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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Dec 22. 2022

두발자전거

 올해 초, 예상보다 훨씬 길어진 상담을 끝냈다. 퉁퉁 부은 눈으로 상담실 문을 두드렸던 어느 봄날을 시작으로 장장 4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진행된 상담이었다. 선생님과 나는 백 번은 족히 넘을 정도로 아주 여러 번 만났다. 다시 상담을 받고 싶어지는 때가 오면 언제든 다시 연락하기로 했지만 일단은 길고 길었던 한 시절을 졸업했다.


 내가 경험한 종결에는 숱한 예고편이 있었다. 가장 처음 선생님이 처음 종결이라는 단어를 꺼낸 그 날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런가 하면 어떤 날에는 내가 먼저 여유를 보이며 종결을 말하기도 했다. 예상보다 상황이 나빠져 종결이 무산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졌을 때에는 이번에는 정말 마지막이라는 감이 왔다. 그때의 우리는 마치 ‘종결식’이라는 행사를 준비하는 팀원처럼 움직였다. 가장 적합한 때를 고르고 식순과 내용을 고민하며 멋진 마무리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 모든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내게 주어진 건 다름 아닌 이별을 준비하기에 충분한, 너무나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별하기 전과 후로 시간을 두 동강 내듯이 잘라버리는 이별이 익숙했던 나였다. 그런 나에게, 이별을 연습하고 이별을 향해 희망차게 걸어나가는 모든 과정은 낯설지만 참으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당도한 이별의 날 우리는 주어진 한 시간을 온전히 이별을 위한 시간으로 보냈다. 지나간 일들보다는 지금 느껴지는 복잡하고도 후련한 심정과 종결 이후의 계획 같은 것에 대해 얘기했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땐 만날 때보다도 반갑게 헤어졌다. 마치 다음주에도 이곳에서 만나기라도 할 것처럼. 오늘 이별하는 게 아닌 것처럼.


 하지만 웃으면서 하는 이별이라도 이별은 이별이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종결을 준비하는 내내 선생님은 너무나도 괜찮아 보였다. 그런 선생님과는 달리 나는 이별만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져 매번 상담실 티슈에 얼굴을 묻었다. 나도 짐짓 의연하게 선생님을 대하고 싶었지만 나를 대신해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 앞에서는 어떤 척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것이, 그래서 그를 좋아하게 되었음을 어쩔 수 없이 들켜 버리고야 마는 것이 부끄러웠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려고 차분한 시선으로 있지도 않은 평정을 연기했다. 하지만 마음을 감추려고 할수록 내 마음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떨림까지도 전부 들키는 것만 같았다. 선생님은 그런 내게서 어떤 것도 간파하거나 해석하려 하지 않고 그저 고요하게 바라보실 뿐이었다. 4년 동안 늘 그래왔듯이 말이다.


 당시의 나는 선생님이 없는 삶을 상상하기 버거웠던 것 같다. 가족이나 친구, 애인한테는 말하지 못할 얘기들도 선생님께는 할 수 있었다. 종결 이후가 걱정되었던 나는 마치 각오를 하듯, 어린 시절 두발 자전거 타기를 연습하던 기억을 종종 떠올렸다. 그때의 나는 손을 떼지 말아달라고 엄마에게 신신당부를 하던 겁이 많은 아이였는데 나의 기대와는 달리 엄마는 번번이 나를 배신했다. 하지만 늘 넘어진 나를 일으켜 세우고 다시 뒤에 섰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을 연습했을 무렵 드디어 자전거 타기에 성공했다. 그 한 달의 시간 동안 내가 배운 건 자전거타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누군가 뒤에서 나를 잡아주고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의 힘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엄마가 잡아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페달을 힘차게 밟을 수 있었고 넘어지는 것도 두렵지 않았으니 말이다.  


 벌써 연말이다. 상담을 종결하고도 벌써 1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다행히도 지금의 나는 선생님이 내게 해줬던 것들 중 몇 가지를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게 되었다. 애썼다고 말해주기. 우는 내게 안쓰럽다고 말해주기. 잘한 일은 칭찬해 주고 잘 된 일은 축하해 주기. 날 선 모습 뒤에 숨어 거절 당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나를 기다려 주기. 늘 나의 맞은 편에서 선생님께서 해주시던 것들인데 이제 그 자리에는 내가 앉아 있다. 그의 부재 속에서 그가 남긴 것들을 돌아본다. 그리고 그것들을 그러모아 나 자신에게 서툴게 건네어 보는 것이다.


 선생님의 손을 떠난 나의 자전거는 여전히 달리다가 여기저기에 부딪히고 넘어지기 일쑤다. 여전히 내 운전은 서툴고 나만큼이나 서툰 다른 운전자들과 부딪히기도 한다. 그러다 언젠가는 예상치 못한 고난도 코스를 만나 꼼짝도 못하는 날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겁먹은 나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잠시 내려서 걸어가도 괜찮다고. 힘들면 잠시 쉬어가도 된다고. 하지만 정 달려보겠다면 얼마든 달리고 얼마든 넘어지라고. 널 일으켜 줄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두발자전거> / 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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