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다 지나가리니
오늘이 크리스마스이고 아들 녀석 입대 날짜가 12월 27일이니 이제 정말 내일모레면 군대를 가네요. 진즉에 6월에 한국에 들어갔으니 놀만큼 놀았을 겁니다. 코로나 사태로 제약은 많았겠지만 그래도 볼 사람은 다 봤고, 이제는 갈 때도 됐지요. 집사람은 얼마 전에 들어가서 한참 석별의 정을 나누고 있고, 월요일에 포항까지 따라가서 잘 보내고 1월에 미국에 돌아올 겁니다.
갑자기 청년이 되어버린 아들과 대화를 하는 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저도 대학생 때 자취하다가 오랜만에 아버지 만나면 같이 밥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그때마다 어색했거든요.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 궁금하네요.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아니니 마냥 아버지 말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친구처럼 대할 수도 없죠. 별로 해준 것도 없는데 알아서 쑥쑥 자라니 대견한 마음도 있지만, 가끔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세상 물정 모르는 게 눈에 보여서 불안하기도 했을 겁니다. 속마음을 내보이는 분이 아니라서 짐작만 할 뿐입니다.
내일모레 군대 간다고 불안해하고 있을 아들에게, 요즈음 대한민국의 군대를 잘 모르는 제가 섣불리 조언을 해주기가 망설여졌습니다. 부모 자식 관계이니 괜찮을 수도 있습니다. 꼰대 부장이 “나 때는 말이야…”라면서 신입 사원을 훈계하는 거랑은 다를 테니까요. 제가 군대를 다녀온 것이 워낙 옛날이야기라서 잘못된 선입견을 줄까 고민이 되더라고요. 30년이 넘었어도 군대라는 것이 워낙 일반 사회와 동떨어진 곳이고 특유의 문화나 이를 대하는 자세는 비슷하지 않을까 해서 조심스럽게 몇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가장 먼저 해 준 이야기는 18개월의 군대 생활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제가 군 생활하면서 힘든 훈련을 할 때마다 중대장님이 여러 번 해준 이야기가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입니다. 말이야 쉽지 정말 몸과 마음이 힘들면 즐길 여유가 어디 있습니까, 욕만 나오지. 그래도 자꾸 반복해서 듣다 보니 도움이 된 면이 있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다 그런 면이 있지요. 같은 일이라도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에 따라서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그렇게 되고,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면 또 거기서 건질 것이 있잖아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제가 옛날에 들을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아들한테 들려주기엔 너무 옛날 스타일인 것 같아서 그렇게 직접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의 남성으로서 병역의 의무를 마치기로 했으면,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니 너무 인상 쓰지 말고 가능하면 긍정적인 마음으로 지내라고 했습니다. 사회에서 오랜 시간 격리되어 남의 명령을 들으며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은, 군대 아니면 하기 힘든 경험입니다. 취직을 하거나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할 때도 비슷한 상황이 있을 수는 있지만, 정 힘들면 관두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옵션이 없다는 것이 군대 생활의 매력 아니겠습니까?
막상 겪어보면, 18개월이던 30개월이던 시간은 흘러가게 마련입니다. 옛날 군대에 유명한 말이 있죠: “내가 아무리 굴러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 서양에서는, 오래전에 한 술탄이 현자인 솔로몬 왕에게, 반지에 새길 수 있도록,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을 좋은 글귀를 내려달라고 했을 때 솔로몬 왕이 했다고 전해지는 “This too will pass away(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이 있고, 링컨 대통령이 이 말을 연설문에서 인용하면서 다시 한번 기록에 남아 유명해졌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힘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들 녀석이 살아온 세월이 그리 길지 않지만 나름 힘든 일도 있고 좌절도 겪고 했겠지요. 이번에 군에 입대하는 것도, 아마 굉장히 힘든 경험이 될 겁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더 힘든 시간이 되겠지만, 이 또한 다 지나가는 인생의 여정에 한 추억이 된다는 것은, 앞으로 살면서 큰 도움이 될 교훈을 몸으로 느끼는 시간이기도 할 겁니다. 이 경험이 약간의 면역 효과도 있기를 기대합니다. 살면서 벌어지는 납득할 수 없는 일들, 부조리와 불합리한 일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의 벽 등등에 대해 좀 더 의연하게 대처하는 연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힘든 일을 만났을 때 그냥 주저앉아 시간만 보내라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든 그 일에서 의미와 유용함을 찾는 자세를 배웠으면 합니다.
싫든 좋든 정해진 기간을 복무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커다란 족쇄이지만 이를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평소에 내가 갖고 있는 선택의 권리라는 것이 얼마나 큰 혜택인지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제가 한 가지 더 당부한 것은, 제발 그 초심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직 입대도 안 한 녀석에게 초심을 잃지 말라는 당부가 너무 앞서 나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요즘 군대는 가혹행위도 없어졌고, 메신저도 꽤 자유롭게 사용을 할 수 있어서 예전만큼 힘들지는 않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군대는 그래도 군대죠. 내 선택의 자유를 구속당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처음에 군생활을 시작해서 한참 힘들어지면, 사회에서 내가 누리던 수많은 권리들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늘 내 곁에 있어서 당연히 누리던 것들이 없어지면 그 소중함을 더 느끼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크게 아파보고 나서야 정신 차리고 운동을 시작하는 것도 그렇고, 치아가 다 망가져서야 치과를 다니고 양치를 부지런히 하는 것도 그렇고, 회사에서 해고를 당해봐야 매일매일 출근하는 직장의 소중함을 아는 것도 비슷하죠. 하지만 솔로몬 왕의 충고와 같이, 이 또한 다 지나가게 됩니다. 다시 건강을 찾고 이도 덜 아프고, 새로운 직장을 들어가고, 이러면 또 이 상황에 익숙해지고, 그 힘든 시절을 잊고 좋지 않은 습관을 반복하는 쳇바퀴에 빠지는 일이 많습니다. 군대 생활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처음에 힘들 때, 사회에서 누리던 것들을 고마워하던 마음은 군생활이 점점 익숙해지고, 계급이 올라가면서 껌에서 단물 빠지듯 스르륵 빠져나가기 시작합니다. 힘든 일병, 상병 시절에, 나는 사회에 나가면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리라던 굳은 결심은, 병장 생활 몇 달 만에 흐물 흐물해집니다. 아직 군생활 시작도 안 한 아들 녀석한테 초심을 이야기한 것은, 30년 전 비슷한 일을 겪은 아버지로서의 오지랖이긴 합니다만 저보다는 나은 자식을 바라는 우리의 유전자에 내재된 인류의 본능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요즘 군대가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부대마다 상황도 조금씩 다르고, 아무리 그래도 군대로서 지켜야 될 군기와 보안, 그리고 이런저런 제약이 있을 겁니다. 제일 걱정되는 것이, 여태까지 힘들게 공부한 것을 군생활하면서 다 깨끗이 잊어먹고 올까 하는 것입니다. 3년을 쉬었던 저는 정말로 머릿속이 새하얀 백지와 같이 리셋되는 놀라운 경험을 했거든요. 다행히 1학년 마치고 본격적으로 전공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군대를 다녀와서, 복학하기 전에 열심히 준비하고 복학해서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들 녀석은 비록 커뮤니티 컬리지의 Associate Degree이긴 하지만 전공과목까지 포함해서 2년의 공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졸업장까지 받았거든요. 다시 미국에 돌아와서 공부를 계속하던 취업을 시도하던, 2년의 공백기는 큰 핸디캡이 될 겁니다. 훈련 잘 마치고, 자대 배치받고 나서, 분위기 봐서 연락하면 공부할 수 있는 책이나 자료를 보내준다고는 했는데,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고, 이 또한 스스로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겁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다치지 말고 건강하게 다녀오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한겨울이라 바다에 빠뜨려도 아마 상태 봐 가면서 훈련 강도를 조절할 거라고 이야기를 해 줬습니다. 이 녀석이 그러더군요, “설마 이렇게 한겨울에 훈련하는데 바다에 넣겠어? 동상 걸릴지도 모르는데?” 사실 저도 모릅니다. 해병대 군기가 빡세다고 하지만, 이 녀석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 훈련도 중요하지만, 너무 심하게 하다가 사고가 나는 것은 어떤 부대의 지휘관도 꼭 피해야 할 일이니까요. 하지만 반면에 이 녀석이 대한민국 군대를 너무 물렁하게 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춥다고 물에 안 넣고 덥다고 산에 안 올리면 그게 군대냐, 캠핑이지?”라는 생각을 속으로만 했습니다. ^^;
낼모레 포항 가면 훈련소 입대하기 전에 영상통화 한번 하자고 했습니다. 까까머리 보면 좀 울컥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얼굴 보면서 따뜻하게 한마디 해 주고 싶어서요. “자랑스럽다 아들, 건강하게 훈련 잘 받고 더 멋진 남자가 돼서 다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