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려놓음 03 기다림의 시작 Ⅰ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by 한남

03 기다림의 시작 Ⅰ





일생동안 많아봐야 스무 번 남짓 밖에 가질 수 없는 날이 있다. 하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이에게는 더 적게 주어지기도 하는, 작년에도 없고 내년에도 없는 2월 29일. 고등학교 교사인 어머니의 겨울방학이 끝나고 7살 터울 어린 여동생의 대학 입학식이 있었던 그 날.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지난 금요일부터 심상치 않던 두통이 주말에 그 위용을 드러냈다. 때때로 왼쪽 관자놀이를 찌르는 통증은 서있는 것조차 힘들게 했다. 살짝 어둑신해서 바꿀까말까 고민하던 형광등 불빛, 거실에서 들려오는 TV소리에도 짜증이 치밀어 올라 방에 틀어박혀 불도 끄고 누운 채 주말을 보냈다.

문제는 출근이었다. 운전할 때 두통이 발생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안고 고속도로에 차를 올렸다. 다행히 별 탈 없이 도착한 운수 보건지소. 도착하자마자 같이 근무하는 신경과 전문의인 승현이 형을 찾았다.


형 주말에 두통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요.
조그마한 빛이나 소리에도 신경이 거슬리는 게 딱 migraine*이었음.
어디 한 번 보자.


형은 간단한 문진과 함께 이곳저곳을 눌러보더니 긴장성 두통과 편두통이 혼재된 상태 같다며 지소에 있는 약들을 찾았다.



migraine : 편두통
일반적으로 편두통은 머리의 한쪽에서 나타나는 두통을 의미하지만, 의학적으로 편두통은 일측성 / 박동성 통증이 일정 시간 이상 지속되고 구역이나 구토 및 빛이나 소리 공포증이 나타나는 특징적인 두통을 의미한다.



동완아, 여기에 딱 맞는 약은 없다. 적당한 것으로 조합해줄게. 이거 먹고도 별 차도 없으면 처방전 써줄 테니까 약국 가서 약 타.
넵! 그리고 머 이거 먹으면 괜찮겠지.
그리고 MRI 한 번 찍는 거 추천한다. 지난여름부터 니가 이상한 맛이나 냄새나면서 살짝 어지럽다고 했었잖아.
네 그랬죠. 그거 물었더니 형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져가지고는, stem*의 문제라는 둥, seizure* 가능성도 있으니 temporal*일 수도 있다는 둥 엄청 겁줬었죠.
그래, 그 이후로 별 이상 없이 잘 돌아댕기길래 그냥 넘어갔는데 이번에 두통도 있고 하니까 찍어보는 게 어때? 너 이런 두통 처음이라면서?
가끔 가다 통증은 있었어도 이런 패턴은 처음이죠.
그럼 신경 많이 쓰이고 좀 불안하잖아. 내가 병원이 있을 때 보니까 MRI 찍어서 별 소견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두통 강도가 확 줄어드는 케이스 많이 봤다.
심리적 안정감 때문에 덜 신경 써서 그런가보죠?
그렇지. 찍어서 이상 있으면 빨리 발견해서 좋고, 없으면 없는 대로 좋고.
약 먹고도 아프면 찍어볼게요. 돈도 돈이라서.
그래.


stem : brainstem. 뇌줄기, 뇌간(腦幹)
seizure : 간질 발작
temporal : temporal lobe. 측두엽


형이 지어준 약은 효과가 좋았다. 주중 내내 전혀 불편함이 없이 평소처럼 지냈고 그렇게 두통의 기억도 희미해져갔다. 그러나 문제는 야속하게 병원들이 모두 쉬는 주말에 다시 찾아왔다. 단단히 체한 듯 속이 미식거리고 어지러워 주체할 수 없었다. 주말에나 가끔 얼굴을 비추는 아들이 집에 와서는 침대에 누워 끙끙거리고만 있으니 얼마나 속이 탈까? 괜찮다고 이야기해도 어머니는 때때로 방에 찾아와서 살펴보시다 울상을 지으며 떠나셨고, 어머니의 걱정에도 통증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을 토하고 속을 다스리는 침도 스스로 놓기까지 한 다음에야 좀 가라앉아 겨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렇게 침대 위에서의 두 번째 주말을 보내고 맞이한 월요일 아침. 어릴 때부터 나에게 독특한 징크스가 있었다. 주말이나 밤에 열이 39도까지 오르다가도 학교 가야할 아침이 오면 모든 증상이 싹 사라졌다. 학원에는 적용되지 않았지만 학교만큼은 한 번도 빠짐없이 적용되었고 그 덕에 18년 동안 결석 한 번이 없어 주변 사람들은 ‘의무에는 특화된 놈’이라며 나를 놀려먹곤 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지난 월요일처럼 평범한 기적이 일어나 나를 기어코 진료실 의자에 앉혀 놓을 것이라 여겼다.

예상은 빗나갔다. 오히려 어지러움이 더 심해졌고, 문득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본과 3학년 심계(心系)내과 시간에 배웠던 뇌압상승 3징후

- 두통, 구토, 유두부종 -


심계(心系)내과 : 순환 신경내과학



‘승현이 형 말대로 MRI 찍자. 혹시 모를 불안감에 떠느니 그게 낫겠어. MRI 비용으로 심리적 안정을 사는 셈 치자. 어차피 이대로는 출근 못 해.’

바로 운수 지소의 김 여사님께 연락해서 병가를 부탁하고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을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그렇게 2월 29일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04 기다림의 시작 Ⅱ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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