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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Oct 02. 2023

No makeup

결국 나를 사랑한다는 뻔하디 뻔하고 닳디 닳은 말이 나를 양지로 굴러나오게 한다.      


내가 충만해지는 시간들을 떠올려본다.

막 어둑어둑해진 시간에 국도를 타고 서울로 향하며 불이 켜진 식당가를 가볍게 스칠 때.

내게는 풍경으로만 존재하는 어느 시골에서 오래도록 삶을 일궈 온 사람들을 상상할 때.

편의점 매대를 기웃거리다 아무것도 사지 않고 돌아나와 직접 밥을 차려 먹을 때.

매번 다른 크기와 모양으로 충만하다.

그리고 낮잠을 자고 일어나 해질녘 금빛이 집 곳곳을 물들여놓은 광경을 바라볼 때

저항 없이 평안해지고는 한다.

오늘은 주저하지 않고 달려나갔다.      


해가 자신의 빛깔로 온 세상을 물들이는 찰나의 시간.

지금쯤 지하에 있을 친구에게 오늘 우리 동네 하늘이 이렇게 아름다웠어- 하고 보여주려고 단 두 장 남은 필름카메라를 들고 해가 지는 방향으로 서둘러 걸었다.

앵글에 건물이 걸리지 않으려면 한참은 더 가야 할 텐데 중간에 신호가 걸려버려서 애가 탔다. 거기에 가로등 빛의 간섭, 전깃줄, 달리는 차까지 피하다 보니 끝이 없었다.

그사이 해가 졌다. 실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 욕심을 부렸다. 아쉬운 대로 한 컷을 남기곤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지금. 떼구르르 겨우 굴러나와 키보드를 두드려 보는 이 시간도 나름대로 충만하다.    

 

근래의 나는 조금 작아져서 금세 차오를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을 장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근래의 나는 조금 가라앉아서 들뜨다가 실수할 일이 거의 없다.

이것은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에는 본론이 없을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요즈음의 생활에 이렇다 할 몸체가 없기 때문이다.

덩그러니 얼굴만 남았다. 기원을 잃은 표정으로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그냥 안으로 밖으로 꼬인 것들 모두 풀고 물 흐르듯 순하게 담담하게 살고 싶은 마음.

자기 연민은 안 좋다길래.

아니,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자주 잊는 것 같아서.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맥이 빠질 이유가 없다. 나는 이것이 다 가짜 같고 엄살 같다.    

  

어두운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건 천진했건 과거에 남긴 기록은 오늘도 지나가기는 할 거라는 위안은 준다. 엊그제 문득 친구 T의 인스타그램을 들여다보았는데 좋았다. 최근 몇 년 사이 T가 드물게나마 올린 행복한 순간 대부분에 내가 함께 있었다. 지금에 와서 보니 최선으로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때 난 분명히 버거워하고 있었다. 함께여도 쓸쓸했고 막막했다. 신기하게도 지나간 순간들은 대체로 미화된다. 뇌가 열심히 일했거나 아니면 일을 안 했거나.

작은 희망 : 얼마 전 강릉으로 향하는 기차가 막 출발했을 때 T는 내게 귀여운 엽서를 건넸다. 그날 이후로 만난 사람 중 몇 명에게 나 역시 엽서를 써서 건네었다. 혹시 하루하루를 버거워하고 있다면 잠시나마 위로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이렇게 적어본다.     


나는 나를 너무 미워해서 내가 보잘것없게 느껴지는 순간을 견디지 못한다.

나는 나를 너무 미워해서 성에 차지 않는 나로 인해 끙끙거린다.

나는 나를 너무 미워해서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여기에서 ‘미워해서’를 ‘사랑해서’로 바꿔 읽어도 무리 없이 읽힌다.

그렇지만 소리 내어 읽어봐도 가뜩이나 산산이 흩어져 있을 조각들이 더 멀어지는 기분이라

술래잡기나 숨바꼭질 같은 것을 간절하게 하는 마음으로 화면 위에 검은 글씨를 띄워보아도 마음이 잡히지를 않는다.

오늘 내 마음은 검은색이 아니라 흰색 저기 어딘가에 있음을 깨닫고 관둔다.     


두 달 만에 일기장을 펼쳤다.     

8월 29일.

고양이 밥을 주려다가 모기에게 밥을 주었다. 어처구니 없는 두 달 만의 일기.      


- 끝     


<No makeup> / 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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