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란 세상에서 길쭉한 몸

모두의 몸과 삶의 형태를 사랑하길

by 유영

두구두구!! 일 년을 빙글 돌아온 그 시간. 반장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란스러운 목소리들을 금세 잠재웠다. 그래서 우리 반 계주는 누가 할래? 가을운동회를 앞두고 각 학급은 모든 종목에 걸맞은 학생을 배치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계주라는 것은 응당 박 던지기나 공 굴리기처럼 하고 싶은 마음 하나만으로 번쩍 손을 드는 경기가 아니었기에. 아이들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계주 선수에 적절한 외형을 탐색했다. 우리 반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만한 몸. 신중하고 진지한 눈알들이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내 한 곳에 모이는 시선. 뒷자리에 앉아 멋쩍은 표정을 짓던 영이는 서른 명의 눈빛을 단번에 마주한다. 역시나, 올해도 그럼 그렇지. 영이의 길쭉한 몸이 무색하게 마음은 짤따랗게 작아진다. 초등학생 영이는 벌써 다섯 번째 가을운동회에서 계주 선수를 이어왔다. 버겁고 싫은 마음이 마음을 훌쩍 차지했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여린 영이는 가득 부푼 기대를 향해 건네는 거절이 영 어려웠다. 짝꿍은 속도 모르고 너 아니면 누가 하냐는 표정으로 배실배실 속없는 웃음을 건넸다.

운동회 당일 넓디넓은 운동장은 전교생의 열정적인 응원 소리로 가득 찼다. 영이도 터질 듯한 심장과 함께 힘껏 바통을 잡았다. 선선한 가을바람을 타고 모래가 일어난다. 영이도 떨리는 마음을 재료 삼아 열심히 발을 굴렀다. 영이는 무엇이든 맡으면 최선을 다하는 아이였다. 영이는 남들보다 머리 하나 크기만큼 길쭉한 몸으로 겅중겅중 뛰어 또래를 제치고 결승선을 통과했다. 곳곳에서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신체적 재능과 진심 어린 열의로 이룬 승리였지만, 어쩐지 영이는 그 승리를 만끽할 수 없었다. 늘 마음은 짤따랗기 때문이었다.

타인에게 불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영이는 남들과 다름을 느꼈다. 짧은 이름 때문이었을까. 통상적으로 여겨지는 보편적임에서 벗어난 것은 영이의 마음에 외로움이 자리 잡게 되는 계기였다. 유치원에 입학할 무렵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서부터 영이는 남모를 슬픔을 마음에 쌓았다. 너는 왜 이름이 한 글자야? 낯설고 이상하다는 생각은 눈동자를 통해 여과 없이 전해졌다. 처음 만나는 아이들로부터 반복되는 순수한 물음은 곧바로 상처로 남기에 충분했다. 어린 영이는 자주 서글퍼했다. 내 이름만 왜 외자인지. 키는 왜 또 이렇게 큰지. 흐르는 눈물을 뒤로하고 시간도 굽이굽이 흘러 영이는 남들보다 이름은 짤따랗고 몸은 기다란 특별한 어른이 되었다.

영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튀니 늘 일반적인 것을 선호했다. 나의 개성과 취향을 키워내면서도 보기에 자연스러운 것이 좋았다. 특히 어떤 처음의 만남에서 그랬다. 누군가와 대면할 때. 인사할 때. 소개할 때. 대화할 때. 마음을 나눌 때. 헤어질 때. 타인과 함께하는 순간들에서 영이의 다채로운 구석들은 살아 움직여 춤추었으나, 유달리 첫 만남에서는 그 구석들이 기다란 몸에 의해 감추어졌다. 영이는 그저 키 큰 여자로 단번에 정의되곤 했다. 지긋지긋했다. 큰 키가 부럽다는 말도, 키를 조금만 떼어달라는 말도, 멋지다는 말도, 키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영이의 마음을 짤따랗게 만들었다. 남성보다 훌쩍 기다란 몸이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홀로 훤칠한 몸이 그리고 보이기에 어딘가 어색한 몸이 영이는 이따금 부끄러웠다.

우연히 발견한 훌라 수강생 모집 공고는 영이의 가슴을 흔들었다. 훌라는 내 몸과 친해지고 싶은 사람을 위한 춤. 몸치와 박치에게 가장 친절한 춤이라는 문구. 영이가 가장 좋아했던 순간을 더듬어 떠올리게 했다. 음악 방송의 무대 위에서 빛나던 이들을 따라 추던 케이팝, 짤랑이는 띠를 허리에 둘러 묶고 신나게 흔들던 밸리, 타고난 유연함으로 나비 같은 몸짓을 그리던 발레. 영이가 경험한 모든 춤은 몸을 통해야 이루는 것이었지만 역설적으로 몸에서 탈피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몸을 통해 몸을 딛고 몸에서 해방되는 춤. 영이는 훌라에 이끌렸다. 필요했다. 이윽고 그런 진솔함을 전하고 머지않아 교육 확정 문자를 받았다. 설레고 긴장되는 마음으로 캘린더에 수업 일정을 빼곡하게 채워 넣었다. 춤이라면 유독 즐거워했던 어린 영이의 희미한 몸짓이 점차 생생해지기 시작할 즈음이다.

아무래도 첫 만남은 긴장돼. 연습실을 올라가는 길목에서 영이는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입꼬리는 싱긋 올렸다. 연습실 건물에서는 우쿨렐레 연주가 평화로이 흘러나왔다. 계단에 발을 디딜 때마다 우쿨렐레의 느긋한 선율이 가슴 깊이 다가왔다. 연습실 문을 조심스레 열고 마주한 반가운 미소. 알로하-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발랄하게 흔드는 훌라 강사님의 눈이 자연스럽게 휘어졌다. 환영받는 기분. 영이는 안심이 밀려왔다. 다정다감한 안내에 따라 마음에 드는 치마를 골라 입고, 꽃목걸이를 목에 걸고, 꽃 핀을 심장과 가까운 왼쪽에 달았다. 거울을 보니 곳곳에 형형색색의 꽃으로 꾸며진 기다란 몸이 새로이 느껴졌다. 괜히 어색한 마음에 낯설다고 말하면서도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숨길 새도 없이 번졌다. 이건 하와이 오일이에요. 맡아보세요. 따뜻함이 묻어나는 나긋나긋한 권유에 작은 유리병을 기울여 한 방울 손목에 떨어뜨렸다. 포근하고 달달한 플루메리아 향이었다. 시작도 전에 맞이한 흐르고 반짝이며 퍼지는 모든 것이 너그럽고 편안했다. 쭈뼛쭈뼛했던 영이의 몸이 서서히 이완되었다. 하와이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아름다운 자연의 외진 섬 중 어딘가에 금세 떠나는 기분이다. 모든 준비를 끝냈다.

누구나 마음에 자신만의 고향이 있어요. 훌라를 추는 동안은 자신만의 고향으로 다다를 수 있어요-. 강사님은 수강생들을 위해 훌라 댄서로서의 마음가짐을 갖기를 부드럽게 강조했다. 태어난 곳에서 줄곧 살아온 영이는 자신이 떠올릴 고향은 어딜까 고민하다 내키는 대로 가고 싶은 바다를 자유로이 떠올렸다. 와이키키 해변이다.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 아래 파랗게 부서지는 파도. 몸을 감싸는 선선한 바닷바람과 뜨거운 모래사장의 감촉. 생각만으로도 자유로웠다. 영이의 바다에는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사람 그리고 그들의 다양한 몸이 함께한다. 이어 강사님의 지휘에 따라 몸이 움직인다. 카홀로, 카오, 헬라 호명하는 말에 따라 스텝이 이리저리 뒤바뀐다. 당황하는 영이의 모습에 강사님은 미소를 건넸다. 어떤 모양새이든 괜찮아요. 동작이나 박자가 달라져도 당황하지 않아도 되어요. 아무도 내가 틀렸다는 것을 모르니까요. 여유롭고 당당하게 추세요. 훌라는 정답이 없는 춤이에요. 그러니 편안히 자신을 마주하세요. 이곳의 분위기는 영이가 경험한 세계의 어떤 곳보다도 너그러웠다. 급급했던 몸도 서서히 부드러워졌다. 함께 백사장에서 춤추는 이들의 얼굴에도 꽃이 폈다. 훌라를 할 때면 영이의 해변이 개장하고 아름다운 꽃 축제가 개최되었다.


이별을 다짐하는 마음에 담긴 심상은 다양했다. 그리움, 외로움, 증오, 미련, 서러움. 어느 날은 이별에 얽힌 사연이 담긴 Hui Ohana의 Kona Moon을 함께 들었다. 그리고 저마다 느낀 자신만의 감상을 몸으로 그려냈다. 영이는 지난 사랑과 이별을 생각하며, 서러움과 증오 사이의 감정을 표현했다. 해변에 함께하는 오하나들은 흐르는 몸으로 각자의 감정을 노래했다. 처연함과 절절함 혹은 후련함이 같은 동작의 다른 몸짓으로 흘러나왔다. 음악을 해석하고 각자의 몸의 움직임으로 승화시킨 모습이 근사했다. 어렴풋이 그들의 내면을 바라본다. 몸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들인다. 영이는 훌라에 매료되었다. 주말이 되면 만날 오하나를 떠올리고 그들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훌라 음악을 자주 꺼내 들었다. 귀여운 훌라 치마를 알아보다 잠들고, 때때로 가족들에게 훌라를 보여주었다.

훌라와의 여정 동안 영이는 자신의 몸짓이 좋았다. 유달리 기다란 팔과 다리로 큰 달을 그려내고, 깊은 파도를 표현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빛을 주변에 뿌렸다. 길쭉한 몸으로 한층 더 우아한 세상을 그려냈다. 종종 골반과 엉덩이를 움직이다 균형을 잃어 우스꽝스러워질 때도 그저 신나고 즐거웠다. 어떤 걱정도 부끄러움도 수치스러움도 영이에게 없었다. 음악을 들으며 느낀 감정을 몸으로 표현하고 그 움직임을 다시 발견하며 영이는 몸의 언어를 체득했다. 훌라를 함께 추는 친구들이 그리는 세상에 몰입하고 영이가 만든 몸짓으로 화답했다. 훌라 오하나들과 몸으로 세상을 담는 경험은 평화롭고 환상적이었다. 나와 다른 섬세한 몸짓, 강렬한 몸짓, 절도 있는 몸짓, 부드러운 몸짓, 열정적인 몸짓, 활기찬 몸짓. 몸의 형태는 다양하고 그에 담긴 이야기도 다양했다. 영이는 위로를 받았다. 나와 타인을 비교하지 않고, 잘하고 싶은 강박을 고수하지도 않았다. 훌라를 출 때면 오로지 영이의 몸에 익숙해지고, 그러다가 그 길쭉한 몸이 퍽 좋았다.

훌라 수업의 끝에서,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야외 공원으로 향했다. 풀숲에는 주말을 만끽하기 위해 나온 아이들, 강아지, 연인과 가족들로 붐볐다. 우리는 신발과 양말도 벗어던지고 축축한 흙의 감촉과 풀내음을 느꼈다. 자연이 건네는 모든 손짓이 싱그럽게 느껴졌다. 알록알록한 파우와 화려한 레이와 하쿠를 했다. 이윽고 영이와 친구들은 동그랗게 서서 서로를 바라보며 훌라를 추었다. 맨발로 땅을 밟고 대자연을 오롯이 느꼈다. 우리가 만든 둥근 모양은 영이가 바라는 세상의 모양새였다. 예쁜 몸을, 탄탄한 몸을, 건강을 증진시키겠다는 어떤 집념도 개입 없이 그만의 기다란 춤을 췄다. 영이는 둥근 세상에서 길쭉한 몸을 가진 것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여러 체형의, 여러 생김새의, 여러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적당히 삐뚤빼뚤 섞여 있는 세상. 둥그렇게 그려낸 우리 속에는 다양한 몸이 있었다. 수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적당히 느슨하게 사는 세계가 가장 조화로운 것이구나. 영이는 몸에 매몰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름을 포용했다. 영이는 자신을 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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