항상 관람객들로 북적인답니다. 이 그림을 보면 바로 시선이 그림의 중심 - 나폴레옹이 왕관을 들고 누군가에게 씌우는 부분 - 에 갑니다. 관람객들의 시선을 그 부분으로 유도하려는 목적인데, 주인공인 나폴레옹과 그에게 왕관을 받는 부인 조세핀의 위엄과 권위를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작품 속 모든 사람들은 이 순간을 바라보고 있고, 이들만을 위한 빛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경이로운 느낌까지 드는군요. 이 그림에는 확실한 주인공이 있고 주요 인물들과 주변 인물들이 존재합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왕관을 씌워주고 있는 나폴레옹이고 왕관을 받고 있는 부인 조세핀입니다. 그리고 나폴레옹 뒤에 앉아서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교황이 그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일 겁니다.
그 세 명의 인물에서 멀어질수록 중요도는 점점 낮아지죠. 주요 인물들은 밝게 빛나고 형태와 색깔도 명확합니다. 반대로 중요도가 낮은 인물들은 어둡고 윤곽선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건물 배경은 이 모든 주인공과 주연, 조연들을 위해 존재하죠. 말하자면, '나폴레옹 - 조세핀 - 교황 - 주요 인물 - 주변 인물 - 건물 배경' 순으로 위계(중요도)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고 이것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인물 배치, 화려한 색상, 빛, 윤곽선의 표현 등이 동원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그림은 구조적으로 완벽하게 결정되어 있어 어느 한 부분이라도 변경되기 어렵습니다. 만약 주변 인물이 눈에 띄는 색상을 가지거나 주인공들의 앞에 배치가 되었다면 '틀린 그림', '틀린 표현' 이 되는 거죠. 한 발 더 나아가 작품을 하기 위한 가장 기본 레벨인 붓터치 관점에서 보면, 붓터치는 인물들을 그리기 위해 존재할 뿐 붓터치를 표현한다든지 하는 독자성을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흰색 붓 자국 하나라도 도드라지게 보였다면 전체 그림을 흐리는 오류가 될 겁니다.
자, 이 내용을 '작품 = 사회' 라는 관점에서 볼까요? 이 사회는 구조적으로 완벽하게 결정이 되어 있어 변경이 어렵고 사회 내 소 그룹이나 개인들 간의 위계 관계가 확실하며 그것이 변경되었을 시 '틀린 것'이 됩니다. 옳고 그름이 확실한 사회인 거죠. 작품을 만드는 가장 기본 요소인 붓터치는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개인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 개인은 사회 전체(=작품)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가치(여기서는 나폴레옹의 위엄과 권위)를 위해 존재할 뿐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 사회의 기준과 옳고 그름에 위배되는 어떤 행위(흰색 붓 자국)를 했을 때는 전체 사회에 파장을 일으키게 됩니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 사회는 '정답이 있는 사회' 입니다. 맞는 것과 틀리는 것이 있고 지켜야 하는 기준이 있기 때문에 모두 그 기준 내에서 높은 자유도를 가지기 어렵습니다. 각 요소들은 전체 그림인 사회를 위해 적절한 위치에 적절한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고 빠지거나 더해지는 것도 어렵죠. 위계가 분명한 정답 지향형 사회라 할까요. 당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니 만큼 19세기 초의 시대정신을 상당 부분 보여준다 생각합니다.
자, 그럼 80여 년이 지난 시대의 대표작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실로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시대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요. 나폴레옹의 대관식과 비교하여 이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마 붓 자국일 겁니다. 강렬한 붓 자국이 그림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작품 일부에서는 자화상이라는 주제보다 붓 자국들이 더 돋보이기까지 합니다. 게다가 얼굴에 초록색, 하늘색, 와인색 등 실제 얼굴에 나타나지 않는 컬러가 사용되어 붓 자국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듭니다. 위 나폴레옹의 대관식과 비교하면 붓터치라는 기본 요소의 위계와 독자성(autonomy)이 매우 높아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체 작품을 위해 붓터치가 사용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기 색깔 강한 붓터치가 모여 전체 작품을 완성해가는 느낌마저 듭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보색 관계의 서로 전혀 다른 색의 붓 자국들이 나란히 찍혀있다는 점입니다. 배경의 파란색 붓 자국 옆에 보색인 주황색 붓 자국이 찍혀있습니다. 물흐르 듯 부드럽게 빛과 색채를 표현하며 비슷한 컬러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나폴레옹의 대관식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더하여, 작품의 가장 중요한 부분과 가장 중요하지 않은 부분의 위계(중요도) 차이가 적어졌다는 것도 특징적입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에서는 그림의 어떤 부분을 떼어내서 보면 원작과 완전히 달라지고, 또 각 부분끼리도 전혀 다른 그림이 됩니다. 그만큼 그림 내 각 부분의 중요도와 내용 차가 크다는 건데요 고흐의 그림에서는 그 차이가 훨씬 줄어들어 전체 그림의 각 부분이 비슷한 위계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나폴레옹의 대관식처럼 작품 각 부분에 다양한 요소를 배치하여 어떤 스토리와 내용을 서사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를 통해 감성 자체를 통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반 고흐가 괜히 인상파의 대표 화가가 아니죠)
자, 나폴레옹의 대관식과 마찬가지로 고흐의 자화상도 작품이 하나의 사회라고 생각하고 위 특징들을 해석해 볼까요? 키워드로 정리해보면,
1. 붓터치의 위계와 독자성 상승
2. 보색 컬러의 과감한 배치
3. 작품 각 부분의 중요도 차이 감소
4. 서사가 아닌 감성의 전달
가 될 수 있겠습니다. 이를 하나하나씩 해석해 보면 놀랍게도 현대 사회의 모습들이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1. 붓터치의 위계와 독자성 상승은 '붓터치'를 '개인'으로 바꿔보면 바로 설명이 됩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각 개인의 중요도와 독자성이 상승되었다는 것인데요 사회 가치와 패러다임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고 그것에 어긋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전근대 사회(나폴레옹의 대관식)와 달리 각 개인은 이성과 행동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회 전체보다 개인의 가치관이 우선시 되고(=전체 그림보다 붓터치가 도드라지게 보이고) 사회 내에서도 자신의 색을 분명히 밝힐 수 있죠. 선진국일수록 이러한 자유를 더욱 소중히 여기고요. '자유' 라고 하는 단어가 전 세계적으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것 자체가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을 현재 인류가 추구하고 있다는 걸 말해주죠. 또 전체 작품을 위해 붓터치가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색 분명한 붓터치가 모여 전체 작품을 완성해가는 감각도 개인을 사회에 '소속된 요소' 보다는 능동적으로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독자적 주체들'로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 2. 보색 컬러의 과감한 배치는 1번의 발전 선상에 있습니다. 바로 '서로 다름의 인정과 융합의 가능성'입니다. 예전에는 서로 비슷한 특기와 능력의 사람들이 같이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사회가 원하는 방향대로 삶을 살아서 사람들이 서로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지는 경향이 다소 있었다면, 지금은 서로 전혀 다른 사고와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보색 관계의 붓터치의 과감한 배치) 만들어 내는 융합과 혁신이 높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요새 잘 나가는 기업이나 스타트업계에서는 기획가, 예술가, 개발자, 인문학자, 과학자, 철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인사이트를 나누고, 융합을 통한 혁신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하나의 이상처럼 인정받는 분위기입니다. google이나 IDEO 등의 기업뿐만 아니라, NASA 등이 지원하는 싱귤래리티 대학 등의 융합 교육도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죠. 우리나라 유수 대학들도 융합대학원 등을 창설하여 서로 다른 색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 내는 새로움 - 같은 색의 사람들끼리는 만들어지지 않는 - 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3. 작품 각 부분의 중요도 차이 감소는 전반적으로 귀천이 사라지는 사회 문화를 보여줍니다. 이 역시 선진국으로 갈수록 더 잘 보이는 문화인데요, 작품 속 부분에 따라 중요도가 확연히 다른 나폴레옹의 대관식이 사회 내 각 구성 집단들의 귀천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반 고흐의 그림은 이러한 구분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사자 들어가는 직업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니 추구해야 하고 예술하면 배고프니 하면 안 되고 등의 통념이 점점 사라지고, 나의 특성을 고려하여 나에게 맞는 삶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사회가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또, 이러한 사회적 차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캠페인이나 예전에는 인정받지 못하던 일에 대한 재조명 - 극한직업이나 생활의 달인 등의 TV 프로그램 등 - 현상이 나타납니다. 한 마디로 평등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직 갈 길이 멀 수 있지만 이러한 인식이 전반적으로 공유되는 것도 큰 변화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4. 서사가 아닌 감성의 전달은 말 그대로 사람들 개개인의 감성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설명과 서사 등을 통해 무언가를 교육받고 계몽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정, 나의 감성이 어떠한지에 대한 것이 점점 더 중요한 가치로 인정되는 거죠. 글을 읽기보다는 이미지나 영상 등으로 빠르고 강하게 감성을 전달하려 하는 현대의 모습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점점 짧아지는 아이들의 대화 문장이나 이미지의 범람 현상, 도서의 퇴보와 유튜브의 성장 등이 사실 이러한 감성의 직접적 전달 현상의 일면이기도 합니다. 또 기업에서는 감성 마케팅, 감성적 광고 등 설명이 아닌 순간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소비자를 움직이는 전략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아이폰의 유명한 광고 중에 아이폰의 기능은 무엇 무엇이다 가 아니라 아이폰을 통해 당신은 어머니와 더 자주 얼굴을 보고 얘기할 수 있고 아이의 사진을 더 잘 저장할 수 있으며.. 등으로 감성 마케팅을 했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현대 사회가 얼마나 개인의 감성과 이미지의 전달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왔던 고흐 작품의 특징과 현대 사회의 모습을 다시 키워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을 겁니다.
1. 붓터치의 위계와 독자성 상승 - 자유와 이성적 독자성
2. 보색 컬러의 과감한 배치 - 다름의 인정과 융합
3. 작품 각 부분의 중요도 차이 감소 - 평등
4. 서사가 아닌 감성의 전달 - 개인 감성
글을 마무리하다 보니 제가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 시대 순으로 작품을 관람하다가 반 고흐의 자화상을 보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놀랐던 것이 생각납니다. 이 작품은 19세기 후반에 있을 작품이 아닌데 왜 여기 있는 걸까 - 적어도 반세기는 앞서갔던 그 작품 앞에서 한 동안 넋을 잃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앞선 그 작품과 주변 작품들과의 차이를 보며 '아, 세상이 앞으로 이렇게 바뀐다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반 고흐의 작품은 그가 죽고 난 후세에 그 가치를 인정받고 현재 세계 최고 작가의 반열에 있습니다. 말인즉슨, 그만큼 현대에 가치를 인정받고 현대의 시대정신을 가졌다는 것이겠죠. 놀랍게도 현대의 정신인 자유, 융합, 평등, 감성 등의 가치 말입니다. 개인이 자신의 능력과 독자성을 충분히 보장받으며 자기 색깔을 발전시키고 이것을 전혀 다른 색을 가진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며 모든 사람은 각각의 붓터치가 말해주듯 평등하게 존재하고 사회 전체적으로는 어떠한 계몽이 아닌 자신의 감성을 고찰하는 사회가 반 고흐의 그림에서 보이는 정신입니다. 매우 이상적이죠? 현대 사회가 아니라 이상적으로 구현된 근 미래 사회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일부 선진국에서는 실제로 이러한 문화가 제법 성숙해 있죠. 우리나라는 현재 어디까지 왔고 어떤 부분에 대한 고민을 더 해야 할까요.
아, 한 마디 덧 붙이자면, 이렇게 작품에 내포된 '정신'과 이의 '우수한 시각적 표현'의 시너지가 미술품 가격을 형성하는 주축으로 작동한답니다. 재료값 해봐야 얼마 안되는 그림이 왜 수백 수천억원의 가치로 인정받을까요. 기본적으로는 이렇게 전 세계에 메세지를 던질 수 있는 세상을 앞서는 정신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미래 사회의 모습이 어떨지 가늠해보기 위해 20세기 유명 미술 작가 한 분을 모셔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국제적으로 가장 높이 평가받는 미술 작가 중 한 분의 작품을 감상해보시죠. 김환기(1913-1974) 작가인데요 이 작가의 후기 작품인 '무제 16-VII-68 # 28'은 아래와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이 보이십니까. 작가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 그림을 그렸을까요? 구성 요소의 독자성과 위계, 평등, 추상적 감성,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 등등의 측면에서 본다면?
또, 현재 활동 중인 작가 중 세계적으로 가장 가치를 높게 인정받는 작가, 거칠게 말해 가장 비싼 작품을 만드는 작가의 작품을 하나 보시죠. 가능하면 우리나라에서 직접 볼 수 있는 작품으로 골라봤습니다. 데미안 허스트인데요, 이 작가의 작품이 보여주는 것이 미래 사회의 시대정신이라면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요. 이 작가는 왜 이런 작품을 만들었고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우리가 알게 모르게 터부시 했던 관념에 대한 도전일까요? 더 나아가, 이 작품이 정말로 미래 시대정신을 대변하기 때문에 인정받는 걸까요, 혹은 다원화되는 시대에 한 작가의 작품이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것은 불가능 해질까요?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하고,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바라보는 현상의 대상도 다양합니다. 누군가는 축구 경기를 보며 세상의 흐름을 파악할 것이고, 누군가는 돈의 흐름을, 또 누군가는 철학의 변화를 보며 미래를 생각하고 있겠죠. 저는 예술 작품을 통해 느꼈던 사회의 모습을 이야기해 봤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것을 보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