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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Dec 06. 2016

[단편소설] 어느 날, 오후

이별한 남자들의 찌질한 순간 (성시경 -《거리에서》)

('# 1~3' 합본입니다.)



 방학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내 머릿속에 기억이 남아있는 순간부터 난 늘 학생이었다. 이제는 아니다. 군대 다녀오자마자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고 붙었다. 야망이 없다며, 학교가 아깝지 않느냐는 주위 사람들의 타박이 있었지만 합격하니까 그 말들이 쏙 들어갔다. 처음으로 방학이 없는 한 해를 보내는 중이다. 비록 주5일제가 보장되는 신의 직장이라 칭송 받는 곳이지만 매일 출근 시간을 맞춰 준비하는 건 역시나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늘 주말을 기다린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토요일이었다. 원래는 가족끼리 가까운 곳에 드라이브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약속 잡을 생각을 안했는데, 누나가 뜻하지 않게 배탈 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사실 늘 이런 식이다. 처음부터 별 기대하지 않았다. 아마 누나가 아프지 않았다면 또 다른 이유로 약속이 없어졌겠지.


 내가 약속 잡아 놀러 가면 가족끼리 있는 시간이 적어짐에 아쉬움을 토로하시던 어머니지만, 그래서 가족끼리 약속잡고 어디라도 나가자고 하면 그건 또 여러 핑계를 만들어 미루곤 하셨다. 피곤하기 때문이다. 전에는 도통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는데 일을 시작하고 나니 이제 알겠다.


 결국 원하지는 않았던 과도한 여유로움으로 가득한 주말이다. 원래는 이렇게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휴식을 취하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싫어졌다. 결혼적령기가 되고부터 조급증이 도져 걸핏하면 식구들에게 시비를 거는 누나를 피하고 싶어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게 머가 중요하랴. 난 뜻하지 않게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과도한 여유로움이 생겼고, 그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누워서 하릴없이 졸다 깨다하니 잉여인간이 따로 없다.


 ‘나가야겠다. 일단 나가자.’



 시계를 바라보니 벌써 5시.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니 덥수룩한 수염이 눈에 띈다. 수염이 어찌나 빠르게 자라는지 하루라도 면도를 하지 않으면 산적이 따로 없게 된다. 깔끔하게 면도하고 샤워를 하니 내 의식을 짓누르고 있었던 ‘잉여로웠다는 죄책감’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얼마 전부터 가끔 끼기 시작한 렌즈도 한참 씨름한 끝에 겨우 착용을 마친다.


 곱게 다린 셔츠, 그 위에 니트를 덧입는다. 정장바지가 좋을까 면바지가 좋을까 하다 브라운 니트에 어울리는 면바지를 고르고 얼마 전에 한 댄디펌이 풀릴세라 조심스레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다. 거울을 보며 생전 바르지 않던 스킨, 로션, 수딩젤을 순서대로 바르고 BB크림으로 마무리.



 ‘이 정도 얼굴이면 중간은 가겠다. 못 생긴 얼굴은 아니야’


 20대 남성이면 누구나 한 번쯤 해본다는 자뻑도 잠시 해본다. 야상보다는 재킷이 어울리는 날씨다. 회색이 적당한 듯하다. 어제는 캐주얼화를 신었으니 오늘은 구두가 나을 법하다. 페라리 블랙으로 살짝 샤워하고 집 밖으로 나선다.


진우야 , 어디 가니?


 뒤늦은 어머니의 물음이 들리지만 대답하지 않는다. 왜? 나도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다 작년 이맘때의 내 모습이 슬며시 떠오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변하지 않은 곳이 없다. 외출할 때 항상 머리를 감았지만 수건으로 물기를 몇 번 털어내고는 그냥 나왔고 얼굴에는 그 흔한 스킨하나 바른 적이 없다. 렌즈 대신 안경을 대충 걸치고, 두터운 후드 티와 사철 내내 입고 다닌 청바지에 패딩 하나 걸치고 집 밖을 나섰을 것이다. 신발은 단연 운동화. 지난 세월 너무 무심하게 지냈다는 생각이 든다.


 ‘공부해야 했으니까.’



 시험에 합격하자마자 부모님과 함께 차를 골랐다. 지방에 근무지가 있어 어쩔 수 없었다. 중고차였지만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새 차나 다를 바가 없는 차. 그 차에 몸을 실었다. 누구를 만날까? 이제부터 찾아야 한다. 카카오톡 대화목록을 살펴본다.



 방금 전까지 메시지를 주고받던 혜성이. 1학년 때 과외 했던 학생이다. 가끔 섹드립을 날려놓고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즐기는 당돌한 제자였다. 나이 차이가 2살 밖에 나지 않아 그 말의 의도를 종종 헷갈려하곤 했더랬다. 매번 밥 사달라고 조르지만, 방금 전까지도 졸랐지만 지금은 서울에 있다. 대구에 있었으면 불러내서 밥 한 끼 사주었을 텐데 아쉽다.


 요즘 부쩍 친해진 은지. 원래 전해주어야 할 물건이 있어 만나기로 했지만 서로 시간이 잘 안 맞아 약속을 계속 미뤘다. 오늘은 친한 사람들이랑 생일파티 한다고 했었다. 점심 때 모임이 시작한다고 했지만 일찍 끝날 리가 없다. 지금쯤이면 파티의 클라이막스일 것이다.


 우찬이는 세상에서 제일 바쁜 종합병원 인턴이라 바빠서 나올 수도 없을 테고, 형식이는 중국 갔다가 오늘 밤에야 귀국한다. 한빛이는 나를 어장 관리하는 듯해서 연락하기가 싫다. 수의사 국가고시를 치고 한가로울 동진이에게 전화를 했다.


머하노?
집에서 밥 먹는다.
나온나, 탁구든 볼링이든 치자. 아니면 술 먹든지.
싫다. 내 국시 떨어진 것 같다. 이번에 합격률 50%도 안 나올 것 같다. 합격발표 날 때까지는 집 밖에 안 나갈 끼다. 여친도 안 만나고 있구만.
누구 만나든 안 만나든 니 합격이랑 먼 상관이냐. 그리고 여친은 여친이고 난 나지. 그냥 좀 나와. 야박하네.
누가 더 야박하냐. 니는 그냥 내가 합격하기나 빌어도. 오늘은 못 나간다.
니 떨어지라고 고사지낼 꺼다. 알았다 끊어라.


 초중고를 같이 등하교 했었던 정재한테 전화를 하려다 그만둔다. 얼마 전에 토익 준비 때문에 서울에 간다고 했었던 게 기억이 난 탓이다. 친한 선배에게 갑자기 전화하려니 일이 너무 커지는 것 같고, 친한 후배는 저번 주에 만났었다. 또 부르면 잉여처럼 보일 것 같다. 스터디하면서 같이 취업에 성공한 멤버들에게 전화를 할까 했지만 포기한다. 갑자기 불러내기에는 다들 일정이 바쁘리라.


 ‘이렇게 만날 사람이 없나?’



 카카오톡에 가득 찬 친구목록과 당장 만날 사람이 하나도 없는 현실이 대비되어 더욱 처량하다. 이렇게 차려입고 집 밖에 나왔는데 도로 집에 기어들어가기에는 쪽팔린다.


 ‘일단 나서자.’



 초보운전을 크게 써 붙인 차를 몰고 어둡고 혼잡한 거리 풍경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영화 봐야지.’


 최근에 영화 볼 일이 잘 없었다. 마침 집 근처에 큰 영화관도 있다. 영화만큼 시간이 잘 가는 것도 없을 터. 조심스럽게 주차를 하고 영화관으로 올라갔다. 알콩달콩 꽁냥꽁냥 연애하는 커플들이 곳곳에 보인다. 귀엽다. 예쁘다. 영화 시간표를 보니 적당한 영화가 없다. 보고 싶은 것은 시간이 없고 보고 싶지 않은 것조차 자리가 없다. 얼른 어플을 켜서 근처 다른 영화관 시간표를 보았지만 상황은 별 차이가 없다. 재수가 없으려니 혼자 영화 보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목적지를 잃고 다시 방황하기 시작한다. 갓길에 잠시 차를 대고 다음 목적지를 생각하는데 버스가 내 앞에 정차했다. 그녀의 집 앞으로 가는 버스. 무언가에 홀린 듯이 따라가기 시작했다. 찌질한 행동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때로는 그 것이 어떻게 비춰지는지 알면서도 하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목적지가 정해지니까 착잡했었던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갈 곳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이렇게 편안해질 수 있음을 체감한다.



 익숙한 그 곳이다. 마지막, 그녀와의 마지막 순간을 보냈던 그 곳. 두 달이 지난 지금 혼자서 찾아왔다. 언제나 이별은 한두 발짝 뒤에 찾아온다. 그림자처럼. 근처 주차장에 차를 대고 그 거리를 거닐어본다.



 떠난 그녀를 붙잡기 위해 그녀가 이별을 고했던 그 다음 날, 나는 아무리 전하려 해도 전해지지 않을 문자하나 보내놓고 그녀의 집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렸었다. 그 날 내가 그녀에게 전해주었던 편지를 썼던 곳. 그녀의 집 앞 까페로 발걸음을 옮긴다. 걸으면서 생각은 한 달 전으로 되돌아간다.


 그녀와 헤어지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때 스터디 멤버들과 연말 송년회를 회식을 했었다. 하필 그녀와의 추억이 가득했던 그 장소에서. 마침 카 오디오에서는 성시경의 ‘거리에서’가 흘러 나왔고 나는 심란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부끄럽게도 모두의 앞에서 감정을 흘려버렸다. 그 날의 기억이 머리를 잠시 스친다.



 아무도 없는 거리를 혼자 걷다보니 쓸쓸하다. 텅 빈 공간을 《거리에서》 음악으로 채워본다. 마치 영화 속 비련의 주인공인 된 것 마냥 찌질함을 한껏 즐긴다. 까페에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가다 문득 그녀와 마주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든다.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과 마주 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뒤섞여 어지럽다. 하지만 이내 마음은 결정되었다.


 ‘까페에 그녀가 있다면 아마 누군가와 함께이지 않을까? 그 모습은 보기 싫어.’



 멍청한 다리는 마음의 명령을 잘 못 알아듣고는 나를 까페로 인도했다. 그녀와 마주보고 앉았던 그 자리에 잠시 앉아 커피를 마신다.


 ‘내가 여기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혼자 앉아있건만 내 앞에 그녀도 커피를 홀짝인다. 사진도 거의 남아있지 않기에, 보고 싶은 마음만이 남아있는 줄 알았는데 내 뛰어난 기억력이 그녀를 되살려버렸다. 참 잊기 힘든 사람이다. 하긴 잊으려 노력해본 적도 없었다.



 그녀는 오지 않았다.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까페에서 빠져나와 그녀 집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길가에서 3년 만에 찾아왔다는 개기월식이 있었던 날, 우리는 순정만화 속 주인공처럼 애틋한 헤어짐을 겪었다. 헤어지는 것이 너무나 아쉬워 서로 발걸음을 돌리지 못한 채 마주보고 서서 30분이나 있었다고 말하면 어느 누가 믿을까. 우린 그런 쌍팔년도 로맨스를 즐겼다. 그 때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망울, 너무나 아름다웠던 눈망울이 또다시 떠오른다.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하루 이틀 못 보는 것 가지고도 힘들어 했었던 우리였는데 지금은 나 혼자 그 곳에서 그 날을 생각한다. 달빛 아래에서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했었던 키스. 그러고 보면 그녀는 달을 참 좋아했었다.



 조금 더 걸으니 어느새 그녀의 집 앞이다. 주말에 늦은 저녁시간인데 그녀는 집에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지금 듣는 노래가사처럼 어디쯤에 머무는지 또 어떻게 살아가는지. 누가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혹시 마주치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두려움을 가지고 집 앞을 지나친다. 주위를 걸어본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 들리는 적당한 BGM이 나의 찌질함을 한층 증폭시킨다.



 함께했던 그 시간들, 거리거리마다 묻어있는 추억, 우리 발걸음이 나란했던 익숙한 거리, 아무도 없는 텅 빈 거리에서 혼자 살아난 설레임만이 갈 곳 잃은 채 공연히 내 가슴만 두근거리게 한다. 참 잊기 힘든 사람이다.



 그녀의 집근처 공원. 헤어짐이 아쉬워 여기 벤치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마을 회관 앞에 정자가 보인다. 그 곳에서 엄한 집안 분위기에 대해 힘들어하는 그녀를 위로했었다. 나의 집안 분위기 또한 엄했기에 그 마음 십분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런 집안 분위기 속에 숨 쉴 틈을 만들기 위해 했었던 수많은 노력에서 우리는 공통점을 많이 찾을 수 있었다.


 감수성이 풍부해지는 어두운 밤, 공감 속에 전달되는 그녀를 향한 나의 진심, 그녀 앞에서만 서면 나도 모르게 음유시인처럼 흘러나왔던 말솜씨.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그녀의 눈에서 하트가 쏟아져 나오게 만든 날이었다. 그 날에도 그녀의 눈망울은 어김없이 참 예뻤다. 다만 그 다음 날 나에게 이별을 고했었다는 것은 빼고. 그 때는 다시 붙잡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녀는 나에게 마음을 모조리 열고 줄 것 같은 위기에 닥치면 나에게 이별을 고하곤 했다. 짧은 연애 기간 동안 3~4번은 되었다. 마음을 준 상대에서 크게 배신이라도 당한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일까? 양치기 소년처럼 이별을 고했었던 그녀였기에 마지막 이별의 순간조차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시 잡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처음에는.


 ‘좋게 생각하자. 그 말은 즉, 내가 잔뜩 날을 세우고 있는 그녀의 마음을 3~4번이나 넘게 함락시켰다는 것이다. 그만큼 난 매력적인 사람이었던 것이고.’



 조용한 길가를 걸으며 한 곳 한 곳 추억을 되새기며 걷는다. 오랜만에 마주치는 추억이 반갑다. 잊은 줄만 알았는데, 옆에서 그녀가 속삭이는 목소리도 함께한다. 환청인 것을 알면서도 그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듣고 싶어 살며시 눈을 감는다. 나처럼 그녀도 가끔 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그랬으면 좋겠다. 함께 했던 시간이니만큼 그 시간은 나만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니까.


 수많은 니 모습만 가득한 텅 빈 거리, 그 익숙한 거리를 발길이 이끄는 대로 걷다보니 어느새 현란한 네온사인이 가득한 번화가가 내 눈을 어지럽힌다. 우리는 이 곳에서 데이트를 많이 했다. 같이 갔던 ‘Coffee U’ 까페에 들어갔다. 메뉴판을 보니 딸기 관련 상품이 주력 메뉴임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딸기를 무척 좋아했다. 전에 여기에 왔었을 때는 딸기가 제철이 아니어서 많이 아쉬워했었다. 그 날 그녀가 먹지 못했던 그 메뉴를 주문해본다.


 어제 퇴근하면서 들린 마트에서 제철을 맞이한 싱싱한 딸기를 한가득 샀다. 아직 사귀고 있었다면 지금 같이 먹을 수 있을 텐데. 그 때 조금만 기다리면 먹을 수 있다며 이야기했었는데 이제 조금이, 조금이 아니게 되었다. 음료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야외테라스에 잠시 나가 앉았다. 우리가 솜사탕 빙수와 와플을 나누어 먹었던 그 자리다. 그 날 이후로 처음 오는 곳이지만 나에게는 이보다 친숙할 수도 없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나는 몰래 사진 찍으려고 시도를 많이 했었다. 그 날도 그녀의 얼굴을 간직하고자 몰래 동영상을 찍으려 했었는데 눈치를 빨리 챈 바람에 실패했다. 얼굴을 담는 것은 실패했지만 그 동영상에는 목소리만큼은 담겨있다. 실패작이라고 지우려다가 귀찮아서 안 지웠던 그 동영상을 그녀가 가끔 그리울 때면 듣고는 했다. 지금 그 자리에 앉아, 그 자리에서 찍었던 동영상에 담긴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본다. 비련의 남주인공 연기에 완벽히 몰입한 내 모습에 잠시 실소를 지으며 테이크아웃한 잔을 들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춥다.



 조금만 걸으니 순대집이 나왔다. 잇따른 야근에 힘들어하며 피곤에 찌든 그녀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주었던 날 여기에서 식사했었다. 그 옆 건물에는 그날 갔었던 동전노래방이 자리 잡고 있다. 노래방 가는 것을 죽도록 싫어했었던 나였지만,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날 만난 그녀가 간절히 바랐기에 거부할 수 없었다.


 마지못해 간 노래방에서 나는 허밍 어반 스테레오의 《하와이안 커플》을 불렀다. 상큼한 목소리로 나와 장단 맞추던 그녀. 지금은 없다. 우리가 함께했던 그 자리에서 그 때 그 노래를 털어놓고 그 날의 기억을 반추한다. 발랄한 노랫가락이 날  더 처량하게 한다.

 한참을 걸었다. 이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으니 괜스레 아쉽다. 찌질하게도 내가 왔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 암호처럼 나의 흔적남기리라. 난 그녀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자주 주었다. 조성모의 노래 《Mr. flower》의 가사처럼, 내가 주었던 꽃이 시들어 그 운명을 다할 때가 되면 다른 핑계를 붙여서라도 다시 한 송이를 선물했던 게 습관 아닌 습관.


 그녀는 함께 했었던 마지막 날, 나를 ‘시(詩)’로 기억하겠다고 했다. 문학 작품을 좋아했었던 우리였기에 종종 좋은 시들을 그녀에게 보내준 것이 기억에 많이 남은 듯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시는 자주 마주치기 힘든 소재이다. 나는 그녀에게 자주 기억되고 싶다. 시보다는 ‘장미꽃 한 송이’로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녀의 집 앞에 장미꽃 한 송이 놔두고 갈 것이다. 이 정도면 내가 왔다간 것을 알겠지.


 ‘장미를 보면 그녀는 나를 떠올릴까? 어떤 마음이 들까? 슬플까, 화날까, 미안할까.’



 잔잔한 연못처럼 고요해져가는 그녀의 마음에 돌을 던진 나쁜 행동이란 걸 안다. 그녀를 힘들게 할 수도 있는 이기적인 결정이다. 알면서도, 알면서도 할 것이다. 그녀가 내 생각을 한 번이라도 더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순간은 내 마음을 위해 내 마음대로 움직일 것이다.


 가장 가까운 꽃집을 검색하고 열심히 걸어갔더니 문이 닫혀있다. 한참을 헤맨 끝에 문이 열린 꽃집을 찾아 장미꽃 한 송이를 사고, 나임을 암시하는 메모 하나 남긴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그녀가 동전 노래방에서 열창했었던 그 노래다. 예쁘게 포장된 장미꽃에 메모지를 곱게 접어 넣어둔다. 이제 그녀의 집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꽃집은 지하철역 근처에 있고, 그녀의 집은 여기서 30분은 넘게 걸어가야 있다. 택시를 타고 갈까 하다 걸어가기로 마음먹는다. 내 다리가 그 길을 기억할 것 같다. 김유신의 말조차도 천관녀의 집을 잘 찾아갔는데 내 다리가 그 길을 기억 못할 리 없다.


 ‘이 거리에는 그녀가 없다. 그녀와 함께 한 기억을 추억하는 나만 여기에 있을 뿐.’



 여기는 내가 택시에서 휴대폰을 두고 내린 날, 내 휴대폰을 주우신 분과 만났던 골목이다. 당황함에 정신없었던 그 순간 함께 했었던 그 곳. 이처럼 장소 하나하나 거리 하나하나에는 추억이 담겨있다. 아까부터 계속 듣고 있는 《거리에서》. 이보다도 더 적절한 선곡이 있을까 싶을 만큼 나와 똑같다. 내 이야기를 듣고 노래를 만든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리고 그 착각 속에 빠진 내가 잠시 한심하여 실소가 터져 나온다.



 어느새 그녀의 집근처. 30분이 넘는 그 거리를 잊지 않고 있는 내 자신이 대견하기도, 못나보이기도 한다. 헤어진 다음에 가장 하면 안 되는 것 중에 하나가 자기연민이라는데, 오늘 여기에 너무 많이 빠진 것 같다. 내일부터는 원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리라.


 마지막 골목만 돌면 그녀의 집근처. 그 골목에서 차 한 대가 내 옆을 스쳐지나간다. 조수석에 앉은 여자의 실루엣이 꼭 그녀인 것 같아 정신이 번쩍 든다. 멀어져가는 차를 계속 보게 된다. 따라가서 확인해보고 싶지만, 진짜 그녀일까 무섭기도 하고 아니면 아닌 대로 곤란하다는 자기합리화를 하며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이럴 때면 용기 없는 내가 많이 밉다.



 다시 도착한 그녀의 집 앞. 떨리는 마음으로 우편함에 장미꽃을 꽂아 넣는다.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아 수없이 고치고 고쳐보지만 만족스럽지 않다. 부산한 나의 행동 때문에 혹시 그녀가 밖으로 나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마음만 바쁘다. 이 모습으로 마주치고 싶지는 않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준비는 다 되어 있지만 이 상황은 아니다. 다시 만나더라도 조금은 멋진 상황에서 만나고 싶다.



 대충 마무리하고 돌아선다. 부풀은 내 가슴을 뒤로하고 밤하늘을 바라본다. 그녀가 좋아했던 달, 그 달빛을 한 몸에 받아본다. 수많은 생각들이 동시에 내 머리를 휘감았다 떠난다.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굳이 잘 해야 할 필요가 있나. 내 마음이 시킨 대로 했으면 되었다.’



 그렇게 그녀와 함께 걸었던 그 거리를 다시 한 번 걷다 아까 주차해둔 차에 내 몸을 싣는다.


 ‘이제 집으로 가야지, 여느 때처럼. 오늘 잘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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