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춥다. 원래 수술 할 때는 체온을 떨어뜨린다. 그때문인 것 같다.
‘지금 수술 중인 걸까? 근데 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
눈을 떠 주변을 확인하고 싶다. 하지만 뜰 수 없다. 지금 내 눈을 가리는 것은 마취당한 몸일까? 두려움에 떠는 정신일까?
‘수술은 제대로 되었겠지...?’
어설픈 지식들과 궁금한 것들이 머릿속을 휘젓기 시작한다. 아픈 뒤부터 계속 느끼는 게 하나 있다. 현실보다 더 무서운 것은 ‘상상력’이다.
‘혹시 여기가 말로만 듣던 사후 세계? 설마, 아니겠지. 추운 걸 보니 내가 죽은 줄 알고 영안실에 넣어버린 게 아닐까? 난 살아있는데... 에이, 아니야. 무엇보다 밀폐된 공간은 아니니까 빠져나갈 수 있어. 그나저나 수술진이 머리 열어보고 상태 안 좋아서 그냥 덮었으면 어떡하지? 춥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지? 왜 난 또 혼자 있고.’
침대가 움직인다. 수업종이 울려도 모른 채 떠들다 교실에 들어온 선생님에 놀라서 얼른 자리에 앉는 아이처럼 생각은 재빨리 현실로 돌아온다.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려왔던 그 길을 따라 돌아가는 것 같네. 살기는 한 모양이다. 근데 너무 춥다. 이제 중환자실 가려나. 들어가기 전에 엄마 한 번 보고 싶다. 아무래도 그건 힘들겠지?’
그때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동완아 동완아. 소리 들려? 내가 누구야?
엄마... 아빠... 지금 몇 시야?
9시야. 춥지는 않아?
12시에 수술을 시작했으니 9시면 9시간이 흐른 셈. 다른 건 몰라도 수술하다 그냥 덮은 건 아니라는 거다. 안심이다. 잠시 기쁨을 누리는 사이에 누가 대신 대답했다.
환자 분은 아직 못 느낄 거예요.
그래도 이거 해줘도 되죠?
네. 상관없을 겁니다.
갑자기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날 감쌌다. 한결 낫다. 수술 잘 받아놓고 감기 걸려 죽을 뻔 했다. 뇌부종을 가라앉히기 위해 스테로이드를 무진장 맞았다. 그러면 미성숙 WBC(White Blood Cell 백혈구)* 가 늘어나고 면역력이 약화된다. 앞으로 며칠을 누워있어야 할지 모르는 나에게 감염은 치명적이다. 누워있으면 가래 배출이 힘들어지고 배출되지 못한 가래는 폐로 흘러들어가 폐렴을 일으킬 수 있다. 어련히 의료진이 다 신경써주련만 괜히 불안했었다. 하지만 이제 따뜻해졌으니 별 일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누구길래 내가 못 느낄 거라고 말하는 거야. 난 지금 추위를 아주 잘 느끼고 있는데 말이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중환자실에 도착한 모양이다. 실내는 무척 밝았다. 머리에 남아있던 마취기운조차 강렬한 형광등 불빛에 밀려 쫓겨났다. 그 덕에 흐릿했던 시야도 몽롱했던 의식도 점차 또렷해졌다.
발가락을 움직여본다. 된다.
다리에 힘을 주어본다. 되는 것 같다.
허벅지에 손으로 글씨를 써본다. 된다.
아까 말도 했다. 그렇게 발음이 새는 것 같지 않다.
침? 침 안 흘리고 잘 삼킨다. 다 된다.
fine motor(소근육 운동)에 문제가 없다. 보행 가능여부는 당장 확인은 못하지만 fine motor도 되는데 gross motor(대근육 운동)가 안 될 리가 없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을 확인하고 있다. 내 두 눈으로.
수술 전에 했던 수많은 생각 중에는 미래 계획도 있었다.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장애의 상황과 그 속에서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검토했다. ‘눈’이 가장 문제였다. 후각, 청각, 미각은 없으면 굉장히 불편하지만 그래도 살 수 있다. 그러나 시각은 자신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운동 신경은 꽝에, 감각기관은 둔하기 그지없는 놈인데 눈마저 제 기능을 못하면 생존 자체가 힘들어보였다. 그런데 지금 눈, 보인다.
그 뿐일까? 손가락도 잘 움직여진다. 손가락을 쓸 수 있으면 생존 문제를 넘어 생계도 해결가능하다. 연구하고 책을 쓰면 어느 정도 수입도 거둘 수 있다. 자신 있다. 저작권 따위 전혀 없는 2차 창작물에 불과하지만 지난 3년 간 쓴 책만 해도 꽤 많다. 「장부(臟腑)로 보는 동의보감」, 「습담(濕痰)으로 보는 동의보감」, 「동의보감 정리 노트」와 같이 고전(古典)을 보기 좋게 도표로 정리한 책도 만들었고, 최신 논문들과 양방적 내용들도 가미하여 스터디 교재로 만들었던 「근육학 정리 노트」, 「다이어트 및 비만 노트」도 있다. 그동안 블로그도 열심히 운영하면서 모아둔 한의학 관련 포스팅만 해도 1000여 개는 된다. 전공서적이든 교양서적이든 노력만 한다면 어떻게든 먹고 살 방법이 나올 것이다.
(12 I see me in ICU Ⅱ 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