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1일, 스물 다섯 번째 생일을 하루 앞두고 급작스레 고향에 내려갔다.
반나절도 채 안 되어 다시 서울로 올라왔고 그날부터 ‘은조’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3년 남짓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름을 바꾼 이유를 묻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그럴 때면 두꺼운 실타래를 손에 쥐게 되는 심정이었지만 질문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나의 새 이름을 연기 활동을 위해 지은 예명쯤으로 생각했고, 아예 개명을 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조금 놀라기는 해도 이전 이름이 워낙 흔한 이름이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곤 했다. 실은, 이름을 바꾼 데에는 툭 내뱉기 어려운 나름의 복잡한 이유가 있었다. 짧게 말하자면 나는 이름을 스스로 짓고 싶었고, 그리하여 내 이름이 가진 결과 뜻을 자주 되새기며 순간 순간을 충실히 쌓아가는 삶을 살고 싶었다.
이름에 대해 처음 자의식을 느낀 것이 언제였는지는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초등학교를 다니던 언제쯤이었을텐데 그때로 말할 것 같으면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고 사귀는 일이 매일 같이 일어나는 시기이므로 내 이름을 소개하는 일이 잦았다. 처음 만난 친구에게 “나는 이지은이야.”라는 소개로 나의 존재를 알리던 여느 순간 불현듯 어색함을 느꼈다. “내 이름은 이지은인데 내가 딱히 원한 이름은 아니고 우리 부모님이 나를 이지은이라고 부르기로 했대.”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 의문을 엄마에게 털어놓자 엄마는 내 이름이 친가와 친분이 있는 스님께서 지어주셨다는 얘길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평범해보였던 이름이 심지어 믿지도 않는 불교용어였던 것이다. 게다가 얼굴도 모르는 어느 스님이 나를 보지도 않고 지어준 이름이라니. 그 일련의 과정이 납득도 가지 않을 뿐더러 나와는 아주 동떨어진 일처럼 느껴졌다. 그리하여 몇밤을 고민해 엄마에게 제안할 새로운 이름들을 다이어리에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유력 후보 몇몇은 아직도 기억나는데 그 중 ‘파리’, 그러니까 ‘이파리’라는 이름도 있었다. 물론 매우 진지하게 지은 이름이었다. 결국 돌아온 것은 엄마의 서운한 표정과 아빠에게는 얘기하지 말라는 명령 내지는 당부였다. 그렇게 그 날의 일은 일단락되었다.
꽤 어린 나이에 좌절된 개명의 꿈은 대학에 들어갈 무렵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거기엔 1993년생 가수 아이유의 존재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2011년 초입의 겨울은 아이유가 ‘좋은날’이라는 노래를 발표하며 3단 고음으로 인기의 정점을 찍던 시기였고 공교롭게도 아이유의 본명은 ‘이지은’, 나와 동명이인인 것이었다. 때문에 신입생 환영회나 동아리 모임 자리 등 자기소개와 장기자랑이 세트로 묶여다니던 온갖 자리에서 자기소개는 ‘아이유’라는 호응으로 장기자랑은 ‘3단 고음’이라는 외침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그런 관심이 신기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주목받는 일, 그 중에서도 노래하기는 내겐 아킬레스건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 노래를 시키면 울먹이며 부를 정도로. 고등학교 신입생 모임에서 노래 한 곡을 부르기 위해 운동장에서 며칠을 매일 30분씩 연습해야 했을 정도로. 하지만 노래방이라도 가는 날이면 누군가 나를 위해(?) 아이유의 노래들을 예약했고 마이크는 내게 잘도 넘어오곤 했다. 마이크를 대신 넘겨받아 준 친구들에게 고맙다. 그들이 없을 때는 때로는 부끄러움을 때로는 실망을 견뎌내야 했다. 이런 짓궂은 관심들에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에다 우울증을 앓고 있던 열아홉의 신입생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다른 이름을 갖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또다시 몇년이 흘렀다. 아이유가 음악적으로 변화를 거듭하고 배우로서도 입지를 다져가는 동안 내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취업준비를 시작할 시기에 우연히 접한 연기에 마음이 크게 이끌렸고 연기를 업으로 삼고자 새로운 전공으로 대학원에 들어갔다. 입학 전후로 활동을 하면서 크고 작은 프로덕션에 배우와 스탭으로 이름을 번갈아 올리고 있었기에 나름의 필모그래피도 쌓여가고 있었다. 그렇게 학업과 작업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는 듯 했지만 자주 위태로웠다. 아르바이트와 공연 작업, 대학원 생활을 병행하며 주거비와 생활비 학비 등을 모두 마련하고 미래를 대비한 저축까지 하는 것은 생각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기숙사에 살며 매일 라면을 먹었고 대학원 진학에 대한 회의, 외로움과 싸워나가며 힘겹게 버티다 결국 우울감이 커지고 말았다. 기댈 곳이 필요했는데 소중하게 여기던 관계들도 어그러지고 있었다. 다행히 빠르게 치료를 받았고 심리 상담을 꾸준히 받은 덕에 반년을 넘기진 않았지만 그 반년의 시간이 남긴 마음의 상흔과 충격은 더 오래 지속되었다. 사람에 대한 믿음, 씩씩하게 잘 살 수 있을 거란 희망 같은 자원이 깎여져 나가 회복이 더뎠다.
그 시기를 겨우 통과했을 때는 2017년 겨울 무렵이었다. 대형 프로덕션의 조연출 작업을 막 마쳤을 즈음 연출과에 다니는 친구의 제안으로 장면 하나를 준비해 수업에서 발표하게 되었다. 오랜만의 연기였는데 연습에 가는 길에도 돌아오는 길에도 연기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때 깨달았다. 연기 그 자체는 나를 힘들게 하지 않음을, 아니 연기라는 행위를 내가 못 견디게 좋아함을 실감하고 인정할 수 있었다. 내가 나답다고 느끼던 그 즈음 삶에의 의욕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졌고 모아둔 돈으로 구할 수 있는 방을 알아보았다. 허름한 집이었지만 처음으로 월셋집을 직접 계약했다. 그 곳에서 지낸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날 엄마는 딸이 지내는 곳을 한번 보고 싶다며 서울에 올라왔고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 성인이 되고 난 이후 엄마와 함께 잔 적은 있지만 내가 사는 집에서 함께 자는 일은 처음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새벽 세시쯤 되었을까 잠에서 깬 순간 문득 확신이 들었고 엄마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 자?
아니. 깼어.
나 이름 바꿀래
바꿔. 언제?
내일.
그렇게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다음 날 엄마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 법원에 가 개명 신청을 했다. 이름은 바로 어릴 적 후보로 정해둔 이름 중 원래 이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했다. 내려가는 길에 네이버 한자 사전을 뒤져가며 마음에 드는 한자를 골랐다. 신청서를 내는 순간까지도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렇게 지은 이름이 바로 ‘은조’다. ‘이야기하다 은’ ‘바라보다 조’, 순서를 바꿔 말하면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사람’. 누군가 뜻이 딱 배우 같다고 말했던 이름.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꼭 연기를 할 때뿐 아니라 연기보다도 더 중요한 내 일상 속에서 누군가를 진짜로 바라보고 진짜로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을 듬뿍 담은 이름이다. 외롭고 포기하고 싶은 시기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을 잃고 싶지 않고 사랑하는 일을 놓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지은 이름. 이름을 쓰거나 말할 일이 있을 때마다 뜻을 떠올려보면 속에 단단한 뿌리가 느껴지는 것만 같다. 이름을 바꾸고 나서 밝아진 것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이후로 일이 잘 풀린 것도 기분 탓은 아닌 것 같다. 새로운 이름이지만 원래 내 이름이었던 것 같은 이름과 함께 지금까지도 잘 살고 있다. 앞으로도 굳게 잘 살아보자.
은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