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인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그러나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는 사금융
'대출 없이도 이자도 안 내고 좋은 집에서 거주할 수 있는 훌륭한 제도'
당시 내가 전세에 대해 품고 있던 생각은 이처럼 순진하고 낙관적이었다.
땀 흘려 번 돈, 값진 노동의 대가도 번 돈으로 집을 살 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내 집이라 생각했다.
매달 이자를 내야 하는 '대출'과 불로소득처럼 느껴지는 '갭투자'는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전세제도는 볼리비아 외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한다.
(인도의 일부 지역에는 흡사한 제도가 있다고는 한다.)
이 특이한 제도의 유래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조선시대 관료의 귀양 형벌로 인해 발생했다는 이야기가 유력하다.
한양에 있던 관료들이 집을 팔지 못하고 수십 년간 귀양을 다녀왔더니,
그사이 한양의 집값이 너무 올라 집을 살 수 없었다는 서러운 이야기.
그래서 귀양을 갈 때 집값의 절반 정도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갔는데
이것이 전세 제도의 유래로 본다.
놀랍게도, 그 관료 중에는 다산 정약용 선생도 있었다.
다산 선생이 자녀들에게 쓴 편지에서
"사대문 밖 10리 밖으로는 나가지 말라"
고 당부했을 정도였다니,
그때부터 서울은 이미 집을 사기 어려운 곳이었던 것이다.
250년 전부터 검증된 이 냉혹한 사실을 두고도
나는 오직 '대기업 사원'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
철석같이 믿고 월급을 모아 집을 사려 했다.
일단 전세로 신혼을 시작했다.
25년 된 복도식 17평 집에서
아름다운 아내와 오순도 신혼을 보냈다.
누런 벽지나 베란다의 곰팡이,
욕조도 없는 구식 화장실에
창문도 없는 복도식이라 외풍이 순풍순풍 들어오는
현관문을 보면서도
'언제가 생길 내 집'을 떠오르며
씩씩하게 이겨내리라 생각했다.
자본주의의 냉혹함을 뼈에 새길 정도의
고난은 알지 못한 채로.
이때가 2016년이었다.
얼마 후 해외 오지 현장으로 발령이 났다.
방글라데시에 있는 마타바리라는 지역인데
오오오 (오지 of 오지)였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방글라의 수도인 다카에서 일하는 직원을 뽑으면
아무리 (비교적) 좋은 급여를 준다고 해도
3일 안에 도망칠 정도였다.
유일한 장점은 높은 급여였다.
우리 회사에서 오오오였던 방글라는
사내 최고 수준의 급지였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놀지도 못한 만큼
'몸으로 때워 돈으로 받는 수준'이었다.
(이것이 진정한 몸테크 아닐까?)
이때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한국에 집을 사놓고 세를 주고
높은 급여로 대출을 상환했을 것이다.
다만, 나에게는 그런 혜안은 없었다.
당당하게 땀 흘려 번 돈으로 집을 살 것이기에
그저 모았다.
그렇게 2년을 일하니 꽤 모았다.
(7년이 지난 지금도 절대 그렇게 모으지 못하고 있다)
2019년 말 복귀했다.
이제 드디어 이사 갈 차례다.
와이프와 손을 꼭 잡고 동네 부동산에 갔다.
우리가 생각했던 국평 아파트를 보러 갔다.
아니, 웬걸?
피땀 흘려 모아 온 우리 돈 보다
전세금 상승률이 더 높았다.
좌절했다. 우리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
기존 전세금에 우리가 모은 돈을 더해도
대출을 더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국평의 꿈은 멀어졌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25년 된 아파트 전세금이 2년 사이에 2억이 오르다니?
이건 분명 다주택자들이 집을 매점매석해서 그럴 거야!'
(이것도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 M 정부의
여러 부동산 대책이 나왔으나 큰 효과가 없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나는 나라님들이 꺼내놓을 정책의 힘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언젠가는 집값은 내려갈 것이고
그때만을 기다리며 돈을 모았다가
사정권 안에 들어오면 바로 매수해야지."
그렇게 두 번째 전셋집으로 이사가게 된다.
그때 까진 몰랐다.
때마침 발표한 임대차 3 법으로 인해
두 번째 전세의 임대인과 소송까지 이어지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