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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May 07. 2023

낯설음의 미학

앙상블블랭크 작곡가는 살아있다 (예술의전당 IBK챔버홀)|공연리뷰

클래식 음악 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고정관념이 있다. 아주 오래전 중세 시대의 공작, 귀부인들이 화려한 모자와 드레스를 차려입은 모습. 서양음악. 바흐, 헨델, 베토벤, 모차르트와 같은 시대의 거장들. 클래식은 이러한 사실에만 국한되지 않지만, 학창시절 음악 수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이런 관념을 떨치기란 어렵다. 이같은 맥락으로 고전 서양 음악은 보통 클래식이라고 불리며, 20세기의 음악은 현대음악으로 구분되고 있다.


현대음악도 클래식이다


그렇다면 현대음악은 클래식이 아닌가? 지금의 클래식이 현대음악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베토벤도 모차르트도 한 때는 그 시절을 풍미한 현대 작곡가였다. 그러니 현대음악 또한 클래식이다. 언제나 우리는 상대적인 시간의 흐름 앞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재는 과거가 되고 미래는 현재가 된다. 


앙상블블랭크는 말한다. 클래식은 끝나지 않았다고. 작곡가는 살아있다고 말이다. 그들은 여전히 생명이 소생하고 있는 클래식의 바다에서 새로운 작품을 건져낸다. 그들이 찾는 새로운 아름다움은 익숙하지 않은 아름다움이다. 앙상블블랭크는 이러한 가치를 바탕으로 모인 예술단체로 지휘자인 최재혁 음악감독과 17명의 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2000년부터 작곡 공모를 시작해 4년째 이어오며, 선발된 곡을 연주하고 작곡가의 작품을 세상에 실현하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4월 29일 저녁, 예술의 전당 IBK 챔버홀에서 ‘작곡가는 살아있다’가 열렸다.


주최 : 앙상블블랭크 / 주관 : 리드예술기획 / 후원 :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앙상블블랭크(ensemble blank) 음악감독·지휘 최재혁, Flute 이지운, Flute 조철희, Clarinet 김길우, Piano 정다현, Percussion 이서림, Violin 한윤지, Violin 박재준, Viola 최하람, Cello 이호찬, Double Bass 유이삭

2022 앙상블블랭크 작곡공모 당선 작곡가 Composer 이응진, Composer Christoph Renhart

 

PROGRAM

1. Rebecca Saunders - Fury I for Double Bass Solo (2005) (b.1967)
2. Anton Webern - Langsamer Satz (1905) (1883-1945)
3. Tristan Murail - La Barque Mystique (1993) (b.1947)
4. 이응진 - Geste I (2022) (b.1997) * 2022 앙상블블랭크 작곡공모 당선, 세계초연
5. Christophe Bertrand - Satka (2008) (1981-2010)
6. Christoph Renhart  - Échos éloquents (2016) (b.1987) * 2022 앙상블블랭크 작곡공모 당선, 국내초연
7. Johann Sebastian Bach - Selections from Musical Offering, BWV 1079 (1747) (b.1685-1750) 


Rebecca Saunders (레베카 손더스)|Fury I for Double Bass Solo (2005) 

공연의 분위기랑 가장 유사한 느낌의 영상을 찾아봤어요 (작곡가 영상 아님)

더블 베이스 솔로로 더블 베이시스트 유이삭이 올랐다. 환해진 무대 우측을 보며 당황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 같다. 베이시스트 손에는 선이 끊어진 활이 들려 있었다. 당황스러움도 잠시, 머릿카락처럼 촤르르 흘러내리는 활과 베이시스트의 표정은 한순간에 무대를 압도했다. 


더블 베이스는 한 마리의 재규어처럼 그르렁거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 속에서 맹수의 눈빛이 반짝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더블 베이스는 작품 속에서 현악기였다가 타악기가 되었다. 홀로 고독한 싸움을 이어 나가는 한 사람이 떠오른다. 이런 연주도 있다니. 하나의 소리는 길어졌다가 급하게 짧아지고,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나는 후반부로 갈수록 작품의 분위기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Anton Webern (안톤 베베른)|Langsamer Satz (1905) 

Langsamer Satz은 느린 운동, 느린 문장으로 해석된다. 작곡가 베베른이 휴가 중 아내와 하이킹하며 영감을 얻은 곡인 만큼 그 여유로운 분위기와 애틋한 감정이 동시에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꽃이 만개한 봄날의 정원처럼 시작해 폭우가 쏟아지는 여름날의 하늘로 이어졌다. 직접 들으니 아름다운 선율과 화음에서 감정이 짙게 느껴진다. 연주 중 현을 퉁겨지는 부분이 가장 좋았다.


Tristian Murail (트리스탄 뮤라이)- La Barque Mystique (1993) 

혼돈 그 자체가 느껴지던 작품

시작부터 귀를 사로잡는 극적인 도입부는 잔잔한 바다에 들이닥친 폭풍의 전야를 연상케했다. 투명한 물 위를 지나치는 칼바람처럼 서늘한 선율이 이어진다. 영화 ‘샤이닝’이 떠올랐다. 나는 공포영화 속 다가올 위기를 느끼는 주인공이 된 것처럼 이 기묘한 선율에 도망칠 수도 멈춰 있을 수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또 La Barque Mystique는 추상주의 미술을 닮았다. 삼각형, 사각형, 동그라미 등 기하학적 문양이 공중에 멈춘 듯한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구성이 생각났다. 낯설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매력이 있는 곡이다. 


이응진 (Eungjin Lee) - Geste I (2022) 

2022 앙상블블랭크 작곡공모 당선으로 당일 세계 초연 된 ‘Geste I’은 시작부터 압도적이다. 피나바우쉬의 ‘봄의 제전’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이 곡은 연주의 모든 부분이 자신의 위치에서 도드라지는 느낌을 주는 신기한 작품이었다. 각각의 무용수가 자신의 움직임을 꺼내는 것처럼 모든 선율은 각각 따로 존재하며 연주자들은 하나의 즉흥 춤을 추는 것처럼 음을 꺼낸다. 머리가 복잡했다. 피나바우쉬의 공연이 눈 앞에 펼쳐지다가 금세 종적을 감추고 하나의 문장만이 반복적으로 생각났다. ‘우리는 같은 시간 안에 존재합니다’라는 말이다. 이 감상은 글로 된 생각이 아니었다. 하나의 이미지처럼, 문장이 이미지화 되어 머리 위로 불쑥 올라왔을 뿐이다. 연주자와 관객, 지휘자 모두가 작품 안에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Christophe Bertrand(크리스토프 베르트랑) - Satka (2008)

Satka는 6인 그룹을 의미한다. 플루트, 클라리넷, 바이올린, 첼로, 타악기, 피아노로 연주되었다. 누군가 계속 물을 따르고 채우는 것처럼 연속적인 음이 매우 빠르고 유려하게 진행된다. 그 기교가 아름답다. 나는 반항의 감정을 느꼈다. 무용한 움직임을 반복적으로 진행하며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행동을 떠올렸다. Satka가 연주되는 내내 연주자들은 공연장의 천정에 구름처럼 거대한 물음표를 만들어 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거대하고도 가벼운 그 물음표가 두렵기도, 경이롭기도 했다. 


Christoph Renhart의 Échos éloquents는 제일 어렵게 느껴지던 작품이었다. 감상 내내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 이 작품은 2022년 앙상블 블랭크의 작곡 공모 당선 곡이다. 작곡가는 잔향은 울림에서 시작된다고 말하며 소리로 따지면 그림자라고 비유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마지막은 바흐의 곡으로 마무리되었다. Selections from Musical Offering, BWV 1079 (1747) 을 마지막으로 <앙상블블랭크 작곡가는 살아있다>가 막을 내렸다. 앞선 곡들이 익숙하지 않고 실험적이었다보니 바흐의 음악이 조금은 단조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앙상블블랭크


<앙상블블랭크 작곡가는 살아있다>가 열리던 당일의 날씨는 비 오기 직전처럼 을씨년스러운 바람과 어둑한 밤하늘이 곧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재미있게도 공연은 그날 날씨와 매우 잘 어울렸다. 그래서인지 더욱 기억에 남는다.


개인적으로 본 공연은 기획 의도가 고스란히 잘 전달된 공연이 아니었나 싶다. 성의 있게 만들어진 브로슈어부터 최재혁 음악감독의 중간 설명까지 친절함으로 가득했다. 클래식 공연이라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되기보다는 감상과 표현, 설명이 캐주얼하게 이루어지면 대중들이 더욱 접근하고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왔던지라 더욱 공감할 수 있는 공연이었다. 곡이 끝날 때마다 연주자들은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나 미소를 많이 짓는 연주자들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하면서도 작곡가의 예술세계를 표현하고 그에 대해 만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해사한 표정에서 작곡가와 음악에 대한 진심을 느꼈다.


우리는 낯선 것을 쉽게 부정한다. 심지어 이상한 것으로 낙인찍는 경우도 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무섭고 두려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동안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다. 앙상블블랭크는 이러한 낯섦에서 오는 감정을 잠시 바라보며 열린 마음으로 현재 진행 중인 클래식을 느껴보라고 말한다. 나는 이들이 연주할 앞으로의 곡들도 매우 궁금해진다. 


진심 어린 연주 감사합니다 :)



* 본문은 아트인사이트에서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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