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봄에의 열망》
달력의 마지막 장이 낙엽의 신세가 되어 초라하게 달려 있다. 설경(雪景)이 그려져 있다. 오늘밤쯤 혹시 눈이 오려나, 날이 침침하다.
막연히 눈을 기다려 본다. 세월 가는 소리라도 듣자는 걸까? 올 1년은 산 것 같지도 않고 잃어버린 것 같다. 실물(失物)을 한 허망함과 억울함. 그러나 신고할 곳은 없다.
(박완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175p)
언제부터인가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으면 마치 거창한 일이라도 하는 양 준비 작업이 길다. 점점 길어진다. 글 쓰는 게 두려워진 탓이다. 부족한 글 실력을 붙잡고 전전긍긍할 그 시간을 되도록 늦게 맞이하고 싶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글이 잘 써졌다. 아마 내가 소설 속 주인공 같은 시간을, 많은 사건 속에서 보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지금은 어느 것도 벌어지지 않는 평온한 일상이다. 이제는 여기에 익숙해져 폭풍 같던 시간도 산들바람처럼 느껴져 복원이 영 힘들다.
어제는 몇 줄 쓰지도 않았는데, 눈앞에 어지러이 놓인 메모들이 영 거슬려서 치우다가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달력을 발견했더랬다. 작년 말 준수 형이 직접 만든 달력. 형의 평소 솜씨도 알고 있고 샘플로 보여준 사진도 예뻐 주변에 선물하려고 많이 샀었는데 미처 다 나눠주지 못하고 남은 거였다.
먼지가 하나도 묻지 않은 깨끗한 달력. 달력은 아직 1월을 가리키지만 어느 새 연말이 코앞이다. 지난 1년을 난 어떻게 보낸 것일까? 퇴원 후 치료가 끝날 때까지 난 무얼 했는가. 긴 시간동안 하고자 했던 것들이 참 많았는데, 다 할 줄 알았는데 사람 참 쉽게 안 변한다. 어쩔 수 없는 천성인가 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 동안 발목 잡던 음치도 어느 정도 탈출했다.
무언가 잔뜩 잃어버린 것 같은 허망함도 들고
무언가 잔뜩 얻은 것 같은 충만함도 든다.
모순된 감정은 아닐 것이다. 잔뜩 잃고 그만큼 또 얻은 것 같다. 가지 못한 길이 더 아름답고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못난 심보는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꽤 괜찮은 거래라고 위안 삼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