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영 Oct 07. 2024

동그란 세상에서 길쭉한 몸

모두의 몸과 삶의 형태를 사랑하길

  두구두구!! 일 년을 뱅글 돌아 온 그 시간. 반장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란스러운 목소리들을 금새 잠재웠다. “그래서 우리 반 계주는 누가 할래?” 가을운동회를 앞두고, 각 학급은 모든 종목에 걸맞는 학생을 배치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계주라는 것은 응당 박 던지기나 공 굴리기처럼, 하고 싶은 마음 하나만으로 번쩍 손을 드는 경기가 아니었기에. 아이들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계주 선수에 적절한 외형을 탐색했다. 우리 반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만한 몸. 신중하고 진지한 눈알들이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한곳으로 모이는 시선. 뒷자리에 앉아 멋쩍은 표정을 짓던 영이는 학급 30명의 눈빛을 단번에 마주한다. 역시나, 올해도 그럼 그렇지. 영이의 길쭉한 몸이 무색하게 마음은 짧다랗게 작아졌다. 초등학생 영이는 벌써 다섯 번째 가을운동회에서 계주 선수를 이어왔다. 버겁고 싫은 마음이 마음을 훌쩍 차지했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여린 영이는 가득 부푼 기대를 향해 건네는 거절이 영 어려웠다. 짝꿍은 속도 모르고 너 아니면 누가 하냐는 표정으로 배실배실 속없는 웃음을 건넸다.


  운동회 당일, 넓디넓은 운동장은 전교생의 열정적인 응원 소리로 가득 찼다. 영이도 터질 듯한 심장과 함께 힘껏 바통을 잡았다. 선선한 가을바람을 타고 모래가 일어난다. 영이도 떨리는 마음을 재료 삼아 열심히 발을 굴렀다. 영이는 무엇이든 맡으면 최선을 다하는 아이였다. 영이는 남들보다 머리 하나 크기만큼 길쭉한 몸으로 겅중겅중 뛰어 또래를 제치고 결승선을 통과했다. 곳곳에서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신체적 재능과 진심 어린 열의로 이룬 승리였지만, 어쩐지 영이는 그 승리를 만끽할 수 없었다. 늘 마음은 짧다랗기 때문이었다.  


   

  영이는 남들에게 불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신이 남들과 다름을 느꼈다. 짧은 이름 때문이었을까. 보편적이지 않은 것에서 벗어난 것은 영이의 마음에 외로움이 자리 잡게 되는 계기였다. 유치원에 입학할 무렵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서부터 영이는 남모를 서러움을 마음에 쌓았다. “너는 왜 이름이 한 글자야?” 낯설고 이상하다는 생각은 눈동자를 통해 여과 없이 전해졌다. 처음 만나는 아이들에 의해 받는 순수한 물음은 곧바로 상처로 남기에 충분했다. 영이는 집에 와서 가족들에게 내 이름만 왜 외자냐고, 와중에 키는 왜 또 이렇게 크냐고 울었다. 그렇게 흐르고 흘린 눈물을 뒤로, 시간도 흘렀다. 영이는 남들보다 이름은 짧다랗고 몸은 길다란 특별한 어른이 되었다.


  영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튀니 늘상 일반적인 것이 좋았다. 나의 개성과 취향을 키워내면서도, 보여지기에 자연스러운 것이 좋았다. 그래서 매사에 늦는 것도 기피했다. 내 옆 사람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고 평범하게 살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영이가 남들보다 대학에 한 해 늦게 들어가게 되었을 때가 있었다. 영이는 입학과 함께 조기졸업을 다짐했고, 정확히 3년 반이 지나 그 목표를 이루어 냈다. 영이는 졸업과 동시에 안정적인 길을 택하고는 금새 그 길을 향하더니 회사에 취직했다. 영이는 평범함을 위해 조급함을 불태우는 뜨거운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튀는 자신을 낯설어했다. 특히 어떤 첫 만남에서 그랬다.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 누군가와 마음을 나눌 때. 누군가에게 내가 기억될 때. 영이는 단순히 키 큰 여자로 단번에 정의 되기 십상이었다. 영이는 그게 싫었다. 일반적인 남성의 키보다 훌쩍 길다란 몸이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영이는 홀로 훤칠한 몸이 그리고 보여지기에 어딘가 어색한 몸이 이따금 부끄러웠다.


  우연찮게 발견한 훌라 수강생 모집 공고는 영이의 가슴을 흔들었다. 훌라는 내 몸과 친해지고 싶은 사람을 위한 춤이라는 문구. 몸치와 박치에게 가장 친절한 춤은 영이가 가장 좋아했던 어린 시절을 생생히 떠올리게 했다. 신나게 K-POP 아이돌의 춤을 따라 추고, 벨리 댄스, 발레 등 몸을 쓰는 것이라면 유독 즐거워했던 어린 영이의 몸짓이 점차 희미해질 즈음이었다.


  영이는 훌라와의 여정 동안 자신의 몸짓이 좋았다. 남들보다 기다란 팔과 다리로 큰 달을 그려내고, 깊은 파도를 표현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빛을 주변에 뿌렸다. 길쭉한 몸으로 한층 더 우아한 세상을 그려냈다. 종종 골반과 엉덩이를 움직이다 균형을 잃어 우스꽝스러워질 때도 그저 신나고 즐거웠다. 어떤 걱정도 부끄러움도 수치스러움도 영이에게 없었다. 음악을 들으며 느낀 감정을 몸으로 표현하고 그 움직임을 다시 발견하며 영이는 몸의 언어를 체득했다. 훌라를 함께 추는 친구들이 그리는 세상에 몰입하고 영이가 만든 몸짓으로 화답했다. 훌라 오하나들과 몸으로 세상을 담는 경험은 평화롭고 환상적이었다. 나보다 더 섬세한 몸짓, 강렬한 몸짓, 절도 있는 몸짓, 부드러운 몸짓, 열정적인 몸짓, 활기찬 몸짓. 몸의 형태는 다양하고 그에 담긴 이야기도 다양했다. 영이는 위로를 받았다. 나와 타인을 비교하지 않고, 잘하고 싶은 강박을 고수하지도 않았다. 훌라를 출 때면 오로지 영이의 몸에 익숙해지고, 그러다가 그 길쭉한 몸이 퍽 좋았다.


  훌라 수업의 끝에서,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야외 공원으로 향했다. 풀숲에는 주말을 만끽하기 위해 나온 아이들, 강아지, 커플과 가족들로 붐볐다. 우리는 신발과 양말도 벗어 던지고, 알록알록한 파우와 화려한 꽃목걸이와 머리핀을 했다. 축축한 흙의 감촉과 풀내음. 자연이 건네는 모든 손짓이 싱그럽게 느껴졌다. 이윽고 영이와 친구들은 동그랗게 서서 서로를 바라보며 훌라를 추었다. 맨발로 땅을 밟고 대자연을 오롯이 느꼈다. 우리가 만든 둥근 모양은 영이가 바라는 세상의 모양새였다. 예쁜 몸을, 탄탄한 몸을, 건강을 증진 시키겠다는 어떤 집념도 개입 없이 그만의 길다란 춤을 췄다. 영이는 둥근 세상에서 길쭉한 몸을 가진 것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여러 체형의, 여러 생김새의, 여러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적당히 삐뚤빼뚤 섞여 있는 세상. 둥그렇게 그려낸 우리 속에는 다양한 몸이 있었다. 수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적당히 느슨하게 사는 세계가 가장 조화로운 것이구나. 영이는 몸에 매몰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름을 포용했다. 영이는 자신을 환대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