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방을 대청소했다. 대청소라고 해봤자 실은 어지럽게 널브러진 책들을 집어넣고 책장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는 게 전부다. 내 방의 짐들은 대부분 책에 불과하니까.
책상에 흘린 커피 몇 방울을 닦아내다 이 사단이 났다. 다른 것들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끈적이지 않을 아메리카노임을 감사히 여기며 흘린 자리를 닦아내었다. 닦아낸 휴지는 예의 그 갈색 빛이 아니었다. 책상에 먼지가 많이 있음을 알려주는 짙은 회색. 몰랐다면 모를까 안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 책상을 열심히 닦았다. 커피는 어느새 먼지 흡착을 위해 휴지에 수분을 공급해주는 용도로 변해있었다. 방안에 고소한 커피 향이 도는 것이 마치 까페에 온 기분이 들어 좋다.
손길은 책장에 살포시 내려앉은 흰 눈으로 향했다. 특히 잘 찾지 않는 책들이 꽂힌 책장에 내려앉은 먼지는 상당했다. 꼼꼼히 닦아내려면 책을 꺼내야 한다. 쏟아냈다. 나의 청소는 항상 이렇게 뜬금없이 찾아온다. 얼마 전 화장실 청소도 다 떨어진 샴푸통 교체하다가 타일 틈새의 물때가 눈에 띄어 시작했고, 부엌 청소도 가스레인지 주변에 눌어붙은 라면 국물이 나로 하여금 걸레를 집어 들게 했다.
평소에는 그냥저냥 더럽히면서 살지만,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한다. 그렇게 한 번 곶감을 잔뜩 저장해놓고 조금씩 빼먹다가 어느 순간 부족함이 느껴진다 싶으면 또다시 곶감을 만들어재낀다. 이번 작업은 꽤나 컸다. 죽은 공간처럼 쓰고 있었던 책장 위쪽까지 활용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충동구매해서 책을 사놓고 넣을 공간이 없어 책상 위에 얹어두거나, 책장 사이사이에 옆에 뉘어놓았는데 그게 꼴 뵈기 싫어졌다. 하루로도 모자라 이틀이 걸렸고 늘 그렇듯 쓸모가 적어 보이는 책들은 솎아내기 당했다. 한 벽을 가득 메운 책들. 뿌듯하다.
2년 전, 고령에 발령받으면서 태어나 처음으로 자취를 하게 되었다. 그동안 집에서 떠나 생활하는 것을 얼마나 꿈꾸었던가? 그때 내가 가장 먼저 산 가구는 책장이었다. 필요하기로는 책상이 더 먼저였지만, 때마침 다른 지소로 떠나는 형이 독서실 책상을 물려준 덕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암 선고로 운수 보건지소를 비워주어야 했을 때, 잃어버리거나 손상되지 않을까 걱정하게 만들었던 내 머릿속의 짐은 오직 컴퓨터와 책뿐이었다. 그밖에 옷가지나 그릇들은 안중에도 없었고 실제로 이사할 때 짐의 50% 이상이 책이었다. 다른 짐에 비해 책이 무거운 것을 감안하면 짐 무게의 7~80%는 아마 책이었으리라. 그만큼 나에게 있어 책의 비중은 컸다. 서정주 시인의 스물세 해를 키운 8할이 바람이라면, 나의 스물여섯 해를 키운 8할은 책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집에 책이 많았다. 집에 책장은 내 방에 3개, 동생 방에 4개, 드레스 룸에 2개가 있었는데 전부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것들이다. 20년 넘게 함께 있는 탓에 세월의 흔적이 잔뜩 남은 책장. 그 안에는 항상 책으로 가득했다. 그게 독특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 어디를 놀러 가더라도 집에 책이 가득했다. 소꿉친구 가은이든 일리든 모두 책이 많았다. 남의 집에 놀러 가서도 모든 책들을 번호 순서대로 배치해두는 게 어린 시절부터의 버릇이었는데, 그 작업을 다 끝내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경우도 빈번했었던 걸 보면 그 집에도 책이 많았던 게 분명했다.
그러다가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교류가 뜸해졌고 중, 고등학생 시절에는 남의 집에 방문할 일이 없었다. 학교 갔다가 학원에 가면 하루가 다 지나가있었으니까. 그러다 대학생이 되어 용돈벌이를 위해 과외를 시작하고 여러 집들을 방문하면서 알게 되었다. 우리 집이 남달랐다는 것을.
이틀에 걸친 방 청소를 하고 침대에 걸터앉아 한쪽 벽면을 가득 매운 책을 보았다. 뿌듯한 마음으로 책장 한 칸 한 칸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나의 성장을 느낀다. 책들의 헤게모니가 부모님에서 나에게로 넘어와 있었다. 부모님이 사주신 어린이용 책이나 각종 청소년 권장도서가 있던 자리에, 내가 사고 고른 책이 앉아있었다. 심심하던 차에 책들을 모두 헤아려 보았다.
- 순수문학 150여 권
- 교양서적 200여 권
- 전공서적 250여 권
- 교과서 50여 권
- 내가 직접 정리했거나 2차 창작한 것 30여 권
- 필요한 자료 및 논문 모음집 30여 권
-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 사주신 학습 만화 전집 100여 권
- 자리가 모자라 동생 방에 유배시켜 놓은 책 100여 권
1000권에 육박하는 책 중에서 부모님이 골라 사주신 것은 10% 남짓. 나머지는 대학생이 된 이후로 산 것이었다. 대학생활 6년, 12학기를 보내는 동안 용돈 받은 것은 총 4학기. 과외나 아르바이트를 하여 모은 돈으로 8학기를 보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도 없지 않아 영향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경제적 종속 관계를 탈피하고 싶었던 욕망이 더 컸다. 학창 시절 부모님은 나의 행동이 당신 기준에 들지 않다 싶으면 체벌이 아닌 용돈으로 응징하셨고, 그게 가슴에 너무나 사무쳤더랬다. 그래서 돈 문제는 악착같이 스스로 해결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졸업한 이후 공보의가 되었고 그 월급으로 살았다. 한 마디로,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은 내 힘으로 산 것이다. 물론 집에서 다니며 아낀 돈, 예컨대 월세라던가 식비를 근거로 부모님께서 지분을 요구하신다면 할 말이 없지만.
고양이 꼬리만 한 돈으로 생활비나 교육비를 내고 남은 빠듯한 돈으로 책을 사다 보니 학생 때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불법 복사 뜨는 일도 빈번했다. 또 전공서적과 교과서를 제외한 책들은 대부분 중고서점에서 구했다. 이렇게 사두고 보지 않은 책이 태반을 넘는 것을 보면, 읽을 책만 새것으로 샀어도 되었을 텐데 그놈의 수집벽이 문제였다.
이렇게 책을 1000권 가까이 사 모으는 동안, 내 책장이 비어있었느냐면 절대 아니었다. 그때도 가득 차있었다. 이번처럼 한 번씩 청소할 때마다 허름한 옛날 책, 시대의 흐름이 뒤처진 책, 나이에 안 맞는 책 몇 개씩 부모님 몰래몰래 내다 버렸고, 중고서점에 팔아 다른 책으로 바꿔오기도 했다. 특히 운수에서 짐을 가져올 때는 300여 권이 넘는 책이 버려졌고, 너무 더러워 보여 참다못해 동생 방을 대신 청소한 날에도 100권 넘게 버린 다음 내 책으로 채워 넣었다.
책 정리를 하면서, 그동안 구상하던 미래 계획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원래 나의 계획은 이러했다. 공보의 3년간 여러 서적들을 참고하여 침구 처방과 탕약 처방을 정리한 다음, 전역한 후 1년 정도 부원장 생활을 하며 정리 자료를 검토하여 진료 매뉴얼을 만든 다음 개원 준비에 들어갈 요량이었다. 그래서 대학생 시절부터 한의원 이름도 정해놓고 블로그 관리도 하며, 어떻게 스토리텔링을 하면 환자들의 공감을 쌓을 수 있을까 고민하곤 했다.
그러나 ‘뇌종양 판정’은 모든 것을 어그러뜨렸다.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피해야 하는 나. 개원은 개인 사업이고 따라서 스트레스는 필연적이다. 그리고 만약, 아주 만약에 종양이 재발한다면 한의원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실컷 돈 투자하고 인테리어 번쩍번쩍하게 해놓았는데 재발이 되어 진료를 할 수 없게 된다면? 초기 투자비용이 아까워 계속 들고 있기에는 다달이 나갈 비싼 임대료가 문제가 되고,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기에는 투자비용이 너무나 아깝다. 적어도 5년 동안은 페이 닥터 생활을 하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다.
신경외과 교수님은 이야기했다, 5년이 지났어도 안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추적 관찰을 해 나가야 한다고. 다른 암도 아닌 뇌종양. 그 단어가 주는 압박감은 컸다. 그래서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페이 닥터 생활을 그만두어도 초기 투자 비용이 적으면서 임대료도 덜 드는 시골에 개원하기로 마음먹었다.
‘Low Risk, Low Return.’
나름의 안빈낙도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돈보다는 시간이 많은 삶 속에서 글을 쓰는 내 모습을 떠올렸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는 내 마음에는 짙은 아쉬움이 깔려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선택에는 기회비용이 뒤따르는 법. 기회비용이 0인 선택은 없다.
요양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책으로 병원 몇 개 지을까 봐. 단편소설집을 내는 거지.
제목 『한남 요양병원』
제1장 204호,
제2장 301호,
제3장 305호.
이런 식으로 해서 연재하는 거지.
1년에 한 채씩 5개 지어놓으면 재미있지 않을까?
이렇게 주위 사람에게 농담 삼아 이야기했다. 그때 결혼한 친한 형이 물었다. 시골에서 개원하면 어디서 살 거냐고. 교육 문제 때문에 아무래도 아내는 대도시에서 살기를 원할 텐데, 그때 들어오는 심리적 및 경제적 압박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물었다. 당황해하는 나에게 형은 “너는 돈 많은 여자 만나라.”하며 나직이 한숨을 내뱉었다. 아이 아빠의 고단함이 묻어났다.
미래에 대한 생각이 너무 짧았음을 생각하며 그 후로 좀 더 고민을 했었다.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라 하고 또 했는데 쉽사리 결론나지 않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때 친구에게서 학창시절에 나를 괴롭히던 일진이 집에서 물려받은 주유소로 돈 잘 벌고 여기저기 놀러 다닌다는 소식을 들은 날, 나는 결론 내렸다.
자식 교육에 많이 투자하지 않겠다. 영어유치원, 조기유학, 국제중학교, 특목고, 자사고와 같은 특별한 길보다는 그냥 평범하게 키우겠다. 특별함을 위해 투자해야 할 노력과 돈 모두 모아두었다가 대학교 졸업 이후에 주겠다.
적어도 내가 지금껏 살아온 인생에서는, 온 가족이 십 수 년간 마음고생하고 노력하면서 연봉 6000의 능력을 가지게 된 이보다 연봉 3000이어도 집 한 채를 들고 시작한 이가 더 편했다. 자식이 스스로 원하는 게 있다면 그것이 과외이든 학원이든 모두 들어주겠지만 나서서 시키지는 않겠다.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다.
대구 인근의 고령, 성주, 칠곡, 청도 같은 소도시에서 페이 닥터나 조그마한 개인 한의원을 차려서 지내겠다. 집값도 좀 싼 곳에서 여유롭게 살겠다. 그곳에서 여행 자주 다니고, 책이 가득한 집에서 책을 쓰고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며 자녀에게 책을 읽어주는 아빠의 삶을 살겠다. 그게 나의 자녀교육이며 그런 모습을 보여줄 자신 있다. 그건 딱히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본래의 내 모습이기에 지극히 쉬운 일이다.
책을 정리하며, 책과 함께 한 지난 시간들을 되새김질하고, 앞으로 책과 함께 할 나날들을 계획하는 나. 앞으로 남은 세월의 8할도 책이 키우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