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취업 = 성공인 줄 알았다

회사라는 울타리와 그 안의 순한 양

by 유쥬얼리

내가 생각했던 성공의 방정식


인서울 좋은 대학.

대기업 좋은 회사.

빛나는 사원증과 명함.


20대의 나는 이것들이

인생의 성공요소라 굳게 믿었다.


기계나 제품에 붙이던 '스펙(SPEC)'이라는 단어가

이젠 한 인간의 능력치를 뜻하게 된 시대.

나 역시 좋은 스펙을 완성하기 위해

학점, 영어, 봉사활동, 공모전까지

온갖 활동으로 바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공대생이라 다른 전공보다는 수월하겠지 싶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취업이 힘들어 토 나온다는 토목과였다.

전자, 전기, 기계, 화공처럼 선택지가 넓은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길은 건설회사뿐이었다.


입사지원만 100번에

최종면접만 30군데를 봤지만 모조리 탈락.

눈을 낮춰 지원한 지방 건설사로부터는

불합격이라는 연락조차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처럼 최종 합격 소식이 날아왔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H건설!


칠전팔기 끝에 합격했기에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나 같은 놈도 뽑히나" 싶어 얼떨떨했다.


그래도 가슴속 한편에서는 외치고 있었다.

"뭔들 어때, 이제 나는 대기업 사원인데!"


1월의 추운 겨울날, 자취방을 나오는 순간부터

사원증을 패딩 바깥으로 꺼내 달았다.

어둑한 골목길을 사원증이 밝혀 주고 있었다.


지하철 승객들이 다들 내 사원증만 쳐다보는 같다.

사진 찍자고 하면 어떡하지?

조금 있으면 사인도 요청하겠지?

회사 이름이 들어간 사인을 새로 만들어야겠다.

"이봐, 대기업 사원 해봤어?"




대기업이라는 후광효과, 그리고 현


대기업에 입사하면

멋진 정장, 높은 월급과 함께

화려한 삶이 펼쳐질 줄 알았다.


누구나 모는 외제차를 타

누구나 있는 아름다운 연인과 함께

누구나 가는 해외여행을 매달 다니면서

누구나 사는 34평 신축 대단지 역세권 아파트에

누구나 하는 화이트톤 거실에서 85인치 TV를 보며

누구나 먹는 치맥을 하며 편안하게 살아가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대기업이라는 명함과 한 개인의 인생은

철저한 독립변수였다.


다른 회사보다는 나은 월급은

그저 매일 반복되는 야근을 버티게 하는

최소한의 스팀팩일 뿐이었다.


외제차는 무슨...

캐시백이 되는 교통카드와 함께


해외여행은 무슨...

종로에 있던 회사로

주말, 휴일 가릴 것 없이 출근여행을 다녔다.


34평 신축 아파트는 무슨...

하얀 천장에 누수자국이 있는 원룸에서


85인치 TV와 맥주는 무슨...

6인치짜리 스마트폰을 보며

혼자서 사이다를 마시는 게

유일한 소확행이었다.


3개월이 지나자

신입의 달콤함도,

사원증과 명함의 후광효과도

말끔히 사라졌다.


나의 유일한 자랑이라고는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회사를 다닌다는 것,

그 덕분에 남들보다 약간 높은 월급을 받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도 생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래도 대기업이니 다행이다."

라는 생각은 있었다.

후광효과는 사라졌을지언정

'대기업 사원'이라는 자존심은 있었으니까.




나의 보금자리는 어디에


누군가 결혼을 한다고 하면

지금의 나는 늘 조언(이라 쓰고 참견이라 읽는 그 말)한다.

"무조건 보금자리부터 구하라"

그만큼 신혼 초 나의 선택은

지금 돌이켜보면 최악이었다.


대기업이라는 울타리가 있으니

위기감과 압박감은 없었다.

차곡차곡 돈이 모였을 때 사겠노라 생각했다.


매달 이자를 갚아야 하는

위험천만한 대출은 절대금지.

전세 끼고 매수하는 갭투자는

불로소득으로 인생 한 방을 노리는

후안무치한 투기꾼들의 세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대출 없이도 이자도 안 내고 좋은 집에서 거주할 수 있는'

전세를 선택해 신혼을 시작했다.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서

집값이 떨어지면 내 사정권에 들어왔을 때

그 누구보다 과감하게, 그리고 현명하게

최상급지의 집을 매수하겠노라 다짐했다.


그리하여 나는

전세라는 다람쥐챗바퀴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P.S. 역사 속에서 집값은 언제나 비쌌다. 고려, 조선시대도. 못 믿겠거든 다산 정약용 선생님께서 1810년에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를 한 번 찾아보라.

이전 02화무지했던, 그래서 용감했던 나의 20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