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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Mar 31. 2017

[소설]내려놓음 124 4cycleⅡ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124 4cycleⅡ






 공보의 1년차 때 근무한 보건소는 읍내에 있었다. 기껏해야 한 시간에 한 대 있을까 말까 하긴 했지만 그래도 버스가 다니기는 해서 환자들은 그것을 타고 많이 보건소를 찾았다. 그러나 2년차 때 있었던 지소는 버스가 거의 다니지 않아 몇 십분을 걸어서 오시거나 아들이나 딸이 차로 모셔다 드리는 경우가 많았다. 개중에는 직접 트럭을 몰고 오시는 할아버지도 있었지만 나의 눈에 가장 신기하게 보였던 분은 어디서 구하셨는지 골프장 카트를 몰고 오시는 노부부였다. 속도도 꽤 빠르고 천으로 된 천장은 햇빛과 바람을 적절히 가려주어 누구의 기지인지 몰라도 참 잘 생각했다 싶었다. 4인승이라 뒷자리에 동네 할머니를 달고 오는 경우도 잦았다. 아내를 진료실에 보내 놓고 밖에서 담배 한 대를 태우며 뒷짐 지고 서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에는 기품이 흘렀다.


 수술을 앞두고 여러 가능성 앞에서 번민하고 있을 때, 내 머릿속엔 이 장면이 자꾸만 재생되었더랬다. 하고많은 비슷한 장면 중에서 유독 그 장면이 운명처럼 끌렸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진료실 베드에 뉘여 놓고 밖에 나가 자신이 내쉰 흰 한숨을 막연히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뒷모습에서 풍겨지던 고단함이 현실로 다가올 것만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나는 두려웠다. 육중한 나의 몸을 원망했다. 평소에도 원망하기는 했지만 그때만큼 원망해본 적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다. 바퀴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짐이 된 나와 나를 보살펴야 할 가족들. 그 상황이 너무 무서웠다.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 더 그랬다.



 5년 전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의 생신이었던 음력 칠월 초하룻날, 같이 화투도 재미있게 치고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그해 여름에 거창 개울가에 놀러갔었던 이야기도 들었는데 중간고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돌아가셨으니 모든 일이 3달도 채 안 되어서 일어난 셈이다. 병원에서는 그 당시 우리들에게 치매라고 이야기 했지만, 나중에 공부를 해보니 섬망(譫妄)이 아니었나 싶다.



섬망(譫妄, delirium) : 열병, 전신감염, 대사장애 등으로 인해 오는 급성 뇌증후군

<특징>

밤에 더 심함

기복이 심함 (정신이 나는 듯한 순간과 의식이 희미해지는 순간이 교대로 엇갈리기도 함)

지남력의 상실, 환각, 감정 장애 (주로 공포) 등의 증상을 보임



 할아버지는 일반인에게는 정말 이상하지만, 전공자에게는 정말 전형적인 증상을 보이셨다. 낮에 몽롱하게 신음소리만 내며 누워 계시다가 밤이 되면 응축시켜둔 에너지를 내뿜으셨다. 애초에 가족들이 할아버지에게 무언가 심상치 않은 변화가 있음을 알게 된 것도 멀쩡하시던 분이 갑자기 오밤중에 길거리를 배회하시다 허리를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하면서였다. 아픈 할아버지를 위해 지근거리에 있는 우리 식구와 이모네 식구가 간호했는데 주로 낮에는 이모가, 밤에는 아버지가 곁을 지켰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셨기에 더 마음이 애달팠던 어머니도 퇴근만 하면 병원으로 달려가셨다. 그 상황에서 병원에서는 할아버지를 커버하기 힘들다며 요양병원으로의 전원을 요구했고 원거리에 있어 간호에 일조하지 못했던 외삼촌은 그러기를 원했다. 그러나 요양병원에 보내는 것은 고려장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이던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린 아버지는 극렬하게 반대했고, 결국 가시는 날까지 할아버지 곁에는 항상 가족들이 함께 했다.


 그 당시 대학생이던 나는 병간호 업무에 있어 한 발 빠져있던 못된 손자였는데 딱 한 번 아버지의 대타로 사촌 형과 함께 할아버지의 밤을 지킨 적이 있었다. 시작은 순탄했다. 할아버지는 앓는 소리를 내쉴 뿐 별 미동도 없으셨다. 그냥 의자에 앉아 시험공부를 해도 무방할 정도. 문제는 역시 밤이었다. 병실의 불이 하나둘 꺼져가자 할아버지께서는 누가 불쌍하다고 나눠주기라도 한 걸까 낮 동안 없었던 생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소싯적 시절로 돌아가 주주 총회를 열더니, 최 이사와 무슨 악연이 있었는지 십여 분을 다투기도 했다. 그러다 잠시 잠잠하시더니 또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주총을 열기를 반복했다. 토사구팽 당한 회사에 미련이 많이 남은 듯 했다. 그런데 갑자기 할아버지께서 울부짖기 시작하셨다. 최 이사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외치셨다. 풀리지 못한 마음의 응어리가 해결되어야 멈출 것 같은 에너지의 폭발이었다. 몇 십 년이 지난 지금, 의식조차 없는 지금까지 당신을 지배하는 기억이라면 그 순간이 얼마나 큰 상처로 남아 있었을까. 당신이 원하시는 데로 최 이사 멱살도 붙잡게 하고 한 방 먹일 수 있도록 돕고 그렇게 하는 게 마땅했다, 비록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그러나 할아버지의 팔에 달린 링거들은 우리로 하여금 최 이사 편에 서서 당신을 말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그 와중에도 가슴을 계속 치셨다. 정신을 잠시 잃으셨을 때 다친 허리로 인해 TLSO를 착용하고 계셨는데 그게 무척 답답하신 모양이었다. 자신의 몸통을 강하게 압박하는 갑옷을 부서져라 두드리는 할아버지를 보고 있노라면, 곧 갑옷을 깨뜨리고 당신이 원하는 해방감을 맛보게 되지 않을까 덜컥 겁이 났고, 그러면 또다시 말리는 수밖에 없었다.



TLSO (thoraco-lumbo-sacral orthosis, 흉요 천추 보조기)


 할아버지의 키는 170cm나 되어 옛날 분 치고는 굉장히 크신 편이었다. 그렇지만 발병 이후로 곡기(穀氣)를 끊다시피 하셨고 모두가 달라붙어 죽을 입 안에 흘려 넣어야 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할아버지는 점점 말라가셨고, 링거를 통해 간신히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받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할아버지께서 밤에 활발하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드신 것도 없는데 힘이 어디서 날까, 할아버지를 화장실로 모시고 갈 때 좀 힘들겠네.’ 생각하고 나섰던 형과 나였다 그러나 뼈만 앙상하게 남은 할아버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건장한 20대 남자 두 명이 감당하기에도 버거웠다. 시방 할아버지가 맹렬히 태우고 있는 것은 당신의 몸이 아닌 영혼인 것만 같아 어떻게든 그분을 진정시키고 싶었더랬다.


 그렇게 폭풍 같은 밤을 보내고 6시 즈음 날이 밝아오자 밤에 당신께 생기를 준 녀석이 악령이기라도 했던 건지 창 밖에 햇살이 비치자 이내 잠이 드셨고, 나는 지금이 여름임에 감사했다. 형이 다 하고 살짝 거들기만 했을 뿐인데도 체력이 달려 당장 집에 가서 눕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아니, 이 힘든 시간을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도 함께 했다. 병문안 갈 때면, 옆방의 환자나 보호자들이 아버지를 많이 칭찬했다. 할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우고 자주 산책 나가고 극진히 잘 보살핀다고 말이다. 그때는 그냥 그렇구나하고 넘어갔었는데 막상 경험해보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 힘든 일을 자처하고 나셨던 아버지가 정말 위대해보였다. 아픈 사위를 위해 야채수를 손수 끓였던 외할아버지와, 장인의 똥오줌 수발까지 마다하지 않고 나섰던 아버지. 지금까지 어느 누구의 이야기이든 지어낸 이야기이든 간에 이처럼 아름다운 장서 관계는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고 말한다면 그건 과장일까?

 이처럼 나에게 그 날의 기억은 따뜻함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기억이, 수술을 앞둔 나에겐 결코 긍정적이지 못했다. 계속 생각했었다.



 ‘할아버지보다 10cm는 더 크고 몸무게는 2배가 되는데 누가 나를 보살피고 또 억제할 수 있을까?’


 1년 전 이모가 아기를 돌보아주다가 손목이 나간 일도 떠올랐다. 10kg 내외의 아가의 꼼지락거림에도 사람이 다치는데 하물며 20대의 건장한 남성이 그런다면 주변 사람 몸이 남아날까. 침 맞으러 오는 할머니들이 침 맞고 침대에 누워 자식 고생시키기 싫다며 멀쩡히 잘 지내다가 때 되면 자다가 끝을 맞이하고 싶다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던 것이 이거였구나, 그 말이 그렇게 공감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치매 따위에 대한 공포는 내가 그들보다 더 했으리라. 그래서 빌고 또 빌었다. 병신으로 만들 거면 그냥 죽여 달라고.


 그 날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의 나 또한 다르지 않다. 이 모든 게 꿈이고, 잠에서 깼더니 수술을 앞둔 그 시점이라한들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난 내 목숨보다도 내 체면(體面)을 소중히 하는 놈이니까, 내 몸[體]과 얼굴[面]을 통해 비추어졌던 내 영혼이 더 소중하니까. 본능만 남은 짐승이 내 껍데기를 쓰고 주변 사람을 괴롭히며, 이전의 내가 그 껍데기로 표현해온 내 영혼의 기억을 야금야금 더럽혀 나간다는 미래는 죽음보다 더 싫은 결말이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 그 기억을 가지고 올바른 사고를 하며, 두 눈으로 보고 두 발로 걸으며 두 손으로는 땀을 훔치고 있다. 모든 게 감사하고 행복하다. 외치고 싶다. 세상이 너무 아름답다고, 살고 싶었다고, 그리고 지금 살아있다고.


 살아 숨 쉬고 생각하고 걸어 다니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던 어느 여름날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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