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영어도 힘든데 수입산 영어까지...
제가 살고 있는 샌디에이고에서 20마일 정도 북쪽으로 5번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가면 오션사이드 (Oceanside)라는 아름다운 해변 도시가 나옵니다. 얼마 전에 저희 회사 동부 쪽 사무실에서 출장 온 양반들이 이곳에서 식사를 한다고 하길래, 코로나도 좀 잠잠해졌고 (이때는 델타 바이러스가 이렇게 크게 문제 되기 전입니다) 오랜만에 이야기도 할 겸해서 저녁을 같이 했습니다. 저도 그 지역이 낯설어서 잘 모르는데 이 양반들이 인터넷 검색으로 평이 좋은 식당을 찾아냈더군요.
"French Inspired Mexican Bistro", 즉 프랑스의 영감을 받은 멕시코 식당이라는 의미인데 이곳 메뉴는 나중에 다른 글에서 소개를 할 기회가 있을 테니 음식은 넘어가고요, 문제는 이 식당의 이름입니다. Carte Blanche Bistro & Bar가 이 식당의 이름인데 Bistro & Bar야 뭐 그렇다 치고, 앞의 두 단어는, 한국에서 살 때 캐주얼 브랜드로 저에게는 아주 친숙한 이름이라서 반갑더군요.
캐주얼 브랜드의 이름인 카르트 블랑슈는, 사실 프랑스어로도 그렇게 발음하는 것이 맞지만 물론 프랑스어 특유의 목에 가시가 걸린 r 발음이 중간에 있어서 약간 더 "캌트 블랑슈"처럼 들립니다. Carte는 카드이고 Blanche는 하얗다 혹은 비어있다는 뜻이니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는 카드에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쓸 수 있다는 의미에서 백지수표, 전권 위임이라는 뜻도 있고, 따라서 캐주얼 의류 브랜드로서는 당신의 패션을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의미이고, 식당의 이름으로 쓴 것은, 아마도 짐작컨대 당신의 입맛을 책임지겠다는 당찬 선언이겠지요.
문제는 그 식사를 한 다음날 사무실에 출근했다가, 다른 직원이랑 그 이야기가 나와서 식당 이름을 이야기하는데 이 친구가 전~혀 못 알아듣더군요. 제가 비록 수십 년 전에 대학 신입생 시절 프랑스어를 2학기 동안 배웠다고는 하지만, 카르트 블랑슈를 프랑스 식으로 정확하게 발음할 정도로 기억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 미국 사람들이 과연 프랑스식 발음을 알아들을까도 의문이지요.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제가 알고 있는 한국식 카르트 블랑슈를 미국식으로 살짝 굴려서 이야기해봤는데 여전히 못 알아듣더군요. 왜, 느낌이 있잖아요? 진짜로 그 식당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제 발음이 희한해서 못 알아듣는 건지. 물론 식당을 모를 수도 있지만, 그 친구의 얼굴에 떠오른 묘한 표정을 보고 제가 든 생각은, 이 친구가 방금 내가 말한 영어 자체를 못 알아들었구나였습니다.
궁금해서 검색을 해 보니 미국식으로도 카르트 블랑슈가 맞긴 합니다. 그런데도 못 알아들은 이유를 따져보니, 한국어와 영어의 음절 차이, 그리고 그에 따른 액센트와 인토네이션입니다. 한국어는 장음과 단음은 있어도 악센트와 인토네이션이 풍부한 단어는 아니잖아요, 특히 서울에서 자라서 표준말을 하는 사람들 에게는요. 그래서 영어를 할 때도 한국말하듯이 그냥 평이하게 영어 단어를 늘어놓으면, 발음 자체는 매우 정확해도 미국 사람들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영어 발음의 우스개 소리로 잘 나오는 오렌지라는 말을 아무리 정확하게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발음해도 못 알아듣습니다. 첫음절인 "오"를 강하고 길게 발음해주고, 뒤의 "렌지"를 대충 뭉개어서 한 글자처럼 발음해야 알아듣죠. 더 신기한 것은 밀크입니다. 이렇게 짧은 단어를 또박또박 밀크라고 발음해도 잘 못 알아듣습니다. 오히려 약간 "미역"이라는 발음을 하나의 글자처럼 모아서 발음하면 비슷하게 들립니다. 이건 우리말과 영어 사이에 음절을 세는 방식이 달라서 그런 건데, 밀크는 우리말에서 음절이 두 개지만 영어에서는 모음 소리가 하나만 들어있는 한 음절 단어입니다. 오렌지는 우리말로 세 음절이지만 영어로는 "오"가 한 음절, 그리고 "린지"가 한 음절, 그래서 두음 절 단어로 발음되는 차이가 생깁니다.
다시 문제의 그 식당 이름으로 들어가 보죠. 그 캐주얼 의류 브랜드의 이름인 카르트 블랑슈는, 우리말에서 여섯 음절 단어입니다. 미국에서는 이 단어가 몇 음절로 발음이 될까요? 딱 두 음절 단어가 됩니다. Carte라는 단어에서 실제 소리가 나는 모음은 a 하나이니 한 음절, Blanche에서도 실제로 소리가 나는 모음은 a 하나이므로 또 한 음절, 이렇게 딸랑 두음 절이고, 두 번째 문제는 여기서 강세가 앞이 아니고 뒤쪽의 블랑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제가 카.르.트 블.랑.슈라고 참으로 정직하게 또박또박 발음했고, 블랑슈보다는 앞의 된소리인 카르트를 살짝 세게 발음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미국 사람으로서는 못 알아듣는 발음이 된 겁니다. 아, 물론 정말로 그 식당을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제가 한 발음의 스펠링을 이 미국 친구가 아예 생각해내지 못했을 거라는 거죠.
미국은 다양한 인종의 용광로라고 합니다. 다양한 국적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본인들의 문화를 들고 미국에 이민을 와서 살고 있지요. 물론 영국의 식민지였던 역사에 맞게 처음에는 영국이나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등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에서 온 이민자들이 많았겠습니다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민을 와서 섞여 살면서 이민자들의 문화와 함께 그들이 쓰던 말들도 같이 들어왔을 겁니다. 혹은 국제화의 조류에 맞추어 해외 상품이나 음식이 수입이 되면서, 외래어도 많이 유입이 되었겠지요.
이 현상이 물론 우리나라에도 당연히 있습니다. 저희는 해외 이민자들이 그렇게 많이 들어와서 사는 나라는 아니지만, 국제화의 물결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따라서 외래어가 많이 들어오는데, 미국과는 상황이 좀 다른 것이, 저희는 한글이라는 고유의 문자가 있고, 따라서 어떤 외래어라도 우리의 글자로 표현을 해야 하니, 나라에서 정한 표준 외래어 표기법이던 아니면 인터넷에서 많이들 사용하는 법이던, 하여튼 뭔가를 새로 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같은 라틴문자 (영어 알파벳)을 쓰는 문화권의 말들은 그냥 들어온다는 거죠. 다른 나라의 경우 문자는 공유하더라도 말은 다르게 하므로 발음이 다른 게 되어야 하는 건데, 뭐 좀 이상한 스펠링이긴 하지만 하여튼 글자는 영어와 거의 같으므로, 많은 미국 사람들이 이를 본인들이 해석한 식으로 발음을 하게 되고, 그게 굳어지면 그 말의 미국식 발음으로 통용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까르트 블랑슈는 사실 원래 발음에 매우 유사하다고 봐야 합니다. 프랑스의 수도 이름인 Paris는 영어로는 파리스라고 발음하지만 프랑스에서 마지막에 오는 s는 묵음이므로 프랑스 사람들은 "팤리"라고 발음합니다. 그 가운데 r 자의 가시 걸린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서 좀 웃기게 적었습니다만, 우리가 파리라고 적는 것이 원래 표현에 더 가까운 거죠.
빵의 한 종류인 크로아상 (Croissant)은 영어로 두 음절 단어이고 "크러.산트" 뭐 이런 식으로 발음됩니다. 제가 얼마 전에 여행 갈 때 아침을 호텔 식당에서 주문한 적이 있는데 저는 제가 아는 식으로 크로아상이라고 발음했고, 다행히 알아듣더군요. 발음도 비슷하고 결국은 빵 종류를 고르는 주문이었으니 못 알아듣는 게 더 이상하긴 합니다만. 참고로 국립 국어원의 규범 표기에 따르면 '크루아상'이 맞고, 프랑스의 발음도, 물론 중간에 가시 걸린 r 발음이 있지만 그런 식으로 발음합니다. 근데 미국 사람들은 마지막 t 발음까지 알뜰하게 하는 미국식 발음으로 하죠.
주요리 전에 나오는 전채요리를 뜻하는 hors-d'oeuvre는 프랑스에서 "오 더브아" 뭐 이런 식으로 발음하는데 미국에서는 "오 더브"라고 하고요, 막다른 골목 혹은 자루의 밑바닥을 뜻하는 cul-de-sac은 프랑스에서는 "쿧삭" 이렇게 들리는데 미국식으로는 "컬.디.색" 요렇게 매우 다른 발음이 됩니다. 얼마 전에 화재사고가 났던 파리에 있는 대 성당의 이름은 Notre Dame de Paris이고 "노트렄 담" 뭐 이런 식으로 발음되는데, 미국 인디애나에 있는 명문 사립대학인 University of Notre Dame은 발음은 "노터 댐" 이렇게 들립니다.
이런 예는 매우 많습니다만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제가 미국에 살면서 미국 사람들이랑 의사소통을 하려면 당연히 미국식의 발음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제 쥐꼬리만 한 프랑스어 지식을 갖고 가시 걸린 R 발음을 하거나, 프랑스어에서 묵음이라고 어떤 철자는 발음하지 않거나 하면, 가뜩이나 그냥 영어도 한국식으로 강세와 인토네이션 없이 밋밋하게 하는 제 말을 더욱 못 알아들어서,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될 테니까요. 그러니까, 미국에 들어온 외래어의 원래 발음 말고, 미국식 발음도 잘 외워서 해야 한다는 거죠. 그냥 영어만 하기도 바쁜데...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