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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연 May 24. 2019

셰프의 옷

불과 칼로부터 셰프를 보호하는 조리복을 통해 들여다보는 주방 환경의 문제

레스토랑은 손님을 끌기 위해 인테리어에 많은 공과 돈을 쏟는다. 하지만
그 뒤에서 요리사들은 여전히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린다.
요리사들의 근무 환경은 여러모로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아 보인다.
기능성과 디자인을 갖춘 고급 조리복의 등장은 요리사들의 복지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서서히 개선점을 찾아나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반가운 소식이다.


한차례 불어닥친 먹방 열풍에 요리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요리사라는 직업을 선망하며, 요리사는 ‘셰프’로 격상돼 불리기 시작했다. 교육부가 지난해 발표한 ‘초·중등 진로교육 현황조사’에 따르면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각각 갖고 싶은 직업 4위와 5위가 요리사라고 한다. 이는 판사나 검사, 변호사 등의 법조인보다 높은 순위다. 그도 그럴 것이 방송에 비친 셰프들은 그들 위로 쏟아지는 조명을 받으며 조리대 앞에 당당히 서 있다. 그들은 주어진 시간과 재료를 활용하여 듣도 보도 못한 수준의 화려하고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만들어낸다. 그 모습은 음악을 연주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꼭 조명 때문이 아니다. 스타 셰프들은 현실 세계에서도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호화로운 레스토랑을 성큼성큼 오가며 말끔히 차려입은 직원들을 진두지휘한다. 그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셰프라는 직업을 우러러보기에 이르렀다.

 

물론 주어진 재료로 새로운 차원의 음식을 만드는 창의성, 여러 변수에도 최상의 맛을 이끌어내는 집중력을 요하는 요리사는 진작에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일하는 환경은 드높아진 위상을 받쳐주기에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요리사는 하루 평균 12시간 근무하며, 주 5일 일하는 경우가 드문 한편, 박봉에 시달린다. 그들이 하루에 반나절을 머무는 주방 환경은 더 심각하다. 화구와 오븐이 몰려 있는 주방은 열기로 가득 차고, 달궈진 쇳덩이나 마찬가지인 프라이팬과 냄비가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그 속에서 뜨거운 물과 기름이 출렁댄다. 자칫 손목을 삐끗했다가는 그 불덩이가 요리사를 덮칠지도 모른다. 한편, 지난 정권 때 환경부는 생선 구울 때 발생하는 초미세먼지 농도를 공개하며 미세먼지의 주범이 고등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물론 생활 오염원이 미세먼지의 궁극적 원인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매일 고기와 생선을 굽는 연기를 들이마시는 요리사의 폐는 온전한지 새삼 걱정됐다. 또 날카로운 칼과 가위는 언제 요리사를 향할지 모르는 위험 요소다.

 

실제로 요리사는 손해보험사가 지정한 사고 위험도가 높은 직업군 2급에 속한다. 참고로 소방관과 경찰은 최고 급수인 3급에 해당한다. 소방관은 방화복을, 경찰은 방탄복을 입는가 하면, 요리사는 조리복을 걸친다. 헌데 불과 칼의 위협에 노출된 요리사가 입는 조리복은 방화복, 방탄복과 비교하면 너무도 단출하다. 통 넓은 하의에 화이트의 더블 재킷 상의가 전부. 조리복은 하의보다 상의가 중요하다. 화구가 상체에 가깝고, 대부분의 조리 활동이 손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에 조리복의 상의 착용이 더 엄격하다. 최근에는 레스토랑 콘셉트에 맞추어 색이 다양해졌지만, 그럼에도 열에 아홉은 화이트의 더블 재킷 상의를 착용한다. 그 이유는 의사나 이발사가 흰 가운을 입듯 피가 발생했을 때 그 발원지를 신속하게 찾는 한편, 열기를 흡수하기보다 방출하게 하기 위해서다. 얼룩졌을 때 표백이 가능하며 주방의 청결도를 보여주는 척도라는 점은 부수적 이유에 해당한다. 더블 재킷인 또 다른 이유는 가슴 부위를 두 겹으로 감싸 뜨거운 기름이나 물로부터 몸을 이중으로 보호하고, 한쪽 면이 얼룩질 경우 안면을 바깥면으로 교체하여 청결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븟(Beaut)' 룩북 중 박준우 씨 촬영 컷

늘 화재의 위험에 노출되며 열사병을 걱정해야 하는 요리사의 조리복을 단순한 옷이 아닌 보호복으로 인식하고 이를 만드는 이들이 있다. 국내에 기능성을 강조한 고급 조리복 시장을 연 ‘븟’은 직원 대부분이 요리사 출신이다. 요리사로서 용광로 같은 주방에 다년간 서봤기 때문에 누구보다 조리복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잘 안다고 그들을 주장한다. 유럽과 미국의 유명 주방에서 경력을 쌓은 배건웅 대표가 뜻밖에 조리복 시장에 뛰어든 배경은 개인의 사정에 시장의 요구가 부합한 결과다. “마지막에 근무했던 레스토랑은 요리사가 직접 음식을 서빙하는 구조여서 요리사들의 복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대표는 조리복에 전혀 투자를 안 해줬죠. 누더기 같은 조리복을 입을 수 없어 요리사들끼리 돈을 모아 조리복을 구입하기로 했어요. 당시 가장 고급으로 통하던 한 미국 브랜드의 조리복을 공동 구매했는데, 기대와 달리 너무 불편했죠. 핏도 전혀 맞지 않았고요. 내가 만들어도 이것보다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배 대표는 요리사 시절 재미 삼아 조리복을 만들었다.

 

‘자신만의 조리복을 갖는 일은 모든 셰프의 꿈’이라고 귀띔하는 배 대표는 이탈리에서 유학하며 사귄 디자이너 친구들이 많았다. 자신이 여태껏 시중에 있는 조리복을 입으며 불만스러웠던 점들을 보안하여 도안을 완성한 후 친구들의 검수를 받은 끝에 배 대표는 자신만의 조리복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제 세상에 하나뿐인 조리복을 입고 주방에서 훨훨 날 일만 남은 듯했다. 그러던 중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한 배 대표는 더 이상 요리를 할 수 없게 됐고, 그때 그의 손에 닿은 유일한 희망이 바로 조리복이었다. “요리사 출신이니 누구보다 주방 환경에 필요한 기능을 잘 알았어요. 요리사와 가장 잘 공감할 수 있고, 좋은 식재료로 최상의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의 철학이 몸에 밴 만큼 좋은 재료로 최상의 조리복을 만들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죠.” 븟은 국내 최초로 조리복에 매시 소재를 차용했다. 이는 더운 주방에서 땀과 열을 최대한 빨리 배출하기 위해서다. 또한 일부 제품에는 살이 닿는 앞판에도 안감으로 매시 소재를 대기도 했다.

 

븟의 조리복은 언뜻 외출복을 연상시킬 정도로 멋스러움을 유지하는 동시에 그 속에 다양한 기능을 숨겨놨다. 일반 재킷보다 긴소매는 열과 뜨거운 물, 기름으로부터 팔을 보호하는 한편, 급하게 뜨거운 물건을 집어야 할 때 주방 장갑을 대신한다. 또한 뒤판의 기장도 길게 하여 활동 중 마찰이 많이 일어나는 엉덩이 부분을 보호하며 몸을 숨이더라도 속살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뜨거운 물과 기름이 대량으로 튀었을 때 단번에 벗을 수 있도록 단추 대신 스냅 버튼을 차용했으며, 이 또한 논 알레르기 제품을 선택해 금속 알레르기를 가진 사람을 배려했다. 한편, 세탁한 후 다리지 않아도 끝이 말리지 않도록 밑단을 길게 잡아 편의성을 더하기도 했다. 위로 봉긋하게 솟아 다소 우스꽝스럽고 거추장스럽던 기존의 조리모를 헌팅캡으로 바꾼 것도 븟이다. 현재 국내에 여성을 위한 조리복은 없다. 모든 조리복이 남녀공용을 주장하지만, 그중 실제로 여성을 배려한 점은 여미는 방향이 반대인 사실 외에 찾아보기 힘들다. 븟은 많은 손해를 감수하며 다년간 연구 개발한 여성용 조리복의 출시를 앞두고 있다. 이는 주방 내 성평등을 이루는 작은 불씨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븟은 조리복이 작업복 이상의 의미를 갖기를 바란다. 단순히 작업 환경의 질을 높일 뿐 아니라 요리사를 돋보이게 하여 격을 높이는 패션 아이템으로 인식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을 대표하는 제품이 바로 연속하여 미슐랭 별 두 개를 거머쥔 권숙수와 협업하여 만든 조리복이다. 우리 땅에서 나는 특별한 식재료를 이용해 이 시대에 맞는 한식을 선보이는 권숙수와 함께 완성한 조리복은 한복을 현대식 조리 공간에 맞게 재해석했다. 카라와 소매 부분의 오프 화이트 색상과 쿨그레이 색상의 배색은 한옥의 기와가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두 겹의 깃과 끝동으로 전통의 디자인을 추구하되, 쾌적함을 유지하기 위해 팔 안쪽까지 매시 소재를 적용해 기능성을 더했다. 이 조리복은 뉴 코리안 퀴진을 선도하는 권숙수의 격을 한층 더 끌어올린다. 실제로 한복의 터치가 가미된 옷을 입고 홀을 오가는 요리사와 직원의 움직임은 우아한 춤사위를 연상시킨다. 한편, 데님과 코듀로이 등의 패션 소재를 적용한 제품을 출시하기도 했다. 

 

완벽에 가까운 고도의 기능성에 동양의 미가 더해지자 최근에는 해외의 미슐랭 셰프들이 직접 연락하여 조리복을 주문하는 일이 빈번하다고 한다. 이는 여태껏 수입에 의존해온 서양식 조리복을 역수출하는 놀라운 현상이다. 레스토랑은 손님을 끌기 위해 인테리어에 많은 공과 돈을 쏟는다. 하지만 그 뒤에서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는 요리사들은 여전히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다. 요리사들의 근무 환경은 여러모로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아 보인다. 그럼에도 븟의 제품이 보호복으로써 기능을 다하는 동시에 레스토랑의 콘셉트와 셰프의 개성을 표현하며 조리복만큼은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게 분명하다. 기능성과 디자인을 갖춘 고급 조리복의 등장은 요리사들의 복지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서서히 개선점을 찾아나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반가운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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