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후 25년 만에 처음으로 당하는 정리해고에 대한 단상들
지난 월요일, 즉 2020년 1월 13일 오전 9시 30분에, 이제 회사에서 나가 달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제 일주일 좀 넘게 지났는데 짧은 동안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네요. 처음의 놀라움과 당황함을 거쳐서 이제는 차분히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음 스텝을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지금 이 시간이 정말로 소중한 시간이고 제가 지금 하는 생각들이 쉽게 하기 어려운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기록을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졸업하고 2년 정도 짧게 다녔던 외국인 회사를 관두고 잠시 쉬다가, 1997년 9월에 또 다른 미국계 회사인 지금의 회사에 필드 엔지니어로 한국에서 입사를 했으니 22년 하고도 3개월을 다녔어요. 한 가지 더 묘한 숫자는, 제가 미국 사무실로 오기로 결정이 난 게 2016년 가을 무렵이었고, 가족들과 LA 공항을 거쳐서 지금 3년째 살고 있는 샌디에이고에 도착한 날이 바로 2017년 1월 13일이니, 미국으로 이민을 온 지 정확하게 3년 만에 고용 계약 해지를 통보받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와서도 회사에서 몇 번의 구조조정이 있었고, 사람들이 타의에 의해서 회사를 떠나는, 즉 레이오프(Layoff)되는 것을 멀리서도 봤고, 가까이는 샌디에이고 사무실 바로 제 옆자리 사람들이 떠나는 것도 몇 번 봤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저한테도 닥칠 수 있는 일이라고 현실적으로 생각을 해 본 적도 없고, 준비를 해 놓은 것도 없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같은 회사를 이렇게 오래 다녔고, 일도 열심히 하고, 실력도 본사로 발탁이 될 만큼 인정을 받은 데다가, 실적도 아주 만족스러울 정도는 아니지만 나쁘지 않았다고 자평하고 있다가 닥친 일이라는 것은 게으른 변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 내가 정리해고 명단에 들었을까 이리저리 고민을 해 봤는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제 보스와의 관계였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저를 미국으로 스카우트해준 제 보스가 몇 달 전에 회사를 떠났고, 좀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그 후임으로 제가 보고하게 된 상사가 일종의 임시 보직인 사람이어서 그 양반하고의 관계가 제대로 쌓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근데, 사실 이번 통보는 그 양반의 보스인 부사장님이 직접 제게 했는데, 그분하고의 관계는 뭐 더욱 없다시피 했으니, 아마도 이번 인원 축소의 실질적인 살생부를 만들었을 그분이 저에 대한 파악의 수준이나 평가가 그리 높지 않았을 거라는 짐작입니다.
어설프게 사내 정치를 했어야 한다고 자위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결국 회사 생활이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일을 하는 것이고, 거기에서 필연적으로 서로 간의 소통이라던가 호흡이라는 것이 생기는데, 그 부분이 부족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보다 더 근본적으로 제가 일하는 분야의 실적이 매우 뛰어났으면 이런 인원 감축이라는 일 자체가 생기지 않았을 테지만, 그냥 제 개인이 이런 통보를 받은 사건을 놓고 보면 그런 것처럼 보인다는 거지요.
이 소식을 들은 제 한국 지인들 가운데 오히려 저보다 더 안타까워하면서, 혹시 아시아 사람이라서 차별을 받은 것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내신 분들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절반만 맞는 이야기입니다. 제 생각에도 제가 미국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 이번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그게 제 피부 색깔 때문은 아니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가장 큰 요소가 뭘까요? 저는 의사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그 부분이 원활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영어를 꽤 잘하는 편입니다. 주변의 한국 사람들 그리고 외국 사람들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유학도 하지 않고 외국 생활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들 중에 이렇게 영어가 자연스러운 사람은 처음 봤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저는 3년 전에 가족들과 샌디에이고로 이사 온 것이 제 인생 첫 외국 생활입니다. 제가 69년생이고 2017년에 미국으로 이민 왔으니 48년 만의 첫 외국 생활이죠. 물론 그전에 출장은 자주 왔었지요. 영어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자세히 써야 하겠습니다만, 이번 일만 놓고 보면, 물론 저를 끌어주던 보스가 나간 것이 큰 영향을 줬겠지만, 그 후로 약 3개월 정도 제 임시 보스, 그리고 그 위의 부사장님과도 좀 더 의미 있는 새로운 관계를 쌓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기엔 제 노력도 부족했고, 또 영어 및 전반적인 미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고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이번 일을 겪으면서 제가 통렬한 반성을 하고 있는 것은, 보다 구체적인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는 부분입니다. 제가 작년 8월에 미국 나이로 50살이 되었습니다. 한국과 다르게 미국에서는 50세 생일을 아주 크게 축하해주더군요.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될 나이라고 하면서요. 뭐 그때 이런 일을 예측할 수는 없었겠습니다만, 웃고 떠들면서 지인들과, 100살까지 산다고 보면 이제 절반 산 건데, 여기가 꼭짓점인지 아니면 여전히 오르막인지 모르겠다고 했었거든요. 막연하게 회사생활을 평생 할 수 없다고는 생각했고, 주변의 인맥이나 혹시 뭔가 다른 비즈니스라도 고민을 해 봐야 하지 않을까도 생각했습니다만, 생각만 한다고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죠. 그리고 이번 일을 겪게 된 거니 누구를 탓하기 전에 가장 먼저, 오랜 타성에 젖어 안일하게 하루하루 일 년 일 년을 보내고 있던 제 스스로를 돌아보고 있답니다.
처음의 충격에서 벗어나서, 지금은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여전히 새벽에 자주 깨고, 머릿속에 생각이 많고, 물론 당연히 나이 50 넘어서 새 출발을 해야 하는 상황이 낯설고 두렵고 합니다만, 오히려 차라리 더 나이 먹기 전에 정신 차리고 살 수 있도록 주어진 기회라고 생각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미래를 준비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덕분에 늘 생각만 하던 브런치에 글쓰기도 이렇게 시작하게 되었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