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일기 8
우리는 냉철하게 실패하기로 한다. 이쯤에서 천왕봉을 포기하고 안전하게 내려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좌절스럽거나 아쉽지 않았다. 그건 나에게 선택권을 준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지리산 종주를 결심한 순간을 더듬어보더라도 내가 원했던 것은 성공의 기억보다는 버티는 경험이었다. 세석대피소까지 닿기 위해 수많은 봉우리를, 16시간을 이겨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지 않을까. 지리산 종주는 세석대피소에서 그렇게 끝이 났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저녁 6시 57분이다. 입실 마감시간까지 3분을 남겨두고 가까스로 도착한 세석대피소는 저녁을 먹거나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피로감과 함께 밀물처럼 몰려왔다. 다리를 끌며 곧장 배정받은 자리로 향했더니 이마저도 2층이다. 몇 안 되는 작은 계단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종이에 적힌 숫자를 따라 도착한 곳은 벽과 맞닿은 끝자리다. 괜히 기분이 좋다.
털썩 주저앉으니 도저히 저녁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벽소령대피소에서 덕평봉, 칠선봉 그리고 영신봉을 넘어 세석대피소로 오는 길에 모든 체력을 써버린 탓이다. 힘들면 쉬어도 된다는 일행의 배려 덕분에 나는 저녁을 건너뛰고 잘 준비를 시작했다. 옷을 갈아입고 온몸에 파스를 뿌리거나 붙였다. 그러는 사이 주위를 둘러보면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아주머니들이 보였다. 지친 기색 하나 없는 모습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발포매트 위에 누우니 내 방 침대만은 못하지만 한결 편하다. 메고 온 보람이 있다. 예상대로 깊이 잠들지 못한 나에게 새벽은 눈 깜짝할 사이 찾아왔다. 바깥은 자욱한 안갯속 비가 내리고 있었다. 궂은 날씨 탓에 대피소 안의 사람들 역시 선뜻 출발하지 않는 모습이다. 대피소를 빠져나와 천왕봉으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머뭇거렸다. 이상하리만치 체력은 남아있었지만 3시 버스를 놓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발길을 돌렸다.
일상으로 돌아와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종주를 떠나기 전과 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매일 비슷한 농도의 감정과 노동을 겪고 있다. 지리산 종주를 경험하고 달라진 점이 있다면 삶은 또 다른 종주라는 것을 그리고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 크고 작은 봉우리를 건너다보면 굳은살과 제법 사랑스러운 순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지금 이 지난한 종주에 기꺼이 나를 던질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비를 동반한 습하고 무더운 날씨가 이어진다. 산에 가지 못하니 답답할 노릇이다. 며칠 전의 일이다. 당분간은 쳐다도 보지 않을 것 같던 지리산 종주를 검색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여름의 끝자락 어느 주말에 세석대피소 자리가 나있어 나도 모르게 그만 예약 버튼을 누르려다 관두었다. 흐르던 땀, 온몸의 감각 그리고 내려와서 먹은 잊지 못할 부추전까지. 아직은 그날의 여운을 조금 더 간직하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