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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Jan 13. 2023

타인의 세계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

2022 제36회 한국 현대춤 작가 12인전|무용 공연 리뷰


2022 제36회 한국 현대춤 작가 12인전


이동하 <Guernica again> |사진출처 강선준


12명의 정체성  12명의 세상


 ‘한국 현대춤 작가 12인전’은 12명의 무용수가 펼쳐내는 12개의 작품이 담긴 공연이다. 현업에서 작가정신을 갖고 활동하는 무용수들의 작품을 선보이기 때문에 한 사람의 작품세계를 오롯이 감상할 수 있다. 그렇기에 현대무용, 한국무용, 발레 등 다양한 장르가 한 자리에 모인다.


 무용을 잘 몰라도 직접 공연을 보고 느끼면서 각 장르의 특성을 체험해 보기에 좋다. 12개의 무대는 4개씩 묶여 하나의 공연이 되고, 한 공연당 이틀씩 연달아 진행된다. 총 여섯 번의 공연 일정으로 원하는 날짜에 관람이 가능하다. 나는 관객평가단으로 참여해 총 세 번의 공연을 모두 감상했다.


 덧붙여 ‘한국 현대춤 작가 12인전’이 특별한 이유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작가와 함께하는 무용 워크숍’이 있다는 것이다. 직접 몸을 써보며 움직임을 만드는 과정을 체험해 보자. 공연 감상의 폭이 훨씬 넓어질 것이다. 일반인이 참여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가볍고 재밌으면서도 무용에 대해 흥미를 갖게끔 하는 시간이었다. 진행 시간은 한 시간 반가량으로 부담 없이 맛보기에 충분하다.



왜 현대춤 '작가'일까?


 작가라는 표현을 무용수에게 쓰는 게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공연 위 등장하는 사람은 단순히 정해진 춤을 추는 '무용수'의 역할만을 갖고 있지 않다. 이들은 안무가이자 연출가이고 연설가이며 무용수다.


 그들은 무대 위로 자신이 만든 세상과 세상에 대응하는 태도를 꺼내 놓는다. 그리고 그 위에서 자신의 솔직한 모습과 생각을 움직임으로 표현하고, 공연을 통해 메시지를 던진다. 그렇게 철학을 녹여내어 작품을 만든 무용수는 춤이라는 언어로 생각을 표현하는 작가가 된다.

 



누군가의 세상 일부를 들여다보는 일


정혜진 <Memento - 접어둔 날개> |사진출처 강선준

무용 공연 감상은 타인의 거대한 우주를 보는 일이다. 무용 예술은 타 예술과는 달리 좀 더 개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몸이 작품의 일부가 될 뿐 아니라 움직임은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특성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누군가의 세상에 잠시 들어가 작품과 소통한다. 실시간으로 탄생하는 움직임을 보면서 잠들어 있던 감각들을 깨우고, 생소한 감정들을 느껴보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인지 짐작 가지 않아도 괜찮다. 추측하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동안에도 머리와 감각 체계는 많은 것들을 느끼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자신의 진실한 생각과 감정을 마주할 수 있다.


 이러한 감상의 주제를 ‘감정, 철학, 삶을 대하는 태도’ 세 가지 키워드로 나누었다. 이 세 가지 관점을 바탕으로 ‘한국 현대춤 작가 12인전’에서 개인적으로 감명받았고 생각할 거리가 있었던 작품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감정|애도의 방식에 대하여 

 22년에도 전염병으로 사람이 죽게 될 것이라고, 전쟁으로 한 나라가 폐허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내가 기대한 미래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비극적인 사건과 사고는 여전히 벌어지는데 우리의 땅은 바쁘게 돌아간다. 삶과 정보가 파도를 휩쓸 듯 나를 들이친다고 해서 못 본 채 넘어간 날들도 있었다. 땅 위의 애도가 사라지고 있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슬픔과 마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작가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손가락으로 두들기는 애도도 있다. 이를 세상이 변했다고만 하기에는 너무 인간성이 상실된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장혜림의 에카는 진정성이 상실된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무대다.


장혜림 ‘에카’ (출연 강다니엘)  

(에카의 의미: 아! 어찌하여 라는 의미로, 비탄과 애통함을 담은 히브리어 감탄사)


장혜림 <에카> |사진출처 강선준
 '애도의 시간도 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슬픔과 마주하기로 했다.' - 작품 설명 中

 폐허가 된 땅 위 구슬픈 노래를 부르며 걷는 두 사람. 그들은 땅에 쌓인 흰 가루를 손에 쥐고 흩뿌린다. 남자가 끌고 온 낡은 피아노에서는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전쟁을 치른 듯한 땅 위는 암흑으로 바뀐다. 끝을 알 수 없는 암흑의 공간에 피아노와 남자만 유일하게 빛난다. 그리곤 일정한 규칙이 있는 음들이 공간을 채운다. 일정한 선율은 음악이 되고, 음악은 여자의 몸짓으로 재탄생한다. 나는 점점 이들이 마련한 애도의 시간에 빠져든다. 구슬프고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과 애달픈 움직임. 피아노 위 쌓인 먼지를 털어버리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마주한 애도의 순간은 최근의 전쟁을 바라보던 내 모습을 돌아보게 했다. 슬픔과 안타까움, 인정과 비워냄, 담담함. 말로는 전부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을 느낀다. 이들은 잘 보냈을까? 구슬픈 노래는 두 사람만의 목소리로 시작됐지만, 마침내 노래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더해져 합창을 만든다.




철학|당신 삶의 귀중한 것

 김형민 님의 무대는 자신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스스로의 몸을 연구하고 고민하는 것이 삶의 프로젝트라고 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직접 보고 듣다 보면 한 사람의 철학이 어떤 예술을 탄생시키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매년 목표를 정하면서도 인생에 걸친 목표를 정한 적이 있던가?’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몇 개의 키워드들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가치와 맞닿아 있었다.


김형민 ‘작가(working title)’

김형민 <작가(working title)>|사진출처 강선준


내 삶의 life project라 할 수 있는 침해와 보호가 공생하는 몸에 대한 연구, 끊임없이 수정되고 삭제되는 나의 Artist Manifesto... (중략)... 결국 한 작가의 모습에 대해 추상해본다. - 작품설명 中


 무대 위 작가가 등장한다. 환한 불빛이 작가와 관중을 동시에 비춘다. 작가는 마이크를 들고 나타나 우리에게 말을 건다. 무용수로, 작가로 관심 두는 것과 고민하던 것들에 대해 설명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직접 움직이며 자신의 철학을 소개한다. 확실히 일반적인 무용 공연은 아니다. 연극적인 대화처럼 느껴졌다.


 70cm. 우리가 누군가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안정되게 느끼는 거리다. 누군가에 의해 침해될 수도 함께 공생할 수도 있는 이 거리를 몸소 보여준다. 딱 그만큼의 거리만큼만 움직이는 것이다. 팔이든 다리든 허리든 움직임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는 70cm만큼이다.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그 규칙을 지키며 걸어가 비스듬히 놓인 책상 위 생수병을 든다. 팔꿈치를 굽히면 70cm의 거리 규칙을 깨는 것이 된다. 그래서 팔을 구부리지 못한 채로 물을 공중에 들고 입을 향해 골인시킨다. 입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물은 팔을 타고 내려온다. 그녀는 팔에 흐르는 물을 마신다.


김형민 <작가(working title)>|사진출처 강선준

 인간의 머리칼에 쌓인 미미하고도 위대한 개인의 역사. 그 역사를 공유할 관객을 찾는다. 그러고는 그들의 머리카락을 직접 자르고, 본인의 머리카락도 민다. 그녀는 어떤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머리카락을 느끼고 매만지다가 무대 한 가운데서 소멸할 것 같은 움직임을 보인다.


 금방이라도 죽음을 마주할 것 같은 그녀를 보여주는 방식이 매우 극적이었다. 눈뜨기 힘들 정도로 빛나는 주황 조명과 실신할 것처럼 버벅거리는 작가의 움직임.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가늘게 뜰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는 그녀의 마지막 순간은 눈에 담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 대립적인 상황은 관객이었던 나를 한순간에 영화 속 주인공으로 전환했다.


 장면이 끝나고 지나간 그 자리에는 다시 작가가 등장해 소품을 out 시키고, 조명을 out 시키더니 작가 자신도 아웃시킨다. 

 


삶에 대한 태도|동심을 지켜낸 어른

 내 개인적인 삶의 소망 중 하나는 할머니가 되어서도 자주 웃고 기뻐할 수 있는 동심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친애하는 그대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나이 들고 싶은지, 어떤 태도를 계속 지켜나가며 살아가고 싶은지 생각해 보게 했다. 끝까지 보았을 때 감동이 더 밀려오는 공연이었다.

 

장은정 '친애하는 그대에게' (출연 박호빈)

장은정 <친애하는 그대에게>|사진출처 강선준

 허공의 공간에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하나의 길이 있다. 조명이 만들어 둔 한 줄의 고속도로다. 길의 끝에는 주황색 트레이닝 바지와 귀여운 비니를 쓴 남녀가 서 있다. 그리곤 익숙한 음악이 무대를 가득 채운다. 쇼미더머니 10에서 sokodomo가 자이언티, 원슈타인이랑 같이 작업했던 '회전목마'다. 무용 공연에서 힙합 노래라니 생소하지만 신이 난다. 그 발랄한 분위기에 금세 동화된다. 가사와 후렴구는 동심 가득한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노래에 맞추어 두 사람이 신명나게 춤을 춘다. '빙빙'에 맞추어 돌기도 하고, 다리와 팔을 많이 사용하면서 힙합적인 제스처를 보여주는 식이다. 노래가 끝나고 두 사람은 무반주에서 움직인다. 무대 맨 앞의 낭떠러지까지 달리기도 하고 서로 밀치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장난도 친다.


 흰색의 길이 점차 흐릿해지면서 강한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두 사람은 주황색 바지를 벗어 던지고 검정의 옷차림으로 자유롭게 공간을 만끽한다. 사막인지, 평원인지 알 수 없는 드넓은 공간에서 계속해서 달리고 춤추고 만난다.


장은정 <친애하는 그대에게>|사진출처 강선준


 자유의 시간이 잦아들고 다시 만난 그들은 없어지려 하는 옅은 색의 길 위로 발을 들어 동시에 내디뎠다. 그 순간, 방금까지 있던 공간은 사라지고 초반부에 보았던 흰색 길이 진하게 나타난다. 조명으로 만들어진 길은 제 3의 공간, 비현실적인 세계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현재와 과거로 차원 이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초반부를 두 사람의 어린 시절 연애라고 생각했다. 힙합 음악에 맞추어 신나게 춤도 추고 장난도 치던 과거의 모습이 현재의 모습과 겹쳤다. 두 사람은 개인의 시간을 통해 성숙해지고 성장했으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장난스럽고 개구진 표정과 솔직한 움직임만은 여전하다. 관객석까지 불이 켜지면서 두 사람의 밝은 미소와 신나는 마지막 무대를 감상했다.




김영미 <electronic garden>|사진출처 강선준


 무용수들의 잘 다듬어진 표현력은 엎어진 의자 하나만으로도 폐허가 된 전쟁터를 상상하게 하고, 해사하게 웃는 발레리나의 표정과 가벼운 움직임은 그녀의 어린 시절 소녀 같은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움직임은 적은 소품만으로도 장소를 만들고, 대사 없이도 이야기를 만든다. 누군가의 생각과 감정과 발현을 엿보며 내 감정을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것이 무용 공연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영화나 연극만큼이나 비일상적인 해방감을 느낄 수 있으며, 평소에 쓰지 않는 뇌 근육을 쓰면서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


 무엇보다도 가장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은 움직임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만약 무용 공연을 찾아 보러가게 된다면, 처음에는 작가의 이야기나 공연 설명을 접하고 가는 것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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