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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Mar 31. 2017

[소설]내려놓음 외전 03 밥심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외전 03 밥심






 몇 번을 내다버렸지만 아직 방 안에 다이어트 관련 서적이 50여 권이 넘는 책이 남아있다. 블로그에는 다이어트 일기를 비롯한 칼럼만 해도 100개가 넘고, 비만 및 다이어트 책들을 여러 권 모아 나름의 리뷰 논문 비슷한 것을 만들어 스터디를 진행한 적도 있다. 그만큼 나는 다이어트에 관심이 많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뚱뚱했고 살이 잘 찌는 체질이었기 때문이다. 꽤나 고도의 노력을 했음에도 정상체중의 상한 그 언저리를 맴돌 뿐이었으며 조금만 마음을 놓아도 몸무게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런 나에게 항암 치료는 좋은 다이어트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여지없이 빗나갔다.


 몸무게는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만 갔다. 대개 항암제 하면 떠오르는 미식거림, 욕지기, 구토, 그에 뒤따르는 식욕 감퇴와 같은 부작용은 찾아오지 않았다. 물론 약을 먹는 날, 그 날 밤만큼은 쉴 새 없이 토하느라 힘들었다. 그렇지만 몇 시간을 토해놓고도 아침에 물 한 잔 마시면 금방 원상복구가 되었다. 몸무게도, 식욕도, 삶의 질도 모두. 그럴 때마다 기쁘면서도 왠지 아쉬운 것이, 나란 몸뚱이는 엄청난 강력한 용수철로 되어 있지 않나 생각하게끔 했다. 항상성이 너무나 뛰어나 더 좋게도 더 나쁘게도 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식사량을 일부러 줄였다. 인생의 방학 동안 다이어트라도 해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고 자기 위안 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 다이어트는 식이조절이 가장 우선이며, 대개 비만의 주된 원인이라 손꼽히는 ‘탄수화물’이 첫 번째 희생양이 된다. 최근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저탄수 고지방 다이어트, 수많은 다이어트 법들이 유행을 타고 꺼지는 와중에도 스테디셀러로 그 자리를 늘 지키는 저탄수 고단백 다이어트까지, 결국 저탄수가 핵심이다.


 평소에도 작은 편에 속했던 나의 밥그릇을 이제 반만 채우도록 했다. 내 눈에 보기에 반이 넘어갔다 싶으면 푹 퍼서 다른 밥그릇에 옮겨 담기 바빴다. 늘 하던 자전거 돌리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체중계의 바늘은 나의 노력들을 모른 체 했다. 나의 평소 생활 패턴이나 식사량을 아는 주위 사람들은 ‘아무래도 동완이는 광합성을 하는 것 같아.’ 혹은 ‘니 몸에 아크 원자로 하나 있는 거 같다.’는 식으로 놀렸고, 나는 항암치료로도 줄어들지 않는 살덩이의 생명력에 경외했다. 그래도 이기고 싶었다. 밥을 더 줄였다. 그러자 그간 울상을 지으며 지켜보고만 있던 부모님이 극렬히 반대하기 시작했다.


 잘 먹고 밥심으로 병을 이겨내야 한다며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는 부모님과, 건강에 그다지 좋지도 않은 쌀을 왜 자꾸 먹이려 하느냐 대신 반찬을 많이 먹겠다고 주장하는 아들. 전통이 가져온 잘못된 신념을 고쳐야 된다는 오기까지 덧붙여져서는 끝까지 버텼다. 애초에 대사증후군 기미가 보이는 어머니에게도 밥은 줄여 마땅한 존재였으니까. 난 더욱 당당했다.


 그렇게 소리 없는 밥상 위 눈치 싸움이 지속되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나는 책을 보았다. 박완서 선생님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라는 산문집이었는데, 그 안에서 밥을 덜어내는 나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찌푸린 얼굴에 담긴 마음을 느꼈다.


 사실 이미 알고는 있었다. 이 땅에 20년 넘게 30년 가까이 살아왔는데 그걸 몰랐을까. 밥에 대해 우리가 가진 이미지와 거기에 담긴 마음은 한국인의 핏줄에 잠재하는 집단무의식이나 마찬가지 아니던가. 그렇지만 제대로 표현할 방법이 없어 그저 그러려니 하고 묻어두고 있었다, 보기 싫기도 했고. 그렇게 마음 깊이 묻어둔 마음을 선생님은 정확하고도 풍부한 묘사로 강제로 끄집어내 눈앞에 내보였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고 결국 굴복했다.


우리의 어두운 지난날을 불꽃처럼 살다간 혁명가가 있어 어느 야반, 집에 남은 아녀자들의 가난한 주머니를 털러 잠깐 들렀다가 사라졌다고 치자. 젊은 아내에게 남은 아쉬움은 못다 한 입맞춤이겠으나 그 어미에게는 미처 못 먹인 더운밥이 될 것이다. 미처 못 먹인 밥은 찬밥도 더운밥이 되는 법이다.
나는 아마도 밥을 여린 마음, 다친 마음 등, 마음에는 무조건 잘 듣는 만병통치약쯤으로 아나 보다.
마치 내가 지은 더운밥 한 그릇이 녀석에게 새로운 기라도 불어넣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가슴이 설레고 으스대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못 말리는 늙은이다.



 직접 지은 밥을 먹여야 뼈가 되고 살이 될 것 같은 믿음에 근거가 없지만 자신에게는 위로와 보람이 된다는 그 분의 말 앞에서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님이 마땅히 누려야 할 위로와 보람이 나의 욕심 앞에서 소멸되었음을.


 ‘까짓 것 먹은 양보다 더 운동하면 된다. 나의 귀찮음보다 부모님의 위로와 보람이 더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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