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려놓음 26 D-4 Ⅲ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by 한남



26 D-4 Ⅲ




[3/13 일]

오후 6:00

이세돌알파고를 이겼다. 열심히 바둑을 두는 모습이 멋있다. 5판 3선승제에서 내리 3연패하여 이미 승부가 결정 난 상황에서도 의지를 잃지 않고 승부에 임했다. 승부에 늘 저돌적인 면모를 보였던 그였기에 그 모습은 더 감동적이다.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 몇 번 실패해도 괜찮다. 져도 된다. 이길 수 있는 방법만 알 수 있다면 상관없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한 번만 이기면 된다. 마지막 딱 한 번. 나도 할 수 있다.



오후 7:00

심심할 때면 지난 시간을 되돌아본다. 대견하다. 최선이었든 최악이었든 그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 시간들을 버텼다. 물론 실감이 안 났던 것도 있고 확정된 것 하나 없다보니 어디까지 걱정해야 할지도 몰랐던 점도 작용했다. 심지어 지금도 양성인지 악성인지 모르고 있지 않은가?

사실 실감이 안 났다고 이야기해도, 이야기들이 구체화 되고 운명의 시계가 째깍거리는 게 느껴진 그때부터는 결국 겁에 굴복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실수도 하고 상처도 많이 주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괜찮지 않은가? 좀 자랑스러워해도 될 것 같다.


재훈이 카톡 상태 메시지가 ‘잘한다~ 니 정도면 잘하고 있는 거지’ 이다. 내 상태 메시지에 대한 답일 것이다. 나를 이렇게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난 할 수 있다. 모르긴 몰라도 재훈이가 믿는 놈이라면 그 놈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오후 8:00

어릴 때부터 교류가 많았던 규진이 아주머니가 왔다가셨다. 내가 몰랐던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아프기도 참 많이 아프면서 애늙은이로 살았다. 아픈 것으로만 속 썩여서 그나마 다행이다. 다른 문제로도 속상하게 했다면 쌍욕을 먹어도 할 말 없는 불효자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내 자식도 나처럼 아프면 어떡할까 하는 걱정이 든다. 아프다는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잘 아프는 건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만 아프고 싶다.


찾아와준 친구에 신이 났던 것일까? 어머니는 잊고 있었던 비하인드 스토리를 기억해냈다. 내가 응급실에서 비몽사몽으로 헤매는 동안, 어머니는 내 폰으로 승현이 형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이 병원에서 수술할지, 아니면 다른 더 좋은 병원으로 가서 수술할지 지금 결정해야 된다고 해서 고민하다가 다급한 마음에 오밤중에 전화를 건 것. 형은 ‘동완이 상태를 봤을 때, 서울로 이송하다가 출혈 같은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그냥 그 병원에서 입원하고 수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라고 상담을 해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정호의 상황이, 형이 우려하던 바였다. 까딱했으면 나도 그럴 뻔 했다. 나는 승현이 형의 조언으로 정호 상황에서 벗어났고, 정호는 지만의 형의 배려로 죽음에서 벗어났다. 어쩜 이렇게 정교하게 짜 맞추어 놓았을까? 운명이라는 존재에 감탄해본다.


어떻게든 형들에게 보답할 일이 있으면 좋겠다. 둘 다 벌써 반려자도 구했고, 딱히 모자라 보이는 것 하나 없는 사람들이라 그럴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후 9:00

스테로이드 용량을 줄이고 있다고 한다. 호전되고 있다고 받아들여도 되겠지?




(27 D-3 Ⅰ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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