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tack, attack, attack. Never Defend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Get Me Roger Stone”을 얼마 전에 봤습니다.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면 “로저 스톤 불러와” 정도의 의미가 되겠죠. 이 양반이 다큐멘터리 초반에 본인을 설명하는 말이 “I am agent provocateur.”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이나 발음에 대해서는 이 문서(https://www.facebook.com/kkeutsori/posts/3344990438949112/)에 잘 소개되어있습니다만, 선동꾼 정도의 의미로 해석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다큐멘터리 내내 나오는 주제인 스톤의 법칙(Stone’s Rule), 즉 본인과 비슷한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알면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스스로 자기의 이름을 붙인 법칙을 설명하면서 영화가 시작합니다. 첫 번째로 나오는 법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It’s better to be infamous than never to be famous at all.” (악명이라도 있는 것이 듣보잡보다 낫다)
이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거에서 이기는 전략을 구사하는 악명 높은 보수 정치 컨설턴트이자 로비스트입니다. 다큐 초반에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 양반의 정가에서의 평판을 설명하면서 더러운 협잡꾼(dirty trickster)이라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는 장면도 있고요, 그다음에는 어떤 뉴스 인터뷰에서 세간의 평판을 전하면서 “a state-of-the-art sleazeball”이나 “a little rat”등 우리말로 번역도 쉽지 않은 양아치나 사기꾼 등의 이미지를 설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거기에 대해서 이 양반 본인의 반응은, 법을 어기지 않는 한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것이 괜찮다고 믿는다는 것이고요. 다큐 중반에도, 본인의 협잡꾼 이미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이미 그렇게 이미지가 굳어진 것이니 뭐 이대로 쭉 가는 것도 괜찮겠다면서, 이렇게 구설수에 오르는 것보다 더 안 좋은 것은 아예 (잊혀서) 이야기조차 안 나오는 것이라고 답을 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꼰대 관종의 궁극의 버전이라고 볼 수도... ^^
1952년생으로 1972년 조지 워싱턴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청년 공화당원 클럽에서의 미팅을 인연으로 그해 리처드 닉슨의 재선을 위한 캠페인에 합류하면서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그 캠페인에 합류하자마자 벌인 정치 공작이, 공화당의 대선 경쟁 후보에게 청년 사회주의 연합의 이름으로 기부금을 냄으로써 낙마를 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리처드 닉슨은 1969년부터 미국의 37대 대통령을 지냈고, 재선에 성공한 이후인 1974년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스스로 사임한 미국의 유일한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닉슨의 재선 캠프에서 민주당 전국위원회의 사무실이 있던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호텔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다가 발각되면서 일이 커진 스캔들을 말합니다. 이 사건은 여러 가지 면에서 특이한 점들이 많아서 그 후로도 계속 이야깃거리가 되는데, 우선 닉슨 대통령의 지지율이 이미 재선이 거의 확실할 정도로 격차가 벌어졌기 때문에 이렇게 무리수를 두면서, 게다가 별로 대단한 정보도 없는 민주당 전국위원회의 사무실에 도청장치까지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1972년 대선에서 닉슨 대통령은 득표율 60%, 선거인단 538표 중 520표를 쓸어 담는 압승을 거두기도 했고요.
대선 과정에서 벌어진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선거가 끝난 후에도 워싱턴 포스트의 집요한 취재와 사법 절차로 계속 이어지고, 이를 무마하려는 닉슨의 권련 남용과 계속 이어진 거짓말, 그리고 결정적으로 청문회에서 터진 증언에 나왔던, 대통령 집무실에 존재한다는, 닉슨이 수사 방해를 직접 지시하는 녹음 등으로 결국은 의회에서 탄핵 가결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사임을 한 사건입니다. 도청 자체보다도 계속 이어진 거짓말과 수사를 방해한 증거가 밝혀지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로저 스톤은, 워터게이트 사건의 조사에 소환된 가장 젊은 관련자가 되었습니다. 닉슨 재선 캠프에서 정치 공작을 하면서 만든 지출 내역에 로저 스톤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죠. 워낙 어려서 그냥 심부름이나 한 정도였다고 하지만, 본인은 아주 자랑스러워하는 경력이랍니다. 워터게이트 베테랑이라면서요.
로저 스톤은 리처드 닉슨의 열렬한 팬입니다. 자기 사무실에 리처드 닉슨 관련 물품을 사방에 전시하고, 등에 닉슨 대통령의 얼굴 문신이 있습니다. 닉슨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 스타일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젠하워 시절부터의 전통인 점잖고 정직한 스타일의 정치를 하던 공화당이 결정적으로 바뀌게 된 계기 중의 하나가 로저 스톤이 공화당 청년위원회 의장이 되면서,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진흙탕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젊은 우익들의 스타일로 진화를 해 나가게 되는 거죠. 여기서 스톤의 법칙이 또 나옵니다: “Attack, attack, attack. Never Defend” (공격만이 살길이다. 수비는 필요 없다.)
스톤이 공화당 청년 의장을 맡으면서 만든 단체가 NCPAC (National Conservative Political Action Committee: 전국 보수 정치 행동 협의회)인데,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 흑색선전을 후원하는 단체입니다. 이 단체가 아주 참신했던 것은, 정치 자금법에 의해서 후보자를 직접 후원하는 것에는 한도액이 있지만, 후보자와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광고를 집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제한액이 없다는 허점을 이용했다는 점입니다. 사실이 아닌 의혹과 추측을 갖고 온갖 흑색선전과 정치 공세를 퍼부어서 공화당의 선거 승리에 기여를 하면서 로저 스톤의 명성이 하늘을 치솟게 됩니다. 이 기구의 핵심 관계자가 한 인터뷰에, 우리의 시스템을 계속 발전시키면 나중에는 미키 마우스라도 연방 의원으로 당선시킬 수 있다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상대방을 난도질하고 불태워버리는 (slash-and-burn) 일도 서슴지 않으며, 대중의 관심을 얻고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어떤 치사한 짓도 승리를 위한 전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죠. 실제로 많은 효과를 봤기에 자신감도 대단했고요.
로저 스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에서 케네디와 닉슨의 모의 선거가 있었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공화당원이긴 했지만 가톨릭 신자로서 케니디를 응원했고, 스톤은 당시 학교의 카페테리아에서 친구들에게 ‘닉슨이 대통령이 되면 토요일에도 학교를 가야 하게 될 거라’는 헛소문을 퍼트립니다. 당시 지역 신문의 예상과 달리 민주당의 케네디가 이 모의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처음으로 “disinformation”, 즉 대중의 의견을 호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된 정보의 힘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두 번째 스톤의 법칙이 나옵니다: Past is fucking prologue (과거를 보면 답이 나온다)
공화당의 영건으로 승승장구하던 스톤은, 레이건의 1980년 선거를 지원하기 위해서 뉴욕에 파견을 갔다가 로이 콘(Roy Cohn)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은 “로이 콘: 악마의 변호사(Where’s My Roy Cohn)”라는 다큐멘터리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저널리스트이며 트럼프와 줄리아니 전 시장에 대한 평전을 쓴 것으로 유명한 웨인 바렛은, 로이 콘에 대해서 ‘자기가 평생 기사를 써본 인물들 가운데 가장 사악한 인간이라고 평했고, 이런 인간에 끌리는 로저 스톤 같은 사람들은 영혼이 없는 것이라고 혹평을 했죠. 본인이 리처드 닉슨이나 로이 콘과 같은 사람들과 친구로 지내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로저 스톤은 아주 간단하게 두 마디의 대답을 합니다: “fuck’em” (엿이나 먹어라)
로이 콘은 도널드 트럼프의 변호사였고, 로저 스톤을 트럼프에게 소개해줬습니다. 그렇게 80년도 초부터 트럼프는 스톤이 차린 로비 회사의 고객이 됩니다. 다큐멘터리는 여기서 또 다른 스톤의 법칙을 보여줍니다: “Business is business”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일 뿐.) 1980년 대선에서 레이건의 캠페인에 깊숙이 관여한 스톤은 정부에 들어가서 핵심 요직을 맡는 대신 정치 컨설팅 및 로비 회사를 차리고 아주 잘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전까지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비즈니스였던 워싱턴의 로비 업계에서 스톤과 그 파트너들이 차린 회사는 아주 당당하게 본인들의 공화당과 레이건 행정부 인맥을 동원해서 대놓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이를 통해서 돈을 긁어모으고 있던 거죠. 이 양반이 TV 인터뷰에서 자기 컨설팅 회사의 역할은 외국의 정부나 회사 혹은 개인들에게 워싱턴 정가가 돌아가는 방식에 대한 뛰어난 식견을 제공하는 서비스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합니다.
한국에는 이런 비즈니스가 아직까지 없는데, 미국에서도 음지에서 활동하던 정치 컨설팅 및 로비스트 비즈니스를 로저 스톤이 양지로 끌어내고, 정치인을 당선시킨 후에 그에 대한 영향력을 이용해서 대놓고 돈을 버는 일을 미국 현대 정치의 일부분으로 만들어낸 인물이라는 평도 있습니다. 미국의 정치 드라마를 많이 보신 분은 익숙한 장면이지만, 예를 들어서 아프리카의 부패한 독재자가 워싱턴의 로비스트를 통해서 미국의 대통령을 만남으로써 독재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하는 장면들 있잖아요? 돈으로 움직이는 미국 정치의 추악한 면을 보여주지만, 이에 대해서도 로저 스톤은 아주 당당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자유의 투사도 다른 사람이 보면 테러리스트라고 할 수도 있다.” 로저 스톤은 본인이 그 컨설팅 회사 (Black, Manafort & Stone)에서 한 일에 대해서 아주 자랑스럽다고 합니다. 돈을 어마어마하게 벌었고, 그 과정에서 불법적이거나 부도덕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거죠.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게임을 했고, 규칙이 바뀌면 플레이의 방식을 바꾸면 되는 거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여기까지가 대략 한 시간 반이 넘는 이 자극적인 다큐멘터리의 30분 정도까지의 진행입니다. 그 후로 도널드 트럼프와 같이 일을 하고 2016년 대선에 깊숙이 관여해서 특유의 진흙탕 싸움으로 힐러리 클린턴을 무너뜨리고 트럼프의 당선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과정이 나오게 됩니다. 처음에는 한번 쭉 봤고, 이 글을 쓰면서 중간중간 멈추면서 한번 더 봤는데, 참으로 입맛을 쓰게 만드는 다큐 영화입니다. 이 사람의 언행과 사상 그리고 그에 따르는 행동을 보면 한마디로 ‘도덕성 따위는 개나 줘버려’ 스타일입니다. 오히려 도덕과 윤리를 따지는 것을 나약함의 표출로 보는 듯합니다. 자기 보고 영혼도 없고 원칙도 없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병신 같은 루저들이라고 경멸합니다. 자기가 여태까지 해 왔던 일들은, 본인이 옳다고 믿는 아이디어와 정치 철학들이 승리해서 정부를 장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랍니다. 이 말을 들으면, 이 다큐멘터리의 첫 부분에, 로저 스톤은 포레스트 검프의 사악한 버전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확 와닿습니다.
저는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처럼 정치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먹고살기 바빠서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고, 정치인들 하는 짓을 보면 관심을 갖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었죠. 다만 그래도 투표는 해야 하고, 깊은 관심은 없고, 해서 그나마 나름의 기준을 세운 것이 도덕성이었습니다. 물론 세상에 흠없이 완벽한 사람은 없을 테니 그것도 상대적이겠지요. 깊이 들어가서 하나하나 털어보면 세상을 살면서 편법도 썼을 것이고 옳지 않은 일에도 휩쓸렸었겠죠. 하지만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큰 흐름에서 보고, 해 왔던 일들의 줄기를 보면 대충 그 사람의 인성이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그 사람의 경력에서 보이는 도덕성, 그리고 성공 여부를 떠나서 옳은 일을 하고자 하는 선한 의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나약한 루저들의 변명일 뿐이고, 일단 정치권력을 잡고 자기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상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진흙탕을 구르다가 등 뒤에 칼을 꽂아야 한다는, 그리고 그렇게 해서 실제로 몇 명의 미 합중국 대통령을 당선시키는데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꼰대 정치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매우 불편하게 제 이마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는 느낌입니다.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비전은 안 보이고, 온갖 가족들의 스캔들만 판을 치고 있는 한국의 대선 뉴스들을 보면 우리나라도 그런 면에서 정치 선진국 미국의 뒤를 따르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 어느 방송에서 여론조사 전문가가 나와서, 이번 대선은 이미 진보와 보수로 마음이 정해져 있는 사람들 말고,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한 MZ 세대 (1981 ~ 2010년생)의 표가 좌우할 거라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리고 이 젊은 친구들은 정치적인 이념이 아니라 이익에 따라서 투표를 하는 세대라고 하고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행동을 비난할 생각도 없고요. 이 다큐 영화의 앞부분에, 로저 스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대부분의 단순한 유권자들이 엔터테인먼트와 정치를 구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정치는 못생긴 사람들을 위한 쇼 비즈니스일 뿐이다.”
물론 다큐멘터리 영화 초반에 나온 이 코멘트는, 트럼프가 어떤 리얼리티 예능 프로에 나와서 보이는 모습이, 그가 훌륭한 대통령 감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강조하기 위해서 로저 스톤이 한 말이긴 합니다. 하지만 전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영화 내부자들의 그 유명한 “대중들은 개 돼지입니다”라는 대사가 떠오르더군요. 내가 사랑하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음으로써, 국민을 개 돼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국회의원이 돼서 국민을 희롱하고 특권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에 일조하고 있는 걸까? 내가 유일하게 갖고 있는 괜찮은 정치인을 판단하는 기준인 도덕성과 선한 의지는, 정말로 나약한 루저들이 게임에서 이기지 못하니까 하는 변명에 불과한 것일까? 사람들은 정말로 엔터테인먼트 쇼와 정치를 구분하지 못할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