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이렇게 글을 쓴 목적이 하나둘 추가되다보니, ‘이 글에 과연 주제가 있기는 한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답은 의외의 장소에서 나왔다. 방청소를 하다 발견한 대학시절의 정리노트. 그 안에 적힌 매슬로의 욕구 단계 이론에서 찾았다. 인간의 욕구는 위계적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하위 단계의 욕구 충족이 상위 계층 욕구의 발현을 위한 조건이 된다고 보는 매슬로의 이론을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02 - 서문Ⅱ'에 계속)
1단계 ‘생리적 욕구’. 생존에 필요한 본능적 기능에 대한 욕구로서 수면/식사/배설 등이 이와 관련되며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강력한 힘을 가졌다. 삶의 질이 극도로 나빠진 말기 환자는 불면증이나 섭식장애와 같이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 나의 경우, 입원초기에 수면 및 배뇨 문제로 생리적 욕구를 다 채우지 못하는 불편을 겪었었다.
2단계 ‘안전의 욕구’. 두려움이나 혼란스러움이 아닌 평상심과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를 의미한다. 암 진단이 가져오는 충격, 불확실한 미래, 처음 겪는 치료과정 등은 일상생활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이며 이때 두려움과 혼란은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된다. 뇌수술과 암 진단이라는 닥친 현실을 수용할 때까지 나에게 안전의 욕구를 채울 방법은 없었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암 환자는 1단계와 2단계 욕구 충족에 어려움을 겪는 시기를 갖는다. 그러나 사람의 적응의 동물이며 인간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약간의 시간만 주어지면 대부분 극복되며, 그러면 더 높은 욕구에 눈길이 가게 된다.
3단계 ‘애정과 소속의 욕구’. 사회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전반적으로 원활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이것이 결핍되면 사람들은 대개 외로움이나 사회적 고통을 느끼고 스트레스나 임상적인 우울증에 취약해진다.
1, 2단계에서 벗어난 암환자들은 치료를 위하여 반강제적으로 좁은 공간에서 유폐되어야 했던 지난 시간에서 벗어나 더 많은 교류를 원하게 된다. 지금도 늘 마주하고 있는 가족이 아닌, 친구나 동료들과의 소통을 바라며 더 나아가 연인과의 만남을 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의 인식 속의 암환자는 1, 2단계 욕구 결핍에 허덕이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4단계 ‘존중의 욕구’. 주변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싶어 하는 낮은 수준의 존중감과, 자신 스스로 가치 있고 높게 생각하는 높은 수준의 존중감으로 나뉜다. 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람들은 성취감, 자유, 독립성을 추구한다.
이 때 암환자라는 꼬리표는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데에 방해가 된다. 환자이지만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을 크게 없다. 자신의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 앞에서는 그냥 하나의 인간이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홀로 물로 건배하기’ 같은 사소한 부분에서 무심코 환자임을 자각할 때가 있다.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했던 행동들이 이제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하나의 이벤트임을 느낄 때 존중의 욕구는 결핍된다.
5단계 자아실현의 욕구.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정하고, 그 경지까지 자신을 성장시키고자 하는 욕구이다. 상태가 중하든 경하든 상관없이 암은 죽음을 한 번쯤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 결과 많은 환자들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변화를 주기도 하며, 세상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시 설정한다.
나는 자수성가를 하고 싶었다. 돈 걱정 없는 삶을 누리고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성공에 이르는 시간을 단축시키려 했고, 그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소망했던 ‘책 쓰는 한의사’는 단지 목표를 위한 발판으로 그 뜻이 변질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번 일을 계기로 지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삶의 기조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그 결과 작가로서의 꿈은 다시 본래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이론을 바탕으로 글의 목적을 정리해보면
지도(Map)를 만들고자 했던 목적은 ‘안전의 욕구’를 돕기 위함이고,
암 환자에 대한 오해를 깨고 싶었다는 목적은 선입견으로 인해 발생하는 ‘애정과 소속의 욕구’의 결핍을 해소하고자 하는 위함이며,
이 시간이 헛됨이 아님을 증명하고자 한 목적은 ‘존중의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에 맞닿아 있다.
즉 나에게는 ‘존중과 자아실현의 욕구’를 위해,
환자에게는 ‘안전의 욕구’를 돕기 위해,
일반 대중에게는 편견을 해소시킴으로써 환자들의 ‘애정과 소속의 욕구’ 충족에 도움이 되도록 썼다고 할 수 있겠다.
덧붙여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면, 치료기간 동안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구토나 어지러움 같은 신체적인 문제보다는 애정과 소속감의 결핍이었다. 누군가와의 만남을 항상 갈구했지만 사람들은 어느 나이나 상관없이 제각기 할 일 하느라 바빴다.
영국의 지질학자 데릭 v. 애거는 이런 말을 했다.
지구상에서 한 지역의 역사는, 병사의 삶과 마찬가지로 오랜 기간의 권태와 짧은 순간의 공포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여기에 빗대어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한 사람의 암과의 투쟁기록은, 병사의 삶과 마찬가지로 오랜 기간의 권태와 짧은 순간의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어렵사리 만난 사람들이 보내는 연민의 눈빛과 위로의 말도 부담스러웠다. 그 안에 담긴 사랑과 관심이 거짓이 아님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아, 참 내가 환자였지. 아직은 위로 받아야 할 만한 처지에 놓여있구나.’ 하며 갑자기 찾아온 환자라는 자각은 썩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일들이 자꾸 반복되니 먼저 연락 시도하는 것도 한때는 꺼리기도 했다. 신영복 선생님의 책 『처음처럼』 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의 저러한 마음이 자격지심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 준 고마운 글귀이다.
《함께 맞는 비》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함께 비를 맞지 않는 위로는 따뜻하지 않습니다.
위로는 위로를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가 위로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읽는 분의 주변에 아픈 사람이 있다면 먼저 다가가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위로보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해주었으면 한다. 힘을 주고 싶다면 칭찬하면 된다. 운동을 하고 있다면 몸에 근육이 좀 붙었다고 칭찬하고, 마음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굴이 밝아졌다는 식으로.
한마디로 이 글은 욕망의 집합체이다. 다만 모든 욕망이 겉으로 다 표현되는 것은 아니기에 이 글의 대부분은 독백이다. 되도록이면 겉으로 드러난 현실은 과거 시제, 마음 속 이야기는 현재 시제로 기록하였다. 어긋난 부분도 많이 있지만 초보자의 실수, 또는 시적허용 정도로 너그러이 봐주길 바란다.
('03 - 기다림의 시작Ⅰ'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