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관찰한다. 늘 생각 속에 사는 N의 특성인지 몰라도, 무슨 일이든 생각하다 보면 그 끝은 자아성찰 비스므리한 곳까지 뻗어나간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아주 잘 안다. 아니, 잘 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해석하는 심리상담가처럼 내 성향, 생각, 사상, 습관, 모든 걸 안다고 오만한 오해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생활에 변화가 생기면서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는 내가 아니었다.
나는 잘 참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생전 남에게 화내 본 적 없고 모든 걸 속으로만 참는 사람. 그래서 사람들에게 편안하다는 말도 많이 듣고, 모난데 없는 인맥들로 채워져 갔다.
하지만 나는 참는 게 아니라 위기를 피해 가는 사람이었다.
똥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고 한다. 굳이 맞설 필요가 없이 싫은 건 무시하고 지나치면 된다. 불화가 생겨도 '이 순간만 지나가면 일이 더 커지지도 않겠지.', '나만 참으면 더 싸울 일도 없겠지.'라며 넘어갔다. 내 마음이 불편한 게 주변이 불편한 것보다 훨씬 참을만했다.
내 울타리에 굳이 포식자를 들여보낼 필요는 없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굳이 참고 만나지 않았다. 그 사람을 바꾸는 것보다 안 만나는 게 더 빠르고 쉬운 해결이니까. 딱 보고 아니다 싶은 사람은 애초에 친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가 기둥이 된 가정에서는 외면할 수가 없다. 애들이 말 안 듣는다고 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 속에서 살아야 한다. 내가 이렇게 화가 많은 사람이고 절제가 부족한 사람이란 걸 깨닫는다.
애들이 말 안 듣는 거는 당연한 건데(?) 그걸 못 참고 화를 낸다. 아, 물론 잘못에 대해 화를 낼 수는 있다. 그런데 내 생각보다 윗단계의 화를 낸다. 반사적으로 버럭 큰 소리를 내고 나면 '이렇게 까지 욱할 일인가?'하고 스스로를 타박한다.
찰나의 순간에 화는 자책으로 뒤바뀐다. 속으로 반성을 하고, 후회를 하고, 화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리고는 화를 낸다. 까먹고 그러는 게 아니다. 자책을 하는 도중에 큰 소리가 튀어나온다. 자책을 하는 도! 중! 에!
피하기만 해 오던 내가 손발이 묶여 온몸으로 받아내려 하니 얼마나 내성 없이 해결한 단 말인가. 그나마 손지검을 하거나, 거친 말을 하거나, 정서적으로 문제가 될만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한계라고 생각하면서 그걸 지키는 것에 티끌만 한 위안을 삼는다.
환경이 변한다는 것은 모든 게 변한다는 말과 같다. 모든 것엔 나 자신도 포함된다.
그 변화를 인식하고, 이해하고, 인정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새로워진 나를 다시 관찰하면서 정보를 수정하고부터는 마음이 편해졌다.
"애들 때문에 내 인생은 피폐해졌어!"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이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봤으면 한다. 아이들 이전에 변화된 상황에 맞춰 내가 겪은 변화를 이해하는지. 달라진 생활을 직시하지 않고, 이전에 놀러 다니던, 자유롭단, 여유롭던 모습만을 떠올리고 비교하는 건 아닌지.
물론 환경에 따라,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나와는 다른 원인/결과가 있을 수 있다. 그 안에서도 나와 같은 이해를 얻는다면 조금은 나아질 거라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창고가 넓어졌다.
여전히 버럭 큰소리를 내지만 그 후 되돌아오는 마음의 화살은 많이 나아졌다.
이 느낌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