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셸 오토니엘 : 정원과 정원 展 |전시 리뷰 & 정원의 환상성
J, 현실처럼 생생한 꿈을 꾼 적이 있어? 그곳엔 정원이 하나 있었어. 난 그곳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해. 숲을 향한 길목이 오색 빛으로 화려하게 물들어 있어. 그 길에 들어서면 시큼한 풀냄새가 먼저 나. 그 향긋함 때문에 나비와 벌들이 그 위를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어. 보드라운 땅 위로는 개미들이 줄지어 걸어 다니고 딱정벌레와 이름 모를 곤충들이 곳곳에 보여. 그곳의 생명력 때문에 나는 혼자 있어도 그들과 함께 숨 쉬는 걸 느낄 수 있었어. 그 길의 양 끝에는 해바라기들이 꼿꼿이 서 있고, 안쪽에는 붉은 사루비아들이 무리 지어 피어있어. 바닥에는 보라색 붓꽃과 라벤더들이 있어. 고개를 숙이면 은은한 라벤더 향이 나. 한쪽에는 국화꽃이 올망졸망 무리지어 있는데 그 국화 향이 너무 강해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어. (중략)
대학교 1학년 때 ‘스무 살의 정원’이라는 단편을 썼다. 이야기 속 화자는 꿈속에서 본 정원의 모습에 매료되어 실제 정원을 가꾸고 싶다는 열망을 키워나간다. 그 감정의 양상이 절친 J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대로 녹아있다. 위 내용은 그 일부다. 소설이나 수필이라고 해보았자 공책에 끄적이던 내가 작가도 아닌데 그냥 써보기로 했다. 소재를 생각하다 번뜩 떠오른 장소는 정원이었다. 내가 가장 꿈꾸는 장소, 가보고 싶은 장소, 가꿔보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우습게도 나는 정원에 가본 적이 없다. 정원은 ‘庭(뜰 정)’에 ‘園(동산 원)’을 쓴다. 한국에서 식물원에 가지 않는 이상 질서정연하게 가꾸어진 뜰이나 꽃밭을 마주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특히 소설이나 그림에서 보던 정원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내게 정원은 일상에서 만날 수 없는 판타지적 공간이다. 아직도 나는 정원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런데도 윗글처럼 가보지도 않은 정원을 이상적인 공간으로 인식하며 동경하고 그리워하게 된 이유는 예술가와 문인들이 묘사한 작품을 보았기 때문이다.
‘정원’의 이름 앞에는 비밀, 신비라는 단어가 자주 붙는다. 정원이 주는 이미지가 인간이 상상하는 판타지의 근원에 가깝기 때문일까? 그래서인지 정원은 문학, 그림, 영화, 음악 등 각종 문화 예술 콘텐츠에서 자주 사용되는 소재다.
내가 정원을 처음 만난 소설은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로 기억한다. 이 책에서 톰은 괘종시계가 13번이 울리는 기이한 현상에 현관문을 열었다가 낮에 본 풍경과는 전혀 다른 신비한 정원을 마주치게 된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도 있다. 마담 프루스트는 아파트 안에서 이끼가 피어나고 나무가 자라나는 정원을 가꾼다. 영화에서 묘사하는 프루스트의 정원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이뿐인가 아이돌 노래에도 있다. 오마이걸의 ‘비밀정원’에서 화자는 자신의 관념 안에 맺힌 소중한 장소를 정원으로 소개한다. 아직 비밀이라 풍경이 보이지 않지만 멋지고 놀라운 게 가득하다는 설정이 앞선 정원의 상징과 유사한 점을 보인다.
천국이나 무릉도원의 모습도 정원에서 영감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흐드러지게 꽃이 피고 풍성하게 과일이 열려 자연적인 달콤한 향이 가득한 장소는 흔한 이상세계의 모티브이니 말이다. 과거 화가들 또한 정원에서 많은 예술적 영감과 치유의 과정을 경험했다. ‘반 고흐의 정원’이라는 책을 보면 고흐의 정원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이 정원이 나를 꿈꾸게 합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정원은 그의 예술세계와 정신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모네의 정원도 빼놓을 수 없다. 모네는 말년을 지베르니의 정원에서 보내며 호젓한 전원생활과 함께 인상주의 화풍을 발전시켰다.
왜 정원은 환상의 장소이면서 마법의 장소로 상징되는 것일까? 예술가들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까? 재밌는 것은 오토니엘도 마찬가지로 정원에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으며 정원을 영감이 떠오르는 장소로 지칭하였다. 그는 신화의 꽃 이야기를 즐기며 정원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으니 그의 정원은 어떤 모습일지 매우 궁금해졌다.
[장-미셸 오토니엘: 정원과 정원]展에서 거닐며 느꼈던 감상과 함께 정원의 환상성에 대한 생각을 나눠볼까 한다. 뜨거운 땡볕이 내리는 7월 중순에 서울 시립 미술관에 도착했다. 서소문 본관은 입구까지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이제부터 써 내려갈 오토니엘 전의 감상평은 전시관을 ‘정원’으로, 작품들을 여러 가지 요소에 빗대어 표현할 것이니 참고해주시면 좋겠다.
‘루브르의 장미’ 연작, ‘자두꽃’ 연작
오토니엘의 정원은 봄꽃이 만개하여 흩날리고 있다. 정원 초입에 연달아 피어난 <루브르의 장미>에는 꽃잎이 그의 유리구슬 작품처럼 알알이 표현되어 있다. 그의 장미를 보고 있노라면 블랙홀을 바라보는 것처럼 강렬한 욕망에 빠져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검은색의 거친 터치는 이미 만개하여 꽃대가 흐물거리는 낙화의 순간을 포착한 것처럼 보인다. 장미 넝쿨이 얽혀있는 울타리 옆을 거닐 듯 장미 연작을 감상하며 바닥에 후두둑 하고 떨어지는 꽃잎을 느낀다.
실제로 ‘루브르의 장미’는 루브르의 소장품인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작품 ‘마리 드 메디치와 앙리 4세의 대리 결혼식’의 영향을 받았다. 두 인물의 결혼식 장면의 발밑에 떨어진 장미는 오토니엘의 시선으로 재해석되었다.
<루브르의 장미>를 지나고 나면 정면에서 붉게 빛나는 <자두꽃>이 보인다. 자두꽃은 까만색의 장미와 대조되며 시선을 사로잡는다. 조선 왕실의 상징인 오얏꽃의 흔적은 덕수궁의 여러 공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붕의 오얏꽃 문양과 덕수궁의 인테리어에서 사용된 자주색을 보며 흰색의 꽃을 자주색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자두꽃>은 <루브르의 장미>를 변형시킨 작품으로 거친 터치가 닮아있지만 낙화한 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노란 수술과 꽃잎이 바람 결에 가득히 흩날리며 정원을 진한 향으로 채우고 있다.
‘푸른 강’과 '매듭' 연작 - 오토니엘이 승화한 고통과 삶
정원의 꽃을 감상하고 코너를 돌면 벽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강이 찬란하게 등장한다. 해가 지고 나니 정원은 순식간에 저녁에서 밤으로 바뀌었다. 어두운 조도의 전시관에서 <푸른 강>과 14개의 매듭 작품이 분위기를 압도한다. 소설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의 주인공 톰이 된 것처럼 비밀의 정원에 발을 딛는 신비한 기분을 만끽했다. 유려하게 전시관을 가로지르는 강은 영화 <알라딘>에서 알라딘과 자스민 공주가 함께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날았던 새벽의 강을 떠올리게 했다. 피로지 색상의 벽돌이 반사하는 투명한 빛은 물의 흐름과 바람의 결에 따라 부서지는 달빛처럼 보인다.
푸른 강 위에 매달린 매듭 작품들을 보며 걷다 보면 걸음의 속도와 시선이 닿는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정원의 마법 같은 장면을 감상할 수 있다. <푸른 강>의 규모와 물을 연상시키는 작품의 특징이 자연스럽게 사색의 시간을 선물한다. 천장에 매달린 <라캉의 매듭>을 비롯하여 강 위에 떠 있는 <분홍 연꽃> 등이 갖는 색채와 물성의 아름다움에 집중하다보면 그 탄생의 과정이 무결할 거라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어떤 생명도 고통 없이 탄생하지 않는 것처럼 유리구슬도 원래부터 그러한 모습으로 존재하던 것은 아니다. 그 모양과 빛에는 상처와 결점이 녹아있다. 수공으로 빚어낸 유리구슬과 벽돌이 다채로운 색을 발산시킬 수 있는 이유는 가공 과정에서 생기는 상처와 불순물 덕분이다.
오토니엘의 잘 알려진 대표작들은 유리구슬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완벽해 보이는 작품에 사실 고통의 시간이 녹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사제를 준비하던 연인의 자살로 인해 삶의 인식이 송두리째 바뀌는 충격을 받았다. 이후 암흑의 시간을 거치며 자신을 치유하기 위한 창작을 시작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작품의 재료로 처음부터 유리를 선택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아마도 자신의 무의식이 유리의 물성에 끌린 것 같다고 답한다.
유리는 조심스레 다루지 않으면 깨져버린다. 그런 예민한 재료로 구슬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작업일 것이다. 그는 이런 섬세하고 정교한 작업을 거듭하면서 상처받은 자신의 마음을 돌보는 기분을 받지 않았을까? 유리에 끌린 이유도 섬세하고 아픈 자신의 마음이 투영된 결과가 아닌지 추측해본다. 그는 쉽게 다치고 긁히는 마음을 구슬로 보듬고 다듬어 나가며 아픔을 예술적으로 승화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말이다. 전시장을 가득 채우는 매듭 연작과 <와일드 노트>에는 장인의 수련과도 같은 자기 치유의 시간이 담겨있다.
'거울 매듭' 연작
강을 지나고 나면 여러 개의 매듭을 세워 놓은 숲이 나온다. <거울 매듭>들은 정원에 우거진 나무 같다. 나무줄기와 잎사귀 사이로 강과 식물들, 사람들이 보인다. 가까운 곳에서 매듭 작품을 들여다보면서 카메라를 들고 어떻게 작품을 담을 것인지 고민했다. 자연 속에서 노는 법을 배우는 아이처럼 그 공간을 즐기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교감의 시간을 가졌다. 거울 매듭은 하늘로 솟는 용처럼 보이기도 하고, 값비싼 보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거울 매듭의 모양과 색상에 집중하다 구슬에 맺힌 수십 명의 나와 마주한다.
나에게 첫 정원의 모습을 알려준 작품은 클로드 모네가 그린 지베르니 정원 연작이다. 특히 ‘수련과 일본의 다리’를 처음 봤을 때는 아치형 다리가 그려진 초록색의 연못을 보며 잠시 그 속에 빠져들어 가는 기분을 받았다. ‘파란 수련’에서는 시퍼런 연못 위에 떠 있는 새하얀 수련이 새벽의 시간을 떠오르게 한다. 손바닥만 한 복사본을 보면서 모네의 정원에 담겨있는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래서 제일 기대되었던 전시 공간은 덕수궁의 연못이었다. <황금 연꽃>을 사진으로 보았을 때 모네의 수련 작품들이 겹쳤다. 초록색 연못에 떠 있는 황금의 꽃이라니, 말만으로도 상상력이 폭발할 것 같은 설레는 조합이었다. 특히 덕수궁 연못에 피어오른 작품이라 신화적인 상상력이 가미되었다. 고전 동화의 얘기나 불교에서 상징하는 것들을 떠올려보면 연꽃은 탄생과 환생의 의미가 있다. 생명력의 상징인 연꽃이 금색으로 둥둥 떠있는 것이 잠시 무릉도원의 연못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아쉽게도 그 몽환의 순간은 소음에 취약한 장소적 특성 때문에 금세 깨지고 말았다. 시청 옆이라서 이어폰을 끼고 집중하려 해도 시위 소리가 그대로 뚫고 들어왔다. 차분히 공간의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여 아쉬웠다. 일부러 비가 오지 않은 날을 노리고 간 것인데 직접 다녀와 보니 비가 오는 날의 연못을 거니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작품이 비와 만나면 더욱 신비롭게 어우러질 것 같다. 비 오는 아침에 다시 찾고 싶어지는 장소였다.
정원은 불완전한 존재들이 조화를 이루는 장소다. 상처를 주고받거나, 쫓고 쫓기며 고요한 싸움을 이어가는 자연의 모습은 우리의 삶과 닮아있다. 그래서 정원의 존재는 위로가 된다. 삶에 고통의 순간이 찾아와도 마지막은 아름다움으로 귀결되었으면 하는 희망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장-미셸 오토니엘: 정원과 정원]은 앞선 정원의 특징을 시각적으로 비유했다. 작품을 이루는 유리구슬과 오색찬란한 벽돌에는 자연적으로 치유하고 싶고 위로받고 싶은 인간의 마음이 반영되어 있다. 작가의 수련과도 같은 과정으로 탄생한 작품들은 꽃과 흐르는 물, 흔들리는 나무처럼 정원에서 마주할 수 있는 자연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전한다.
정원이 환상의 장소로 비유되는 이유는 정원에 인간의 욕망을 투영시켜 해석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바라는 희망의 공간을 들여다보면 그와 반대되는 현실과 욕망을 인지할 수 있다. 고통 속에서 예술이 태어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 믿음에는 삶을 더 긍정적으로 조명하고 싶은 마음과 위로받고 싶은 소망이 담겨있다.
질리지 않는 아름다움이 소생하는 자연은 지속 가능한 영감의 원천이 되며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이 된다. 예술가와 문인들이 잘 가꾸어진 정원을 거닐며 위안과 생기를 얻은 것처럼 우리에게도 비밀 정원이 하나쯤 필요한 것 같다. 나는 이번 전시를 보고 사유의 정원에 강물 줄기와 작은 동굴이 생겨났다.
당신의 정원은 어떤 모습인가?
- 감상의 몰입도가 올라갔던 음악을 몇 곡 추천한다. 앰비언트 아티스트인 Liam Thomas의 곡 North, Circle, Blue Eyes, Bloom, As One 다. 반복재생으로 해두고 덕수궁 야외 전시까지 감상하니 집중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 무료로 봐도 되나 싶은 전시였다. 크리스챤 디올과 현대카드가 후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