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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연 May 24. 2019

싱글의 역습

싱글 오리진, 에스테이트, 몰트 등 싱글이 대세다.


커피, 초콜릿 하면 떠오르는 맛이 있다. 그런데 전 세계 커피와 초콜릿이 실제로는 이 관념적 맛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면? 대기업이 여러 지역의 원료를 섞어 탄생시킨 획일적 맛에 의구심을 품은 사람들이 특정 지역의 개성을 담은 싱글 오리진 커피와 초콜릿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비단 커피와 초콜릿만의 문제가 아니다. 홍차, 맥주, 위스키, 올리브유 등 다양한 식재료 분야에서 싱글 오리진이 이슈다. 싱글 오리진은 쓰거나 달기만 한 자본의 맛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새로운 미각적 체험을 통한 나만의 기호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줄 것이다.


소비자들은 날로 똑똑해진다. 전 세계 어디든 못 가는 곳이 없고, 인터넷과 SNS를 통해 소통하지 못할 사람이 없으며, 열람하지 못할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거대 자본이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메시지를 그대로 수용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대자본을 앞세운 과점 시장에 의심을 품고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이렇듯 소비자들의 사고가 전환되면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소비품 중에서도 구매 빈도가 높고 개인의 건강과 직결되는 식품 시장에 가장 큰 변화가 일고 있다.


대형 식품 회사들은 자사 생산 제품을 더 많은 사람이 소비하게 하기 위해 더욱 보편적인 맛과 향을 추구하는 동시에 가격 경쟁력을 높이는 데 주력한다. 질보다 양에 초점을 맞춘 대기업의 방침에 최근 젊은 소비자와 생산자들은 반문하기 시작했다. 과연 기업에서 제시하는 맛이 진짜인지, 원재료는 어디에서 왔는지, 유통 과정에 문제는 없는지, 재료 공급자는 합당한 대우를 받는지, 기업이 부당한 이득을 챙기지는 않는지 등등. 심지어 최근 해외에서는 오렌지 주스 한 병에 얼마나 많은 나라의 오렌지가 섞여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상당한 이슈가 될 정도였다. 


제3세계에 밀집한 커피 농장에서 일어나는 노동 착취는 오래전부터 커피업계의 고질적 문제로 회자돼 왔다. 사람들은 투명하고 공정한 거래를 통해 공급된 원재료가 거대 자본의 개입에서 벗어난 공정을 거쳐 건강을 해치지 않고, 원재료의 본질적인 맛을 잘 살린 미식을 즐기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고자 하는 이들이 꾀하는 다방면의 변화 속에서 ‘싱글’이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눈에 띄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정 지역에서 생산한 원두로 내린 싱글 오리진 커피가 가장 낯익고, 단일 양조장에서 맥아를 원재료로 한 위스키를 뜻하는 싱글 몰트위스키도 제법 익숙하다. 또한 맥주의 맛과 향을 좌우하는 홉을 여러 종류 섞지 않고 단일 홉으로 양조한 싱글 홉 맥주와 특정 포도원에서 재배한 포도만으로 만든 싱글 빈야드 와인, 그리고 싱글 오리진 초콜릿, 싱글 오리진 올리브 오일, 싱글 오리진 티 등이 존재한다



여기서 ‘싱글’이라는 단어가 수식하는 바는 조금씩 다르지만 이러한 움직임이 태동한 이유는 일맥상 통한다. 원산지와 품종에 따라 구별되는 재료의 특성을 무시한 채 무분별하게 개발한 대기업 제품과 달리 원재료 자체의 개성을 살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 국내에도 이러한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이끄는 개척자들이 등장했다. 산지에서 직접 원재료를 들여와 여태껏 대기업이 관여하던 공정을 독자적으로 추진하며 제대로 된 싱글 오리진 커피와 초콜릿을 소개하는 업체들이 생겨난 것이다. 


커피 관련 업체를 장려하고 건강한 커피 문화를 정착시키고자 ‘커피찾는남자’라는 대안 미디어를 운영하는 위국명 대표는 그들의 노력이 단지 품질과 맛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시도가 생산자와 유통자를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은 소비 운동이기에 더 가속화한다고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얼굴 있는 거래를 해야 합니다. 일례로 ‘케냐 커피’ 하면 누가 생산했는지, 아동 학대 등의 부당함은 없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생산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추가 검색을 통해 더 상세한 내용을 추적할 수 있는 커피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러한 취지를 무시한 채 단지 산지만을 표기한다면 그것은 중심이 빗나간 행위입니다.” 위 대표는 품질 관리에 자신 있는 곳일수록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한다고 귀띔한다.


위 대표의 주장대로 싱글 오리진 커피의 태동은 투명한 거래와 윤리적 소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기존 커피 맛에 대한 싫증 또한 싱글 오리진 커피를 찾는 이유 중 하나다. 우리는 이제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생두를 지나치게 많이, 그리고 오래 볶는다는 사실쯤은 안다. 그런 커피의 쓴맛을 때때로 거북스럽게 느끼면서도 커피 하면 자연스럽게 쓰고 구수한 맛을 떠올린다. 위 대표는 ‘커피의 쓴맛을 즐기는 문화는 학습에 의한 결과’라고 지적한다. “쓰지만 마셔도 건강에 해롭지 않고 나름의 효능이 검증된 데다 강하게 로스팅했을 때 느껴지는 푸근한 향이 더해지면서 쓴맛을 후천적으로 허용하게 된 겁니다.” 



20세기 후반 스타벅스가 전 세계 어느 매장에서 든 똑같은 커피 맛을 경험할 수 있게 한 것은 혁명에 가까웠다. 커피업계는 이를 ‘제2의 물결’이라 부르기도 한다. 스타벅스는 균일한 커피 맛을 내기 위해 개성이 도드라지지 않는 여러 지역의 원두를 섞은 후 각각의 결점과 호불호가 갈리는 산미를 가리기 위해 태우듯이 볶았다. 그 결과 사람들은 여태껏 구수하고 쓴맛이 커피 맛이라고 여겨온 것이다. 반면 싱글 오리진 커피는 생두를 가볍게 로스팅하는 게 특징이다. “단일 산지 커피 고유의 개성은 라이트 로스팅했을 때 더 도드라집니다. 한편 특정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 강하게 볶으면 미각과 후각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산지별 차이가 모호해집니다.” 싱글 오리진 커피를 주로 브루잉으로 즐기는 이유가 바로 가볍게 볶는 정도의 로스팅에 있었던 것이다. 


“커피는 진하기, 즉 농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진한 커피는 첫 모금 마셨을 때 큰 임팩트를 주지만 커피가 식어 혀의 변별력이 높아지면 곧 맛이 너무 세게 느껴져 혀가 금세 피로해집니다. 그러므로 첫 모금이 살짝 심심하게 느껴지더라도 농도가 비교적 약한 커피를 즐기고, 또 그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를 찾기를 바랍니다.” 위 대표는 대형 프랜차이즈의 에스프레소 음료에 익숙한 소비자들에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커피를 경험해보기를 권한다. 또한 생산자와 유통 과정에 관심을 가질 것을 거듭 강조한다. “소비자부터 생산자가 누구인지 관심을 가져야 유통 구 조가 변합니다. ‘이 커피가 어디 커피예요?’라고 바리 스타에게 묻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더 이로운 커피를 더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위 대표가 내려준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코체레 커피에서는 기분 좋은 신맛과 함께 단 향이 올라왔다. 위 대표를 만나기 직전에 마시고 온 아메리카노와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커피는 좀 더 나은 편이다. 일본식 핸드 드립 전문점의 영향으로 어렴풋이나마 커피의 풍미가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이 좀 있으니까. 반면 초콜릿에도 다양한 풍미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 망원동에 있는 초콜릿 전문점 카카오다다의 싱글 오리진 초콜릿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산지별 맛 차이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커피처럼 초콜릿에서도 과실 향, 꽃 향, 견과류 향 등이 나는데 테이스팅 노트가 산지별로 전혀 다르다는 사실 또한 한눈에 보여준다. 여태껏 먹어온 초콜릿이 무엇이었는지 혼란스러울 정도의 경험이었다. “초콜릿 맛, 초콜릿 향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초콜릿은 시장에서 맛이 정형화된 식품이에요. 저 또한 처음 싱글 오리진 초콜릿을 맛보고 몹시 놀랐죠. 카카오가 농작물인 만큼 산지의 토양과 기후에 따라 맛과 향이 다른 건 어쩌면 당연하지만, 그런 걸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던 것 같아요.” 카카오다다 윤형원 대표의 말이다



카카오다다는 현재 마다가스카르, 가나, 에콰도르, 도미니카공화국, 페루산 싱글 오리진 초콜릿을 ‘빈투바(bean to bar)’로 제작해 판매한다. 빈투바란 초콜 릿의 주원료인 카카오빈을 직접 가공해 만든 초콜릿을 의미한다. “쇼콜라티에 양성 교육 과정의 첫 수업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그때 강사가 ‘초콜릿을 만들 수 없다’고 말했죠. 쇼콜라티에란 초콜릿을 만드는 게 아니라 해외의 대기업에서 만든 초콜릿을 녹여 갖가지 첨가물을 넣고 재가공해 제품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초콜릿은 카카오로 만드는데 정작 카카오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굉장히 충격적이었죠. 그러다 소규모로도 카카오빈을 가공하여 빈투바 초콜릿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때부터 전 세계 각지에서 기계와 카카오빈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한 윤 대표는 싱글 오리진보다 빈투바라는 개념에 더 집중 했다고 한다. 


“카카오빈을 가지고 초콜릿을 만들어 세계 각지의 초콜릿 전문점에 납품하는 대형 회사에서도 단일 산지 초콜릿을 만들어요. 하지만 물량이 많다 보니 저희처럼 한 알씩 들여다보고 그 상태에 따라 로스팅 정도를 조절하지는 못하죠. 그런 점에서 대형 초콜릿 회사와 여기서 초콜릿을 납품받아 제품을 만드는 전문점과 저희는 차별된다고 생각해요.” 윤 대표는 궁극적인 목표가 소비자들에게 카카오 본연의 맛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때 카카오 본연의 맛은 산지에 따라 다르므로 하나로 규정하기 어렵다. 윤 대표는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맛과 향이 서로 다른 싱글 오리진 초콜릿을 산지별로 나열해 한자리에서 보여주고 있다.



“기존 초콜릿 시장은 특정 대기업들이 독식했어요. 그런 기업이 싱글 오리진 같은 개성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가들도 독자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서서히 카카오 품질이 떨어졌어요. 최근 싱글 오리진, 빈투바, 크래프트 초콜릿 등이 화두가 되면서 농부들도 변하기 시작했죠.” 윤 대표는 이러한 변화가 농장이 자립하는 데 일조하기를 기대하는 한편, 국내 시장이 변하는 데는 시간이 다소 소요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일부 대기업에 의해 오랜 시간을 거치며 입맛이 길들여졌기 때문에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저희 같은 업체를 통해 건강하고 올바르게 만든 초콜릿이 원래 어떤 맛인지 조금 눈뜨기를 바라요. 그 과정에서 초콜릿도 커피나 와인처럼 취향대로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으면 하고요.” 


싱글 오리진 커피와 초콜릿은 쓰거나 달기만 한 자본의 맛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찾아온 새로운 기회다. 모두가 알 만큼 알았다고 생각하는 커피와 초콜릿이 예상치 못한 미각적 체험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 자신만의 기호를 찾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기회이자 윤리적으로도 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 무엇보다도 익숙해서 더욱 놀라운 반전, 싱글의 역습은 이제 시작이다. 


<Esquire> 2018년 4월호에 실린 기사를 재구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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