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문 위로 복도 형광등 불빛이 비치는 652호. 빛줄기는 방향을 틀어 나를 덮쳤다. 어두운 밤 명암의 차이만 존재하던 공간은 수많은 색깔들로 물들여졌고 방 안에 모든 것들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 웅성거렸다. 생각의 구멍을 꽉 막고 있던 온갖 어둠이 빛줄기에 녹아내렸고, 그렇게 열린 구멍에서는 환희가 쏟아져 나왔다. 환희의 폭발. 폭발은 어둠에 짓눌렸던 그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양 격렬했다. 복도에 나가 미친 듯이 외치고 싶었다. 나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다. 세상에 자랑하고 싶었다. 새벽 3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가라앉던 나의 영혼은 다시 숨쉬기 시작했다.
‘나는 죽지 않는다.’ 여기서 모든 반전이 시작되었다. 암이 곧 죽음을 의미하던 시절 이모는 살아 돌아왔다. 머리가 다 빠져 모자를 써야했고 항암제 주사만 보아도 반사적으로 올라오는 구역질을 견디던 그녀는 지금 내 옆에 있다. 그제는 입원한 나를 위해 내가 좋아하는 수육을 삶아왔다. 아마 어제는 부처님께 나의 쾌유를 바라며 열심히 기도드렸을 것이다. 내 옆에서 고단한 잠을 이루고 있는 아버지. 아버지도 10년 전 암을 앓으셨지만 완치되었다. 어제는 그 경험을 살려 나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자세히 설명해주기도 했다.
더 많은 나이. 덜 발달된 의학기술. 그 상황에서 이모와 아버지는 모두 이겨내었다. 회복력도 체력도 내가 더 좋고, 의술도 더 발달해서 삶의 질과 생존율 모두 높다. 게다가 의학적 및 한의학적 지식도 있어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이나 잘못된 선택을 할 가능성도 제어할 수 있다. 떨 이유가 전혀 없다. 그리고 교수님은 8개월이라는 치료 기간을 언급했다. 그냥 나온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의료 시스템 상, 오프 더 레코드가 아닌 다음에야 입 밖으로 나온 말에는 책무가 뒤따른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 적도 없고, 치료 기간도 제시했다면 이는 분명 끝이 존재하는 게임이다.
나의 면허번호는 23000번 대. 그 후 2년이 지난 걸 감안하면 현재 대한민국에는 25000명의 한의사가 있다. 그 중에서 젊은 나이에 뇌종양을 앓았고, 무사히 돌아온 한의사가 몇 명이나 될까? 이제 이 경험은 나만의 ‘identity’가 될 것이다.
암에 걸렸어도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아무 탈 없이 극복해낸 인간.
내가 누군가를 진료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힘든 환자에게는 희망이다. 이모와 아버지를 보고 내가 힘낸 것처럼.
그리고 아플 때 나타나는 감정과 생각들을 ‘공감(共感)’ 할 수 있다. 이해로서는 도달하기 힘든 영역이 있다. 그 곳에 나는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다. 환자로서 많은 것을 겪었고 또 겪어나갈 것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의사의 공감어린 말 한 마디의 무게는 흔들리는 환자의 마음을 붙잡는 균형추가 된다. 공감이 만든 신뢰를 바탕으로 나는 당당하게 말 할 것이다.
할매, 다 마음에 달려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 내가 아파보니까 가장 중요한 게 내 마음이더라. 내가 힘들다카면 감기에도 빌빌거리는 게 사람이고, 내가 괜찮다하면 뇌종양에도 사는 게 사람이더라. 걱정 하지 마라 할매. 다 낫는다 생각하면 못 나을 병 없다.
예전부터 정신 건강에 관심이 많았던 나였다. 그런 나에게 이번 아픔은 임상경험을 쌓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인 셈. 나는 졸업하기 전부터 미래 한의원 이름으로 정해놓은 것이 하나있었다. ‘내려놓음 한의원’. ‘ㄴ,ㄹ,ㅁ,ㅇ’ 울림소리로만 이루어져 어감도 좋고, ‘몸의 짐을 내려놓음 – 다이어트’, ‘마음의 짐을 내려놓음 – 정신건강’. 이렇게 스토리텔링도 되어서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이 플랜 아래에서 다이어트도 시도해보고 NLP나 EFT, MBSR과 같은 심리 기법에도 관심을 두고 관련 서적을 수집했다.
EFT( 감정 자유 기법)는 ‘Emotional Freedom Techniques’의 약자로서 한의학을 기반에 둔 심리 기법으로 최우석 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시작했지만 시연 대상으로 갑자기 뽑혀 무대로 올라가면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 EFT 감정 자유 기법 -
미국의 게리 크레이그(Gary Craig)가 창안한 심리치료법으로 동양의 경락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부정적 감정은 신체에너지시스템(경락기능)이 혼란된 것이라고 전제하며, 특정 타점(경혈)을 두드림으로써 신체에너지시스템의 혼란을 해소해 치유하는 기법이다.
나는 사람 앞에 서면 곧잘 떨어 불편한 점이 많았다.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으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목소리도 이내 떨리기 시작한다. 그런 내가 갑자기 무대 위로 소환된 것이다. 나를 지켜볼 수강자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선생님의 지시에 집중하고 따랐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떨지 않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효과는 일시적이며 반복을 통해 점진적으로 호전시키는 방법으로 치료를 진행한다고 설명했으며 실제로도 일시적이었다. 그렇지만 즉시 효과가 나타나고 재현성이 뛰어나다는 점은 나에게 크게 와 닿았다. 힘들 때마다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용하지 않은가.
실제로 훈련소에서 마음이 힘들 때마다 남들 몰래 자주 실습했고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뒤로도 자주 EFT를 실시하여 지금은 무대공포증도 많이 줄었다. 그러니까 이번 암 투병에서도 나를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며 이따금 찾아올 감정의 기복, 마음고생들을 덜어줄 것이다. 심지어 나에게는 책 제목 자체가 『내가 비록 암에 걸렸지만』인 EFT 서적도 있다. 이보다 더 나를 적절하게 설명해줄 문장이 있을까? 이제 이 책을 통해 치료와 공부, 실습을 동시에 할 것이다. 치료받는 동안 멍청해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들 하면서 지내면 된다. 공부도 하고, 정리도 하고, 글도 써보고, 운동도 하고. 그 뿐일까? 항암치료 하면 살도 빠진다. 군살을 뺄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본1 시절 잠시 가졌던 샤프한 턱선을 되찾아보리라.
43 던져진 주사위(하)Ⅲ 에 계속