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려놓음 25 D-4 Ⅱ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by 한남



25 D-4 Ⅱ




[3/13 일]

오전 11:00

이종사촌형 내외가 병문안 왔다. 예기치 못한 방문이라 놀랐다. 늘 그렇듯 무용담을 늘어놓았지만 왠지 평소처럼 신이 나거나 그러지는 않다. 이미 이모나 사촌누나들을 통해 이야기도 많이 들었을 거라는 짐작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어젯밤의 충격이 아직 남은 탓이다. 조금은 진중한 분위기에서 이야기가 나온다. 똑같은 경험을 똑같이 이야기하건만 더 짠하다. 병원에 와서 실제로 눈물 글썽인 것은 정말 간만이다.


나에게 EFT를 가르쳐주셨던 최우석 선생님은 ‘기억의 편향성’이라는 개념을 이렇게 설명했다.


기억을 떠올리는 행동은, 단순히 컴퓨터에 저장된 기억파일을 불러와 재생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 파일을 클릭하는 순간부터 다시 작성하게 된다. 따라서 그 시점의 감정이나 기분에 따라서 기억파일은 변형된다. 그때는 그냥 지나쳤던 시어머니의 말에 대한 기억도 부부싸움 후에는 더 기분 나쁘게 기억되고, 이야기하다가 신이 나면 기억에 더 살이 붙는 것도 다 그 이유 때문이다.


기억 자체는 변화된 것이 없지만, 기억의 편향적 특성으로 인해 기억을 회상하는 현재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그 기억에 부여된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

(나쁜 기억 지우기. 이진희, 송원섭, 정신세계사 40p)


사실 이 글은, 박완서 그 분의 말마따나 ‘순전히 기억에 의지한 소설’이다. 차츰 상황이 안정되면서 정돈된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폭풍 속에서 험난한 항해를 해야 했던 초기에는 그러지 못했다. 밀려오는 파도에 맞서 싸우기 위해 숨 가쁘게 키를 돌려야 했던 그때, 깊은 생각이 자리할 곳은 없었다.

생각은 수없이 날 뛰었다. a를 생각하다 b를 생각하고, b를 생각하다 c를 생각하고, c를 생각하다 a′를 생각했다. 영화 《사토라레》의 주인공처럼 내 생각이 주변에 생중계되었다면 혹자는 정신의학적 증상 중 하나인 ‘수미일관성(coherence)’의 부족을 의심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상황도 마음도 진정이 된 후에야, 조각나버린 생각들의 조립에 도전 할 수 있었다.


수미일관성(coherence) :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으로 질서 있게 연결되고 진행되어 나가는 것.


생각의 조립작업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짜 맞추어도 생각의 도자기에는 빈 곳이 많았다. 없어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없던 부분이리라. 그 당시에는 두려움, 불안이라는 두꺼비가 그 자리를 메꾸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결국 적당히 그때 기분을 상상해서 메꿀 수밖에.

문제는 그 ‘상상’이다. 지금의 기분에 따라 ‘상상’의 색이 달라진다. 기분이 울적하면 울적한 색으로, 위로가 필요할 때는 희망의 색으로 색칠된다. 그래서 이모 앞에서 만든 도자기와 사촌형 앞에서 만든 도자기는 전혀 다른 색이다.

이 글도 그러하다. 기억에 의존하여 쓰는 이상 ‘기억의 편향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에 이 글은 사실이 아닌 fiction이다.



오후 4:00

옷을 껴입고 운동을 위해 외출을 했다. 입원해있는 라파엘관 1층으로 내려와 스텔라관까지 갔다가 나온 김에 얼마 전에 완공했다는 ‘데레사관’까지 가보았다. 재활의학과, 운동재활센터가 있다. 수술하기 전에 재활병원에서의 삶을 생각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일어서는 연습을 하는 나.

떨리는 손으로 열심히 글씨 연습을 하는 나.

6개월이면 걸을 수 있다고 했어. 조금만 참자.

1년이면 글씨 쓸 수 있대. 노력해보자.


하지만 그 1년은, 재수술이 있지 않은 이상 영원히 내 마음 안에만 존재할 것이다.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올 일이 없으리라.

정말 많은 걸 해냈다. 내가 다 했다고는 할 수 없다. 24시간 옆에서 간호해주신 부모님, 장시간 수술을 했던 의료진의 공이 크다. 나는 그냥 짐승 같은 회복력으로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었을 뿐. 수술 이전에 했던 존재나 후유증에 대한 염려는 이제 필요가 없다. 직업적 능력을 잃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한의학적 지식이 사라지지 않도록 공부 좀 해야겠다. 동생보고 집에서 나올 때 전공서적 몇 권 들고 오라고 부탁해야지.




(26 D-4 Ⅲ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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