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 발랄했던 그 시절
주변을 보면 비슷한 또래임에도
누군가는 목표를 척척 이루고,
누군가는 제자리걸음을 계속한다.
그리고 그 제자리걸음이 바로 나였다.
한때는 왜 그런지 알고 싶었다.
원인은 뜻밖에도 ‘가치관’이라는 단어에서 시작됐다.
같은 말을 들어도
어떤 이는 왼쪽으로, 어떤 이는 오른쪽으로 향한다.
흘러 들어오는 정보를
자신만의 ‘가치관’이라는 껍데기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가치관은 어떻게 굳어지는 걸까.
뿌리를 쭉 내려가 보면 결국 '환경'이라는 종착점에 닿는다.
우리가 태어나 처음 마주하는 부모,
이웃집 아주머니, 선생님, TV와 라디오 같은 미디어들.
이 모든 것이 차곡차곡 퇴적되며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며 사는 사람은 드물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인간의 욕망’이다.
돈이나 명예 그 자체가 아니라,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본능에서 출발한다.
지위와 명예는 욕망을 위한 수단일 뿐이고,
욕망의 구조를 이해하다 보면
우리가 왜 그렇게 행동하며 살아왔는지
조금씩 선명해진다.
그 구조를 이해하는 순간,
과거에는 무심히 흘려보냈던
‘기회’라는 것들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남들은 잘 나가는 것 같은데
나만 실패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면,
내가 자라온 환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필자의 부모님은 오래도록 자영업을 하셨다.
아버지께서 잠시 회사에 다녔다고 하셨지만
내 기억 속 대부분은
시장통 버스정류장 앞의 화장품 가게뿐이다.
어느 날, 어머니를 따라 은행에 갔다.
종이가방이 묵직해서 열어보니
천 원짜리와 만 원짜리가 잔뜩 들어 있었다.
“우와!” 하고 소리쳤다가
등짝을 세게 얻어맞았다.
어린아이는 돈(뭉치)을 보면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때부터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돈은 위험한 것이다.’
또래처럼 정기적으로 용돈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필요할 때만, 요청해야만 돈을 얻을 수 있었다.
그 경험들이 내 안에서 하나의 결론을 만들었다.
‘돈은 조심해야 하고, 필요할 때 받아서 쓰면 된다.’
이렇게 어린 시절에 굳어진 돈에 대한 감정과 인식은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예금 3%의 이자는 손실 걱정 없이
'부자가 되는 확실한 자산증식’이었고,
투자는 위험할뿐더러 ‘불순한 행위’처럼 느껴졌다.
정직한 노동만이 진정으로 부자가 되는 길이라고 믿었다.
대학교 시절, 군 휴학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휴학 전에 다음 학기 등록금을
미리 낼 수 있다.
당시에는 금리나 등록금 인상률 같은 건
고려해 본 적이 없었다.
“등록금은 매년 오르니까 미리 내는 게 이득이다.”
그 단 하나의 이유로 선납을 했다.
얼마 후 동기 A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하자,
A는 웃으며 말했다.
“이자는 생각 안 하냐?”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당시엔 왜 잘못인지조차 몰랐다.
더 웃긴 건, 휴학한 3년 중 두 해는
정부의 '반값등록금'등의 정책으로
등록금이 동결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때조차 나는
‘내가 미리 내서 조금이라도 싸게 낸 것이다’
라고 굳게 믿었다.
지금도 A를 만나면 그 얘기가 나온다.
“너 정말 멍청했구나.”
같이 웃는 나도 속으로는 쓰리다.
맞다. 그때의 나는 정말 무지했다.
돈은 천한 것이고, 투자는 위험하고,
은행 예금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며,
돈은 노동으로만 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굳어버린 가치관은
취업 후에도 한동안 나를 꽉 잡고 있었다.
만약 당신도 남들만 앞서 나간다고 느껴진다면,
혹은 나만 제자리라는 느낌이 든다면,
그 감정의 뿌리는 어쩌면 ‘당신의 환경’ 일지 모른다.
나처럼 무지했기에,
그래서 오히려 용감했던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은 돌아보는 순간부터
비로소 다른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