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려놓음 28 D-3 Ⅱ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by 한남



28 D-3 Ⅱ




[3/14 월]

오전 8:00

치프가 왔다. 준비했던 대사를 읊었다.

‘교수님의 회진은 언제 있는가? 규칙은 있는가?’


기약 없는 기다림은 이제 지쳤다. 능동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교수님의 회진은 월, 수, 목 일주일에 3일 있으며 대개 월, 목은 오후에 수요일은 오전에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은 5시쯤에 오시며 피검사, 소변검사, CT, X-ray가 예정되어 있다고 알려주었다. CT검사 결과가 좋게 나오길 빌어본다.



오전 9:30

9시는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는 시간이다. 나는 항상 이 시간을 기다린다. 어지럼증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미뤄둔 일들을 해결한다. 대변도 간만에 시원하게 보았고, 고양이 샤워하고 환자복도 갈아입었다. 양치질도 하고 면도도 했다. 행복하다. 지금만큼은 환자가 아닌 것 같다.


스테로이드는 양날의 검이다. 그것도 매우 날카로운 칼이다. 지금 병실메이트는 스테로이드 때문에 지금 내 옆에 누워있다. 아저씨는 미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분으로 대상포진으로 인한 극심한 신경통을 관리하기 위해 스테로이드계 약물을 투여 받으며 생활했었다. 그런데 미국 현지 의사의 방만한 의료행위 때문에 스테로이드 부작용을 제때 발견하지 못했고, 혈당관리가 안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참다못했던 아저씨는 자신의 형이 의사로 근무하고 있는 이곳으로 바다건너 치료받으러 온 것이다.


보건소에서 근무하면 뼈 주사 맞았다고 신나서 동네마실 갔다 와서 몸살 난 할머니 여럿 볼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아픈 게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못 느끼게 된 것뿐이라고, 그러시면 안 된다고 타박했다. 애가 너무 심하게 울어서 근처에 가지도 못하는 거 덜 들리도록 해놨으면 얼른 애를 달래러 가야지, 조용하다고 모른 척 놀러 다니면 되냐고, 혼 좀 나셔야겠다며 이번에는 침 아프게 놓을 거라 으름장을 놓곤 했다. 손자뻘 되는 총각의 걱정 어린 재롱을 즐거워하시면서도 주의사항을 잘 지키지 않는 할머니의 마음을 그때는 그러려니 짐작만 했었는데, 이제는 알 수 있다. 지긋지긋한 통증에서 벗어난 그 순간 몸만 허락했다면 동네 마실이 아니라 야유회라도 가고 싶었으리라.



오전 10:00

컨디션이 좋아진 김에 병동을 거닐어보았다. 6층 병동을 끝에서 끝까지 한 번 왕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분 남짓. 10번을 왕복해도 10분이다. 복도는 카트를 끌고 이 병실 저 병실 다니는 간호사, 난간을 붙잡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열심히 옮기는 할머니, 휠체어를 열심히 굴리며 바깥구경 나가는 할아버지로 혼잡스럽다. 조심해야 할 사람들이 많다. 운동하기에는 썩 좋은 곳이 못 된다.

멀리 나가고 싶다. 하지만 CT검사가 언제 있는지 몰라 그럴 수 없다. 아버지의 시야에서 잠시 벗어난 지금 전화통화 하나가 아쉽다. 폰을 열어 연락처를 찾아보았다. 400개 가까이 되는 전화번호. 그러나 전화 걸 곳도 올 곳도 마땅치가 않다.


언제부터인가 전화는 ‘이벤트’가 되었다. 톡 메시지는 쉽게 보내도 전화는 어렵다. 텍스트로는 전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는데, 그게 필요한데 방법이 없다. 위로 하나, 위안 하나가 필요하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에게.

이쪽을 다가오고 있는 저 사람이 나에게 힘내라고 응원의 한 마디를 건네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옷을 보니 환자도 의료인도 아닌 것이 누군가의 보호자인 듯하다. 그 사람도 위로와 위안이 필요하리라. 위로와 위안이 필요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곳이 바로 병원이다. 같이 힘내자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용기가 없다. 그리고 환자복을 걸치고 머리에 배포장지 싼 사람이 대뜸 힘내자고 소리치고 있으면 미친 놈 취급 받기 십상이다. 머리 수술 받고 이상하게 된 줄 알고 짠하게 바라볼 수도 있을 거다.




(29 D-3 Ⅲ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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