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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Mar 31. 2017

[소설]내려놓음 128 책에서 위로 받다.Ⅰ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128 책에서 위로 받다.Ⅰ






 인내심이란 놈은 원래 그런 것일까. 어떤 것이든 80% 정도 진척될 때까지는 툴툴거리면서도 자리를 지켜주지만 그 이상이 되면 항상 도망쳐버리고 없었다. 다이어트도 10kg을 빼겠다고 마음먹으면 8kg에서 끝이 났고, 과제도 시험공부도 목표량의 8할이 채워졌다 싶으면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영화관에서도 슬슬 지겨워 몰래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면 30분 정도 러닝 타임이 남아 있곤 했다. 그래서 계획을 120%로 세우면, ‘1.2 * 0.8 = 0.96’이니까 얼추 맞지 않을까 했는데 귀신같이 80% 근방이 되면 눈치를 채고 도망가는 걸 보면, 그렇지 않아도 별로 없는 눈치를 이 놈이 박박 긁어다 가져간 게 분명했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총 6cycle 중 5cycle이 끝나자 이때다 하고 인내는 도망갔다. 빈 자리가 컸다. 조급해졌고 곧 답답해하기 시작했다. 방사선 치료의 끝을 기다리던 그 때처럼 속이 타들어갔다. 그렇다고 항상 그날이 빨리 오기를 바랐던 건 또 아니었다. 약을 먹는 5일간 겪을 일들이 그리 녹록치는 않기에 서서히 와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는 지경에 이르렀다. D-day가 빨리 왔으면 하는 마음과 천천히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공존하는 양가감정의 상태. 이렇게 마음이 시시때때로 자반뒤집기를 일삼으니 감정기복도 점차 심해져 별것 아닌 일에도 드잡이질에 걸고넘어지기 일쑤였고 한 번은 동생을 울리기까지 했다. 그런 주제에 잠은 또 잘 잤더랬다.



양가감정 (ambivalence)
두 가지의 상호 대립되거나 상호 모순되는 감정이 공존하는 상태.

흔히 두 가지의 반대되는 가치·목표·동기 등이 공존할 때 이를 가리킴.


ex)

동일 대상에 대해 애정과 증오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애증(愛憎)의 상태

다이어트 시, 식욕과 식욕을 감내하려는 의지가 동시에 발현 



 그런 하루들이 반복되던 어느 날 아침, 동생의 비명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또 늦잠을 잤구나, 생각하며 문을 열어보니 역시나였다. 과제 때문에 일찍 나가봐야 하는데 늦었다고 야단법석이었다. 왜 안 깨워주었느냐며 신경질 내는 동생과 어안이 벙벙한 아버지와 나. 일주일에 한 번꼴로 벌어지는 익숙한 풍경이다. 대학생이나 되어가지고 가족들이 깨워주지 않아 지각한다며 악다구니 쓰는 동생을 뒤로하고 나도 나갈 채비를 했다. 학교까지 태워주기 위함이다.

 ‘늦어놓고 늦는다고 우는 건 또 머람. 그럼 더 늦어지는데. 하여간 이해가 안 돼요.’


 면도하는 나의 귓가에 들리는 동생의 울음소리. 감정 표현에 능한 동생이 부럽다. 고치고 싶은 성격이 무엇인지 누가 물으면 나는 항상 화를 잘 못내는 점을 들었다. 그게 황희 정승 마냥 마음이 넓고 너그러워 화가 안 난다는 게 아니라 감정은 새끼줄 마냥 배배 꼬여놓고 표현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기에 문제였다. 밥솥이 열 받아 터지지 않으려면 적당한 방법으로 김을 빼줘야 하지 않은가? 난 그 적당한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화를 깔끔하게 표출하지 못하고, 대신 짜증으로 때로는 비꼼으로 드러냈다. 김을 확 빼내지 못하고 질질 흘려버리니 빠지는 속도가 영 느릴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뒤끝도 있고 꽁해 있는 기간도 길었다. 이렇게 마냥 억누르고, 또 삐딱한 방식으로 화를 표출한 탓에 뇌종양이 생겼던 것이 아니었을까 종종 추측하는 나로서는 차라리 동생의 울음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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